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화•유통구조 혁신으로 친환경 농업 성공

전북 완주군 고산면의 고산농협이 한 해 취급하는 농산물은 100억원어치. 이중 친환경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36억원에 달한다. 다른 지역농협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지난해에는 우크라이나 농업시찰단이 방문하는 등, 1000여 명의 농업인이 다녀갔다. 손병철(50) 고산농협 상임이사는 “전국에서 광역친환경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각 기관의 관계자들이 한 달에 서너 기관씩 방문해 성공 노하우를 배워간다”고 말했다.
이렇게 고산농협이 친환경 농업의 성공적인 모델로 떠오른 것은 광역친환경단지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다. 한때 고산농협은 합병 과정에서의 부실채권, 농촌 지역의 경기 불황 등으로 인해 적자 경영과 경영 개선 권고 조합이라는 불명예를 썼다. 이러한 오명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친환경 농업을 택한 것이다.
국영석(48) 고산농협 조합장은 “웰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친환경 농업이 미래에는 가장 가치 있는 농업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고 말했다. “농산물 수입 개방에 적극 대응해야 했고, 무엇보다 농가 소득 증대에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완주군은 예로부터 청정지역으로 불렸는데, 이러한 장점을 잘 살리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지요.”
고산농협이 친환경농업단지 사업 주체로 선정된 것은 2006년 1월. 고산면 등 5개 면지역 1150ha에서 친환경 농산물 생산을 목표로 국비를 포함해 총 100억원을 투입해 친환경 농산물 생산 및 유통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사업 초기 154ha에 머물렀던 친환경 농산물 재배 면적은 이제 600ha에 육박하고 있다. 2012년까지 800ha로 늘리는 것이 목표다. 친환경 농산물산지유통센터와 농축산물 생산시설, 부산물 퇴비공장인 경축순환자원화센터 등이 설립돼 이미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다.
고산농협은 광역친환경단지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지난 2월 농협중앙회가 실시한 2008년도 지역농협 종합 업적 평가 결과 최우수 농협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종합 업적 평가는 농협중앙회가 지난 한 해 동안 지역농협의 경제·신용·교육·문화·복지 사업 등 모든 사업의 성과를 종합 평가해 선정한다.
국 조합장은 “친환경 농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단지의 규모화가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고산농협이 명확한 사업 주체가 돼 지자체와 지역 농민들을 동참시킨 것이 성공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전북 완주군 고산면 율곡리 외율마을. 모내기를 앞둔 논에 잡초가 무성했다. 타 지역의 농지 같았으면 제초제로 잡초를 제거했을 테지만 이곳은 다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할 수 없다. 이미 농약과 화학비료는 이 지역에서 퇴출됐다. 이곳에서는 우렁이가 잡초를 제거하는 일명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다.
자체 통제 시스템으로 품질 관리 철저히
손병철 상임이사는 “처음에는 농민들이 비료나 농약 없이 어떻게 농사를 짓나하고 의문을 가진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친환경 농법이 연착륙했다”고 말했다. “어떤 농민은 친환경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아마 밤에 몰래 비료도 뿌리고 농약도 칠거라고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농민이 이제는 농약이나 비료 없이도 농사를 짓고 있어요.”
혹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하면 바로 들통 난다. 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일정기간마다 농작물의 DNA를 검사하고, 소비자감시단이나 유통업체 등이 불시에 들이닥쳐 수질이나 토양 검사를 하기 때문이다. 화학비료나 농약성분이 검출되면 친환경 인증에서 바로 탈락된다.
손 이사는 “소비자단체들이 모니터링하기도 하지만 품질관리는 농협이 자체통제 시스템을 갖추고 자율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비료는 축산분뇨를 발효한 퇴비를 사용한다. 외율마을에서 조금 더 산 쪽으로 들어가자 퇴비화 시설인 ‘경축순환자원화센터’가 나타났다. 설립 당시 혐오시설로 인식되면서 부지를 네 번이나 옮기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곳은 농촌 수질 오염의 주범인 축산분뇨를 수거해 퇴비로 만든다. 축산분뇨 20만 톤이 퇴비로 활용된다.
유기 축분을 활용해 친환경 농업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퇴비를 생산, 이를 농가에 공급해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 자연순환농업의 이상적인 모델을 구축한 것이다. 손 이사는 “경축순환자원화센터는 친환경 농업의 시작점”이라고 했다.
퇴비를 만드는 과정은 수거된 축산분뇨를 톱밥과 평연왕겨(부드럽게 발효된 왕겨), 토착 미생물 등과 섞으면서 시작된다. 이렇게 혼합된 분뇨를 거대한 톱니모양의 기계가 30일 동안 다시 뒤섞는다. 바닥에 바람이 나오는 곳에서 다시 40일 동안 발효시키고, 이것을 80일 동안 묵혀 퇴비로 만든다. 미생물 등으로 발효되기 때문에 특유의 악취도 없다.
이 센터의 한 해 퇴비 생산량은 1만 톤가량으로, 500농가가 쓸 수 있는 양이다. 이 지역 농가에는 퇴비 구입비의 50%가 지원된다. 오문상 공장장은 “150일 이상 발효되기 때문에 땅 힘을 높이는 데 그만”이라며 “다른 지역에서도 공급해 달라고 하지만 고산면에 공급하기에도 모자란다”고 말했다. “퇴비가 좋다고 막무가내로 뿌리게 하진 않습니다. 토양을 분석해 퇴비 량을 알맞게 조절합니다. 과학적 분석을 통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죠.”

경축순환자원화센터 옆에는 미생물 배양시설이 있다. 이 시설에서 배양된 토착 미생물은 병충해 방제에 사용된다. 고산농협이 과학의 힘을 빌리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원적외선 건조저장시설도 그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벼를 말리면 알갱이 내외부의 수분 차이로 인해 미세한 금이 생기고 이것은 밥맛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원적외선 건조는 이를 방지해 밥맛을 최고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 저온저장시설은 수분을 17~18%로 유지시켜준다. 손 이사는 “단순 친환경 농산물이라기보다는 친환경 ‘품질관리’ 농산물이라고 해야 맞다”고 말했다.
양배추, 딸기 등은 해외에도 수출
광역친환경단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 집하돼, 선별·포장·저장된다. 농산물산지유통센터에서는 표고버섯 경매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 센터에 쌓인 표고버섯은 29톤, 7억6000만원어치에 달했다. 전북 지역에서 생산된 표고버섯은 모두 이곳으로 집하돼 경매가 이뤄진다고 한다.
고산농협은 농산물산지유통센터의 체계적인 물류 시스템을 이용해 해외 시장 공략에도 성공했다. 완주군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양배추의 경우 전년보다 작황이 좋아 산지에서 공급과잉으로 폐기처분되고 있는 가운데 농산물산지유통센터를 통해 대만에 240톤을 수출했다. 딸기도 수출을 통해 농가 소득 향상에 기여했다. 고산농협은 지난해 3월과 4월 매주, 300~400kg의 딸기를 러시아에 수출했다.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고, 공동선별을 통해 품질이 균일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손 이사는 “블라디보스토크 등 극동 러시아 지역은 우리나라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선박으로 1~2일밖에 소요되지 않기 때문에 신선 농산물 수출 지역으로 손색이 없다”며 “농산물산지유통센터의 유통 조성 기능을 강화해 러시아와 대만 외의 해외 시장 공략에도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농산물산지유통센터 옆 공동 육묘장은 친환경 작물 재배에 따른 우량 묘를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다. 육묘장에서는 이곳 특산물인 비봉수박 모종이 농민들에게 보내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손 이사는 농가 서비스 차원에서 실비만 받고 공급하고 있다고 전했다.
친환경 농축산물 홍보관인 웰컴센터는 고산농협이 인근에서 생산되는 친환경 농축산물을 싸게 파는 곳이다. 한우전문매장을 비롯하여 완주 지역 친환경 농산물과 특히 지역 특산물을 알리고 우수 농산물의 생산, 재배, 유통의 전 과정을 한눈에 보여주는 교육홍보관이 마련돼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센터의 2층은 농업 교육장 및 회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와 학교 급식 등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것은 고산농협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고산농협은 친환경 농축산물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유통구조 확립에 가장 큰 공을 들였다. 고산농협은 완주군과 서울 서대문구의 학교 급식으로 친환경 농산물을 납품하고 있으며, 생협연대, 이마트, 홈플러스 등에도 친환경 쌀과 각종 채소류 등을 공급하고 있다. 인근 군부대인 35사단 전 예하부대 30곳에도 280여 가지의 각종 농산물을 납품하고 있다.
초등학교 급식 납품과 군납은 안정적인 판로 확보를 통한 소득 증대뿐만 아니라 지역에 위치한 기업체 등 새로운 유통시장 개척을 위한 교두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국영석 조합장은 “친환경 농업을 통해 고산 5개 면의 소득원 창출로 농업 경쟁력을 높이고 완주군이 국제적인 친환경 농업의 메카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감 클러스터 산업으로 새로운 소득원 확보
고산농협은 친환경 농업 외에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공동 브랜드인 ‘고산향’을 비롯해 12개의 브랜드를 개발했고, 지역 특산물인 곶감의 제조공정을 표준화하는 기술도 개발했다. 완주의 동상 고종시 곶감은 씨가 없고, 당도가 높은 청정 무공해 곶감으로 유명하다.
고산농협은 완주 지역의 감을 클러스터 산업으로 특화해 지역 특성을 살린 적극적인 산지 마케팅으로 시장 경쟁력을 확보하고, 이를 지역의 새로운 산업으로 발전시켜 농가소득을 높이고 있다.
고산농협은 곶감, 감식초, 감잎차 등의 생산방식을 개선해 감 관련 상품을 고급화했으며, 새로운 가공기술을 개발해 감초콜릿이나 홍시 아이스크림도 생산하고 있다. 또 감길 등 등산로를 통한 체험관광도 산업화하는 등 다양한 수익원을 개발했다.
박일진 유기축산 농장 운영
“FTA 파고 친환경 농업으로 넘고 있죠”

“유기축산으로 키운 소는 일반 소보다 1.5배 이상 비싸게 팔립니다. 친환경 유기농업으로 재배한 사료를 먹이고, 사육 전 과정에서 항생제나 성장호르몬제 등을 사용하지 않아요.”
친환경 유기축산으로 45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는 박일진씨(42)는 “지금은 여유 있게 소를 키우고 있지만 그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다 실패한 경험이 있다. 1999년부터 몇몇 농가와 작목반을 만들어 공동으로 20ha 논에서 유기농 벼를 생산했다. 하지만 판로가 없어 벼농사를 포기했다.
“생산량이 늘어났지만 팔 데가 없었어요. 작목반에서 따로 유통조직을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죠. 이웃농가에 농사를 맡기고 직접 도시로 팔러 나갔지만 가격이 비싸다 보니 눈길을 주는 사람은 있어도 구입하는 사람은 드물었어요. 그때 고산농협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아예 망했을 겁니다.” 고산농협은 당시 이들이 생산한 벼를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모두 수매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2002년부터 유기 축산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다. 항생제가 첨가된 사료를 주지 않고 밀기울이나 쌀겨만으로 키우기 때문에 소가 살이 찌지 않는 것이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아예 사료 회사에 원료를 제공해주고 무항생제 사료를 공급받았다.
“그래도 살이 찌지 않더군요. 국산 곡물의 부산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할 수 없이 수입산 곡물을 먹이기 시작했어요. 수입산이긴 하지만 친환경으로 재배되고, 유전자 조작이 안 된 곡물만을 먹이고 있습니다.”
박씨는 친환경 농업 덕분에 고산면에 활기가 넘친다며 FTA 등으로 실의에 빠졌던 농민들이 친환경 농업을 통해 희망을 가졌다고 말했다. 살길이 막막하다던 농민들이 이젠 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친환경 농업이 농업 변화의 핵심이긴 하지만 농민의 힘만으론 불가능했을 겁니다. 고산농협이 지자체와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며 친환경 농업구조를 체계화, 규모화하면서 농민들도 경쟁력을 갖추게 된 거죠.”
국영석 고산농업 협동조합장
“친환경 농업을 돈벌이로 생각하면 버티지 못합니다”

“친환경 농법은 농민을 위한 게 아닙니다. 소비자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먹을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것이죠. 환경 보호는 저절로 뒤따라오는 부산물입니다.”
국영석 고산농협 조합장은 “생명 산업을 일군다는 신념으로 농사를 짓는 친환경 농업은 인간 공동체 운동”이라며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농민과 소비자 등이 상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는 먹고 살기 위해서, 1980년대에는 농민 권익 운동이 농촌운동이었어요.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환경 운동이 농촌운동이 된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다고 친환경 농업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고산면은 청정지역으로 20여 년 전부터 몇몇 농가가 소규모로 친환경 농업을 해오던 곳입니다. 그러던 곳을 2006년부터 확산시키기 시작했어요. 엄청 고생했지요.”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졌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관행 농법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친환경 농법에 대한 기술이나 경험도 부족했다. 생산량은 줄어들었고, 그나마 수확한 농산물은 상품성이 떨어졌다. 농가 소득도 형편이 없었다.
“첫 1~2년 정도는 꼭 이렇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가 하고 후회하는 농민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몇 푼 벌지도 못하는데 그것마저도 줄어들었으니까, 당연한 것이기도 했죠. 그런 농민들을 붙잡고 설득했어요. 조그만 더 참고 해보자고.”
친환경 농업을 하는 농가는 초기 100여 개에서 지금은 5개 면 570농가로 늘었다. 친환경 농업이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면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판로 문제였다. 친환경 농산물에 대한 유통구조가 체계화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환경 농산물이 도시의 소비자에게 전달되면 가격이 일반 농산물보다 2배 이상 비싸지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농산물이라도 그렇게 비싼 가격이면 소비자들이 외면하죠. 규모화를 통한 유통구조를 확립하기 위해 농협이 나서게 된 겁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친환경 농산물은 고산농협이 전부 수매한다. 국 조합장은 단순히 유통에 그치지 않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국 조합장은 “3년이 지나면서 슬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며 “그제야 농민들도 관행농법보다 친환경 농법이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친환경 농업을 돈벌이로 생각하고 시작했으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졌을 겁니다. 친환경 농업에 대한 경쟁력과 가치를 이해했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