왕건 - 무력·회유 양동전략 구사
견훤 - 공포감 심어줘 통일 실패

이때 왕건은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태봉의 호족과 조정 관료 그리고 백성들의 추대 속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왕건은 궁예가 폭정으로 온 나라 사람들의 공적(公賊)이 될 때까지 참고, 참고 또 참았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무르익어 나라 안의 유력 호족과 실력 있는 장수들이 자신에게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라고 하는 순간까지도 왕건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온 나라 안의 여론이 자신의 편이 되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러한 전략 탓에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임금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결정했을 때는 이미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이 궁예에게 등을 돌린 후였고, 이 때문에 왕건은 자신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나라(태봉)와 백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왕건이 때를 기다리지 않고 일찍이 칼을 뽑아들어 궁예의 왕좌를 빼앗으려 했다면 조정 관료와 호족 세력 그리고 민심은 왕건과 궁예의 양편으로 나뉘어 설령 왕건이 승리를 얻었다고 해도 정치적 혼란과 민심의 동요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것은 ‘상처로 얼룩진 승리’였을 것이다.
여하튼 태봉을 새로이 고려로 개명해 임금이 된 이후에도 왕건은 ‘피 흘리지 않고 승리하는 전략’을 놓지 않았다. 그는 무력으로 호족들을 제압하고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회유와 포섭을 통해 호족들을 굴복시켰다. 특히 이 경우 호족들과 ‘혼인 동맹’을 맺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다. 그러나 피 흘리지 않고 책략과 외교만으로 상대방을 온전히 굴복시키는 왕건의 ‘모공(謀攻)’이 결정적으로 빛을 발한 사건은 바로 ‘신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이었다.
소모전
왕건의 ‘모공’을 살펴보기에 앞서 무력을 동원해 신라를 정복했던 견훤이 어떤 전략적 실책을 저질렀는가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왕건이 ‘최선의 전략’을 선택한 반면 견훤은 ‘최악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손자가 여기에서 말한 전략의 요점은 물론 ‘소모전(消耗戰)과 책략전(策略戰)’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후삼국 시대 왕건과 더불어 천하 패권을 겨루었던 견훤이 저지른 최고 최대의 ‘전략적 패착’은 다름 아닌 신라를 무력으로 정복하고 그것도 모자라 함락 당한 왕성(王城)에서 온갖 추잡한 악행을 일삼아 신라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사건이다.
견훤은 서기 927년 9월 신라를 공격해 그 해 11월 왕성인 서라벌에 들이닥쳤다. 당시 신라의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견훤의 군사가 들이닥치자 황급하게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달아나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귀족과 관료 및 궁녀와 악공들은 모두 견훤의 군사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견훤은 사정을 봐주지 않고 무차별적인 살육을 감행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풀어 나라의 재산이든 혹은 개인의 물건이든 가리지 않고 재물을 약탈하도록 했고, 신라의 궁궐을 차지하고 앉아 경애왕과 왕비를 찾게 했다. 결국 후궁에 몸을 숨기고 있던 왕과 왕비가 군중(軍中)으로 잡혀오자 견훤은 경애왕에게 온갖 욕설과 핍박을 가해 자살하도록 강요했고 왕비를 강간했다. 그런 다음 경애왕의 족제(族弟)인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힌 다음, 왕실 창고에 있는 온갖 보물과 병장기는 물론 왕족과 솜씨 있는 기술자들을 인질로 빼앗아 돌아갔다.
견훤은 이 날의 승리로 마침내 신라를 복속시키는 ‘대망(大望)’을 이루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신라 사람들은 이 날을 천 년 역사상 가장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날로 기억했다. 아무리 무력을 앞세워 적을 짓밟더라도 진정으로 승복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절대로 상대방에게 ‘수치심과 모멸감’을 안겨주어서는 안 된다. 견훤은 막강한 무력을 동원해 단숨에 신라를 뒤엎어 신라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 저지른 포악무도한 행동은 ‘공포와 두려움’을 넘어서 ‘증오’를 낳았다. 막대한 군사와 전쟁 물자를 동원하고서도 견훤이 신라에서 얻은 것이라곤 고작 ‘증오’뿐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책략전
많은 사람들이 <손자병법>을 전쟁과 전투 혹은 싸움에서 승리하는 전략과 병법의 기술을 가르치는 고전(古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손자병법>이 전하는 핵심 전략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싸우지 않고서도 자신의 적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손자가 말하는 최고의 전략이자 병법이다.
따라서 손자에게 최고로 가치 있는 전략적 행동이란 무력행사에 의존하지 않고 책략과 외교술을 구사해 승리하는 것이다. 물론 계략과 외교술에 의존한 책략전이라고 하더라도 무력 사용을 완전히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때 역시 무력행사는 계략과 외교로 적을 항복시키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만 이용돼야 한다. 곧 무력은 지극히 ‘제한적’인 수준과 방식으로 사용되며, 그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적을 제압하고 굴복시키기 위한 일종의 ‘무력시위’에 그쳐야 한다. 계략과 외교의 사용은 때로는 힘없는 자의 비굴함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에 적절한 무력행사와 힘의 과시는 유익하다.

왕건은 이러한 무력시위와 책략전의 상호의존 관계를 정확히 간파한 인물이다. 그는 신라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동안에도 끊임없이 신라의 장수와 주변 호족들을 포섭·회유해 투항시키는 방식으로 신라를 압박했다. 그는 호족들을 제압해 굴복시킬 때도 무력행사와 포섭·회유 전략을 적절하게 섞어 구사했다. 항복하면 모든 기득권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출셋길까지 보장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굴복시키겠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변에 퍼뜨렸기 때문에 신라의 국론과 민심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왕건은 신라의 국론과 민심의 향방이 자신에게 급속하게 기울고 있음을 꿰뚫고 서기 931년 2월 ‘대대적인 정치 이벤트’를 기획·연출해 천하 패권의 결정적 승기를 손에 거머쥐었다. 당시 왕건은 고작 50여 명의 기병만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찾아와 예의를 갖춰 경순왕을 만났다. 특히 임해전에서 열린 환영 잔치에서는 자신이 지난 날 신라가 견훤에게 당한 치욕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십 일을 머무는 동안 자신을 따라온 고려의 군사들이 엄숙하고 공정하게 행동하도록 해 견훤의 군사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정치 이미지’를 심기 위해 애썼다. 흔히 약자가 강자에게 베푸는 호의는 나약함과 비굴함의 표현으로 보이지만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호의는 배려와 은혜로 받아들여지게 마련이다. 왕건이 서라벌을 직접 찾아가 벌였던 ‘정치 이벤트’에서 노렸던 책략의 효과가 바로 그것이었다.
왕건은 견훤처럼 강자였지만 전혀 다른 이미지로 신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다. 곧 견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고 언제 또 다시 목숨을 빼앗으러 올지 모르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왕건은 천 년 신라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혼란을 어루만져줄 어진 군주로 다가왔다.
“옛날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오늘 왕공(王公)이 오니 마치 부모를 뵙는 것 같구나.”(<삼국사기> ‘경순왕편’)
이렇듯 왕건은 책략을 통해 신라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렸다. 이 때문에 그로부터 5년 후 경순왕이 나라를 온전히 왕건에게 바쳤을 때 신라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기꺼이 왕건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다. 적국의 군대와 자원과 백성을 ‘온전히 보존하고서 굴복시켜라’는 손자의 메시지를 이보다 더 철저하게 실천한 전략이 있을까?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하는 것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만 못하다
책략전과 소모전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책략전이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전략이라면, 소모전은 ‘최대 비용으로 최소의 효과’만을 얻을 수 있는 전략이라는 점이다. 또한 책략전은 전쟁의 과정과 결과 모두 중요하고 신중하게 다루는 반면 소모전은 전쟁의 결과만을 중요하게 취급한다는 것이다. 곧 소모전은 자원과 비용을 낭비하고 인명을 살상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만 하면 된다는 전략이다. 그리고 한 나라를 파괴하고, 그 나라 백성들의 삶을 짓밟더라도 적국을 제압하고 굴복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전략일 뿐이다.
대개 전쟁이나 정치의 현장에서 공포와 두려움의 효과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심리전의 대가들은 공포와 두려움이란 증오를 수반하지 않을 때 가장 커다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증오를 수반한 공포와 두려움은 저항의식을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말한다. 왕건과 견훤은 모두 당시 신라의 군신과 백성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이 왕건과 견훤에게 느낀 공포와 두려움의 ‘질’은 완전히 달랐다. 견훤이 서라벌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저지른 온갖 악행(?)을 지켜본 신라 사람들은 그를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반면 왕건이 신라의 장수와 호족들을 회유·포섭해 투항시키는 과정과 서라벌에 입성해 기획·연출한 행동을 지켜본 신라 사람들은 그를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로서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미래를 맡겨도 괜찮을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견훤은 신라 사람들에게 ‘증오심과 복수의 감정’을 심어주었지만 왕건은 정반대로 ‘기대감과 희망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바로 책략전과 소모전의 차이다. 이 전략의 차이 때문에 견훤은 엄청난 땀과 피를 쏟아 부어 신라를 정복했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반면 왕건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으면서도 마치 세상을 구할 ‘성군(聖君)’으로 대접받으며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승리한다고 해도 아군과 적군 모두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승리로 인해 얻는 ‘이로움’이 전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또한 자신을 향해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불타는 수백, 수천만의 적대자만 낳는다면 그 승리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역사상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멸망한 나라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 탁월한 전략가들은 자주 전쟁을 하고 또한 자주 승리하는 것은 오히려 군주를 오만하게 하고, 장수와 군사들의 기강을 무너뜨리며, 수많은 적을 만들어 나라의 멸망을 부르는 지름길이 될 뿐이라고 경계했다. ‘싸우지 않고서 승리하는 것’, ‘상대방을 온전히 보존하고서 굴복시키는 것’, 이것이야말로 <손자병법>이 전하는 전략의 최고 가치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