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춘천 가는 국도를 따라 2시간30여 분 만에 다다른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창촌 1리. 농업인 수 1800여 명, 경지면적 1만2000여㏊. 산골 마을의 초미니 조합인 서원농협이 가지고 있는 사업 기반의 전부다. 하지만 이 농협의 지난해 경제 사업 규모는 251억원을 넘어서며 경제 사업에 관한 한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농산물 직거래 사업 대대적 전개

‘합병 대상 1호’서 우수 농협 변신

조합원 1100여 명의 초미니 조합인 서원농협은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합병 대상 1호 농협’이란 불명예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1998년 당시 서원농협은 부실채권 60억원과 10억원의 된장제품 재고를 떠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 사업에 관한 한 최고의 농촌형 농협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규삼 조합장은 “한 달에 3~4군데의 타 지역 농협 직원들이 방문해 이곳의 성공사례를 배워간다”고 말했다.

서원농협이 전국 최고의 우수 농협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요인은 경제 사업 활성화. 경제 사업이 뒷받침돼 농민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의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합장은 “신용 사업만으로는 농협의 명맥을 유지하기 어렵고 경제 사업을 활성화하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998년 48억원에 불과했던 서원농협의 판매·가공 사업 매출은 지난해에 251억원으로 늘어났다. 5배 이상 급성장한 것이다. 지난해 총매출이익의 70%가 경제 사업에서 나왔다. 일반적인 지역 농협의 경우 경제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5% 정도다. 서원농협의 경제 사업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수치다. 서원농협은 올해 경제 사업에서 하루 1억원 이상을 벌어들여 365억원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러한 경제 사업 덕분에 1998년 3억원 적자에서 2000년 흑자로 전환됐고, 지난해에는 3억5000만원 흑자를 이루는 등 내실을 탄탄히 다졌다. 신용 사업 부문에서도 전년 대비 35억원의 신규 자금을 조합원들에게 지원하며 자산건전성 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연체비율 1.82%, 무수익 자산비율 0.99%로 클린뱅크의 위상을 확립했다.

직거래 장터로 경제 사업 기반 마련

서원농협의 경제 사업은 직거래 장터를 통해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다. 서원농협은 1998년 5월부터 ‘돈 되는 것은 모두 판다’라는 슬로건 아래 농산물 직거래 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처음엔 서울 남부농협 앞에서 직거래 장터를 열고 된장과 참깨, 한우고기 등을 판매했다.

이규삼 조합장은 “조그만 면단위에서 생산과 소비가 아무리 잘 돼도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대도시 소비자를 직접 찾아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직거래 장터를 열었다”고 말했다.

직거래 장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한우고기. 초기에는 1주일에 한우 반 마리 정도를 팔았지만 지금은 12마리가 장터에서 팔릴 정도다. 장터가 열리기 2시간 전부터 손님들이 몰리기 시작해 대기표를 받고 기다린다고 한다. 직거래 장터가 이제 정착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은 장터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단골손님까지 있지만 초기엔 쉽지 않았다. 직거래 장터 인근 정육점들이 허가 없이 한우고기를 판다고 고발해 직원들이 붙잡혀가기도 했고, 구청에서 노점상 단속을 이유로 장터 운영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직거래 장터가 지저분하다며 불만을 터트리는 시민도 있어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조합은 농협중앙회와 함께 서울시, 농림부, 구청 등을 뛰어다니며 문제를 풀었고, 직원들은 새벽 5시부터 조합원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수집해 차에 싣고 장터로 가 하루 종일 팔아야 하는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주호 전무는 “처음에는 직원들의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소비자들이 한우고기를 사기 위해 줄을 설 정도로 장터가 호응을 얻자 직원들도 보람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도시 소비자 입맛에 맞춰 인기 끌어

서원농협의 직거래 장터 성공 요인은 철저하게 농촌 고유의 정서와 문화를 되살려 장터를 꾸민 것이다. 또 농업인 위주로 상거래단을 구성하고, 농산물을 전문화해 실익 위주의 직거래를 정착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농협은 뒷바라지만 하고 있다.

서원농협은 모든 농산물을 스테인리스 통에 담아 직거래 현장에서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저울에 달아 파는 방식을 택했다. 취나물 등 삶은 나물류는 정갈하게 담아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계절채소는 짚으로 단을 묶었다. 달걀은 조합원이 생산한 유정란만을 엄선, 10개씩 짚으로 포장해 농촌의 옛 정서를 전달했다.

한우는 위탁 축산농가에서 기른 한우만을 도축, 서울 직판 현장에서 지방과 뼈를 발라내고 근으로 달아 파는 방식을 채택, 옛 맛을 살려 소비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또 직거래 장터가 열릴 때면 언제나 총떡, 감자부침개, 떡국 등 전통 먹을거리를 파는 장터를 함께 열어 옛날 시골 5일 장터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도시 직거래가 활성화되자 서울의 고정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직거래 장터마다 농산물을 가지고 올라오는 농업인을 선정, 전문화했다. 모자라는 농산물은 인근 지역에서 계약 재배를 통해 확보했다. 직거래 장터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의 가격이 시중보다 30% 정도 저렴한 것도 소비자들의 발길을 잡았다.

서원농협의 직거래 장터는 값싸고 품질도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월요일 서울 대치동을 시작으로 금요일까지 서울시내 19곳에서 장터가 열리고 있다. 지난해 직거래 장터에서 벌어들인 돈은 80억원이 넘는다. 1998년 1주일 매출액이 50만원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1억6000만원을 넘어 선 것이다.

성공적인 직거래 사업은 가공 사업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서원농협은 된장·간장·콩가루·참기름·선식제품 등 70여 종을 만드는 전통장류 가공공장과 얼갈이·참나물·깻잎 등 10여 종류의 나물을 삶아 파는 원주 가공공장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가공공장에서 올리는 연간 매출액은 95억원. 이 중 선식·기름·장류 등을 포함한 가공제품이 65억원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삶은 나물류가 30억원 규모다. 가장 인기 있는 가공제품은 선식. 한 해 30억원어치가 팔린다.

손호봉 가공공장 생산·개발팀장은 “최근 선식 제품들이 미국, 일본 등지로 수출되면서 매출 증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원농협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전통장류 가공공장에 들어서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이 공장에서는 1일 1000병 정도의 참기름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연간 생산량이 대형 식품회사의 1일 생산량일 정도로 소규모다. 하지만 가격은 5배 이상 비싸다. 모두 국내산 원료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안병수 공장장은 “참깨나 들깨 등 원료는 모두 순수 국산이라 고소한 맛이 일품”이라고 말했다.

이들 제품 생산에 쓰이는 원료 농산물의 연 계약재배 물량은 740여 톤, 35억원어치에 달한다. 서원농협은 계약재배 물량 전부를 시중가보다 5% 이상 높은 값에 수매한다. 최저가격을 보장해 농가소득을 안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농협에 납품하는 나물류는 농약을 치지 않는 등 재배조건이 까다롭다. 그러나 수매가가 높고 판로 걱정도 없기 때문에 농민들의 호응이 좋다.

안병수 공장장은 “순수 국산 원료를 사용하는 데다 수작업이 많아 흑자 경영이 쉽지 않다”면서도 “2, 3차 가공을 하지 않으면 농산물 수매와 제품 판매에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성공사례가 됐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IMF 외환위기 당시 전통장류 가공공장에서 생산한 된장과 간장 재고가 수백 개의 대형장독에 담긴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한때 신성장 동력이라고 생각했던 가공 사업이 애물단지가 된 것.

신제품 개발로 변신 거듭해 위기 탈출

서원농협은 1998년 말 선식 가공공장 준공을 시작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2000년에는 원주 장류공장을 인수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장류공장의 시설로 장류제품은 물론 두부와 깻잎·고구마순·도라지·고사리·산나물 등을 삶아서 포장하지 않은 상태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규삼 조합장은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수집, 포장해 서울의 농수산시장에 ‘단순 배달’해서는 농민이나 농협이나 살아 날 수 없다. 2, 3차 가공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면서 여유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신제품 개발도 안정적인 경영에 한몫을 했다. 이 조합장은 “농협식품연구소, 강원대학교 등과 연계해 신제품을 개발한다”면서 “신제품 개발 아이디어는 조합에서 주기도 하지만 연구소에서 제안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과 달리 홍보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한 가지 제품을 개발한 다음 길게는 3년 정도 지나야 판매가 궤도에 오를 수 있어요. 그동안 특정제품의 판매가 떨어지면 다른 상품이 이를 만회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1999년 선식과 참숯 상품화를 시작으로 생식(2000년), 삶은 나물(2001년), 즉석 분말된장(2002년), 발아 및 산삼 배양근 생식(2004년)에 이어 2007년에는 검은 선식·미숫가루와 양념세트 개발 등 거의 매년 새로운 농산물 가공제품을 개발, 가짓수만 10여 종에 이른다.

서원농협은 농협유통센터 등 13곳에 ‘즉석 선식’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또 농협유통 하나로클럽 양재점을 포함한 16개 매장에서 ‘즉석 삶은 나물’을 판매하고 있다. 엄선한 국산 곡물·채소류 등 33가지를 찌고 볶아 즉석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가공해주는 선식 제품과 삶아서 바로 매장에 공급하는 나물류는 소비자의 만족도가 높다. 우리 농산물만을 사용하는 데다 직접 눈으로 확인함으로써 믿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원주공장은 2006년 HACCP(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인증을 받아 학교급식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현재 3곳의 학교에 식자재를 납품하고 있다. 서원농협은 원주 지역을 비롯한 도내 및 수도권 등지의 학교를 대상으로 신규 급식처를 늘리고 있다.

안병수 공장장은 “장류와 선식 등 일반식품 외에도 기능성 고급 건강식품을 개발해 부가가치를 높이고, 원주 가공공장은 종합식자재 공장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가공공장은 우리 농산물의 소비 촉진과 농산물 판매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제품 개발에 힘써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할 것입니다.”

비료값 인상분 지원 등 수입은 전액 환원

농협의 수익은 조합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2005년엔 8.5%였던 대출 금리를 6.5%로 대폭 내렸는가 하면, 2006년에는 영농자재 무상공급 등 2억6000여만원 상당의 환원 사업도 펼쳤다. 지난해에는 경제 사업 수익금으로 농업인들의 비료 값 인상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5000여만원을 긴급 지원하는가 하면 6400만원어치의 영농자재 상품권을 지급하기도 했다. 또 조합원 자녀에 대한 장학금 전달과 농작업 상해공제료를 보조해주기도 했다.

이규삼 서원농협 조합장 인터뷰

“농민을 위한 길은 직거래장터 등 경제사업 밖에 없었죠”

“처음 직거래 장터를 열고, 현장을 돌아다니자 인근 지역 조합장들이 모두 미쳤다고 했어요. 신용 사업만 했다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겠죠. 하지만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경제 사업밖에 없었어요.”

이규삼(58) 조합장은 “지역 농협들이 가공공장 운영에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으나 농가소득과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과감히 도전했다”고 말했다. 주위에선 역발상이라고 하지만 그는 이것이 농협의 실제 모습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요즘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서울의 직거래 장터에서 직접 손님을 맞는다. 소비자들의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도시 소비자들의 구매 습관을 읽어 소비자들의 구매욕을 당길 수 있도록 상품을 구성하고 판매 방식도 차별화한다. 시골 5일 장터를 연상케 하는 서원농협의 직거래 장터도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의 책상 주위에는 각종 상패들이 줄지어 있다. 지난 3월 수상한 농산물유통개혁대상에서부터 농협 최고의 영예인 총화상(2007년), 가공 사업부문 최우수농협상(2000년) 등이 그의 발자취를 짐작케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조합 연체비율 34%, 전통장류 가공공장의 계속되는 적자운영. 1998년 초 그가 취임했을 때 직면한 현실이다.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경영난은 더욱 가중됐다. 가장 큰 위기였다.

이 조합장은 “조합이 심각한 경영난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직원 5명이 한꺼번에 사표를 냈고, 또 어떤 직원들은 다른 조합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며 “정말 앞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나간 직원들의 집을 찾아가 힘을 합쳐 조합을 다시 일으켜보자고 호소했다.

1996년만 하더라도 종합 업적 전국 2위를 달성한 ‘성장조합’이었던 서원농협에게 던져진 것은 ‘합병 대상 1호 조합’이라는 불명예였다. 그 후 감사를 수도 없이 받았고, 감사 지적으로 인해 직원들의 사기가 침체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합 설립 이래 가장 큰 위기를 맞은 서원농협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적자 사업을 흑자로 전환시키는 적극적인 경영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는 “지난 1998년 서원농협이 합병 대상 1호가 됐을 때 신용이 아닌 경제 사업으로 합병 대상 농협을 선정해달라고 읍소했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산간 농촌의 미니조합으로 경제 사업에 승부를 걸 수밖에 없었다. 애물단지 가공 사업을 효자 사업으로 바꿔놓기 위해 처음 도전한 것은 농산물 직거래 사업이었다. 이 조합장이 이때부터 내세운 슬로건이 바로 ‘돈 되는 것은 모두 판다’였다. 그는 “경제 사업 활성화를 통해 농민 조합원이 생산한 농산물을 전량 제값에 팔아 주겠다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조합장으로 취임한 지 4개월이 되던 1998년 5월부터 시작해 2000년까지 서울 곳곳을 누비며 직거래를 시도한 것은 모두 500여 회.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직거래 성공을 확신한 그는 고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13곳을 선정, 정기적인 직거래 장터를 열었다.

농촌의 옛 정서를 느낄 수 있도록 장터를 꾸며 소비자들의 발길을 잡았다. 다양한 신제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등 공격적인 경영에도 나섰다. 직거래 장터의 성공 덕분에 가공 사업도 탄탄해 질 수 있었다.

“이제는 서울에 단골손님을 두고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됐어요. 직거래가 농가의 소득을 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된 것은 당연하죠. 계약재배를 통해 농민들이 판로 걱정 없이 농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어요. 돈 장사(신용 사업)보다는 이러한 경제 사업 모델이 농민을 위한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