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페라의 유령>에는 흔히 ‘금세기 최고의 뮤지컬’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만큼 이 작품이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하다. 1986년 미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오페라의 유령>은 2년 후 브로드웨이로 건너가, 2006년 <캣츠>를 제치고 브로드웨이 최장기 뮤지컬이란 타이틀을 획득한 후 매일매일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공연 중이다. 그동안의 수상기록이나 흥행실적을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공연 수익이 대략 50억달러(6조3000억원) 이상이고, 전 세계적으로 1억여 명이 관람한 것으로 집계된다. 세계 인구가 65억 명 정도임을 염두에 둔다면 <오페라의 유령>이 거둔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될 것이다.
원작은 르포전문기자의 소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20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추리소설가 중 한 명인 가스통 르루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가스통 르루는 젊은 시절 부모의 뜻에 따라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타고난 괴벽과 방랑 기질로 인해 몇 해 만에 그만두고는 르포를 쓰는 기자로 이름을 알렸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이러한 그의 경력을 최대한 살린 작품이다. 샹들리에가 떨어진 사건에 대한 기록을 우연히 음악보관소에서 발견하고 마치 가스통 르루 자신이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을 수사하는 것 같은 구성을 띠고 있다. 실제로 1896년 오페라 하우스에 있는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사고로 중년부인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 사건은 작품을 쓰는 데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가스통 르루의 소설은 먼저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1925년 론 채니가 출연했던 무성영화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팬텀 역을 연기한 론 채니는 울퉁불퉁한 가짜 치아를 끼고, 직접 코에 와이어를 삽입하는 등 스스로 엽기적인 분장을 했다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론 채니가 혼신을 아끼지 않았던 1925년 버전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2004년 조엘 슈마허 감독이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버전을 영화로 만들었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뮤지컬로 제일 먼저 만들어진 것은 켄 힐에 의해서였다. 켄 힐은 기존 오페라 곡을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본 웨버는 모든 곡을 새롭게 작곡하기를 원했다. 웨버의 버전 말고도 뮤지컬 <타이타닉>과 <나인>을 작곡한 모리 예스톤이 만든 <오페라의 유령>도 있다.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태어날 때부터 기괴한 형상을 하고 태어나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불행한 천재 에릭에 대한 이야기다. 에릭(팬텀)은 가면을 쓰고 음악의 천사 흉내를 내며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젊은 가수인 크리스틴을 가르친다. 비록 이야기는 비현실적이지만 작품 곳곳에는 당시의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이 반영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배경이 되고 있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흔적을 작품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실제 뮤지컬 제작에 앞서 연출을 맡았던 헤럴드 프린스는 실제로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는 지붕 위까지 올라가는 등 주요 무대가 되는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세밀히 살폈다. 이러한 노력으로 크리스틴과 라울이 사랑을 속삭일 때 이를 팬텀이 숨어서 보는 지붕 위의 천사상 장면이 만들어졌다. 뮤지컬에서 무대 양 옆에 세워진 기둥이나, 2막 첫 장면인 ‘가면무도회’ 장면에 나오는 나선형 계단 역시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그것을 그대로 재현했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크리스틴을 태운 나룻배가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양편에서 촛불들이 등장하는 지하 호수 장면은 <미스 사이공>의 헬리콥터가 무대로 내려오는 장면과 함께 뮤지컬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씬으로 꼽힌다. 이것 역시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구조에서 기인한다. 1861년 공모전을 통해 선발된 샤를르 가르니에가 건축하기 시작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는 14년 만에 완공된 대표적인 낭만주의 건축물이다. 이것이 만들어지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가르니에는 지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지하에 물이 흐르는 것을 발견했지만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를 막아 방수를 한 후,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지하에 호수를 가진 공연장이 탄생한 것이다.
팬텀이 공연장 지하에 숨어 산 까닭은?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호수는 팬텀의 은신처로 크리스틴을 납치해 오는 장소다. 이곳으로 숨어든 것은 작품 속 팬텀만이 아니다.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는 결국 왕좌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추방당한다. 제정이 무너지자 프랑스 시민들과 농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고 두 달간 노동자들이 이끄는 혁명적 자치정부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파리코뮌이다. 당시 건축 중이던 오페라 하우스는 화약 창고와 군사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소설 속에서는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에서 당시 죽어간 정부군과 시민군들의 해골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는 흉측한 얼굴의 한 남자가 숨어들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것이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세기 말 파리에서 유행하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을 고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대 양식도 마찬가지다. 극중 팬텀의 장난으로 오페라 가수가 개구리 소리를 내고 뛰쳐나가자,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앙드레가 등장해 “이 오페라의 3막에 나오는 발레를 미리 감상하겠다”고 한다. 훤칠한 발레리나들의 춤은 방금 전 무대 위 혼란을 잠시 잊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실제 19세기 말 오페라 3막 중간에 있었던 발레 장면은 굉장히 인기가 있었다. 오페라는 관람하지 않고 이 발레 장면만을 보기 위해 오는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한번은 발레 장면의 시간을 옮겨 공연하였는데, 뒤늦게 나타난 젊은 남자들이 거칠게 항의했고 이로 인해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발레리나의 연습장면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들 역시 파리 오페라 하우스 연습실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이 그동안 쌓아온 기록을 넘어설 작품이 당분간 등장하기는 힘들 것이다. 초연 이후 2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작품이 흥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음악, 슬프고도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 그리고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무대 메커니즘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장면 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시대적인 고증을 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던 노력 때문이다. 종종 승부는 아주 작은 디테일의 차이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