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 아닌 ‘목탄그림’
마치 흑백사진을 보는듯한 <20세기의 추억>(그림1)은 캔버스 위에 목탄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덕현 화가의 작품인 이 그림은 3400만원에 거래됐다고 한다. <20세기의 추억>은 조덕현의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20세기의 추억>은 우리를 민족주의 담론으로 이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미술계의 제1과제는 ‘한국적 미술’의 창조였다. 따라서 민족주의 목소리는 여타 분야와 마찬가지로 미술계에서도 가장 뜨거운 화두였다. 우리 현대미술의 민족주의 담론은 조선시대의 문인화가 ‘한국성’의 원형이었고, 한국 현대미술은 전근대의 수묵 문인화와 채색화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많은 한국화 작가들이 배출됐고, 그들에 의해 유교적인 수묵 문인화와 채색화를 답습하는 성향이 근대 초기 한국 화단을 지배했다.

그러나 미술에서의 민족주의란 이러한 구태에 연연하거나 답습하는 것만은 아니다. 바야흐로 현대라는 시대에 걸맞게 수용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조덕현의 회화는 현대적이고 독창적인 민족주의 회화를 구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형식적인 면에서 근대에 등장한 흑백사진을 재현함으로써 당대의 초기단계의 기계문명을 보여줄 뿐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사진 속 이미지를 통해 그 시대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전한다. 이는 말 그대로 한국적인 서사이며 담론을 형성하는 이 시대의 민족주의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왜냐면 그가 선택한 사진이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를 통해 ‘한국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의 회화를 통해 서양과는 다른 우리의 모습을 보며,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와 역사, 문화에 대한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 이는 단일민족 혈연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단색조 잿빛 인물화는 우리 시대의 민족적 리얼리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991년부터 시작되는 조덕현의 <한국 여성사>(그림2) 연작 작품에서도 한국 근대 여성의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경험이 드러나 있다. 이는 가족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많은 여성이 경험해야 했던 우리 근대 민족사의 한 단면이다. 우리의 현대미술이 특정한 형태와 색채를 선호하고 특정한 담론에 의해 창출된다면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의 회화의 성적인 심리학적 통찰을 우리는 페티시(fetish)라고 한다. 이는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심리적 이해관계다.

이처럼 그의 작품은 성적 재현과 기호를 통해 회화의 담론을 보여준다. 그는 선언한다. “나는 내 안에 동거(同居)하던 여러 가능성들을 이제 독립시키겠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가상(假想)의 이름(ID)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할 것이다”라고. 최근 그의 작업은 절대와 진리를 거부하고 통합적 주제를 불신하며 자기 비판적인 까닭에 언제나 ‘제로(Zero)’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용|어|설|명

페티시(fetish)  마술적이고 영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여 목걸이나 팔찌에 달고 다녔던 장식품인 참(charm)을 가리키는 말이다. 페티시즘(fetishism)은 심리학에서 생명이 없는 물건 또는 성적 부위가 아닌 인체 부위에 접촉함으로써 성적 감정을 느끼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성적 도착증의 일종이다. 다시 말해 페티시즘은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비성적인 물건을 필요로 하는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때 물건의 대상은 성적 경향이 없는 인체 부위, 의류 또는 드물게 사람과 관계없는 물건일 수 있다. 이런 증상은 거의 남성에게서 나타나며, 대부분 대상은 여체 또는 여성 의류와 관련된 것이다. 의류 중에서 가장 많은 대상이 되는 것은 신발과 내의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