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기를 품었죠…
죽겠다 싶을 정도로 일했는데 그래도 죽지 않더라고요”
강연 초청했던 모 외국계 은행, 다음날 자금회수 “그럴 줄 몰랐어요”

“시형이 형~” 지난 10월19일 청바지 차림의 박병엽 부회장이 기자를 친근하게 부르며 서울 상암동 팬택 본사 19층 자신의 사무실 옆 접견실로 들어왔다. 박 부회장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항상 ‘○○형’이라고 말하고 포옹까지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마치 여러 번 만났던 사이처럼 만들어내는 친화력이 뛰어나다.
접견실로 들어서자마자 여지없이 기자를 포옹한 박 부회장의 얼굴은 핼쑥해 보였다. 이날 아침 박 부회장이 병원에 들러 링거주사를 맞고 왔다고 양율모 홍보실 부장이 귀띔했다. 박 부회장의 건강상태부터 물었다.
“어제(일요일) 모처럼 쉬었더니 병이 났어요. 일 안하고 쉬면 아프다더니 지금 딱 그 꼴입니다.”
미친 듯이 일만 해온 박 부회장은 3년 만에 처음으로 일요일(10월18일), 개인 시간을 가졌다. 3개월 전 군대 간 아들을 면회 가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들도 자신의 재기 선언을 대서특필한 언론들을 접한 듯 “그새 주름이 많이 늘었다”는 함축적인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한다.
팬택•팬택앤큐리텔 합병 통한 재도약 발판 마련
‘2013년 2500만 대 판매,
5조원 이상 매출 달성’ 비전 밝혀
10월15일. 이날은 박 부회장과 함께 미친 듯이 일해 온 팬택 직원들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채권자들의 출자전환을 통해 팬택계열 통합의 기반을 마련, 재도약의 시동을 건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 재무 담당자의 팬택계열 3분기 실적 브리핑이 있은 후 상기된 얼굴로 기자간담회장에 들어선 박 부회장은 “양사(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의 합병은 단순한 통합이 아니라 팬택이 글로벌 기업을 능가하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며 “안정된 재무 상태와 그 동안 획득한 마케팅 노하우, 최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2013년 2500만 대 판매, 5조원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겠다”고 비전을 밝혔다.
팬택계열은 이날 금융감독원에 양사 합병을 위한 합병 신고서를 제출했다. 11월27일 임시주주총회 결의를 거치면 12월30일 다시 성공의 신화를 쓸 합병법인 ‘팬택’이 출범된다. 이번 합병은 팬택의 채무 2000여억원을 자본금으로 추가 출자전환시켜 가능해진 것이다. 기업개선작업중인 기업이 흑자로 전환해 채권단을 설득, 추가적인 출자전환으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팬택이 처음이다.
팬택계열은 2007년 4월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이후 그해 3분기부터 9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하며 ‘우량 회사’로 거듭났다. 올 들어서는 3분기 5557억원의 매출액과 418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올 연간 매출액은 2조2000억원, 영업이익은 2100억원으로 예상하고 있다.

휴대전화 판매량도 2007년 750만 대, 2008년 970만 대 등으로 증가 추세다. 올해에는 1000만 대를 돌파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스카이 브랜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올해 10년째를 맞은 스카이 브랜드의 누적 판매 대수는 1530만 대. 이중 최근 3년 동안 판매된 수량이 740만 대로 48%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스카이 브랜드 인수가 팬택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에 대해 박 부회장은 “스카이 브랜드는 과거 특정 마니아 계층만 사용한다는 인식을 깨고, 대중적으로 많이 팔리면서도 프레스티지한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고 반박했다.
팬택계열은 합병을 통해 양사의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 향후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팬택은 이번 합병으로 전 부문에 걸쳐 30% 이상의 효율성 향상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존 시장에서는 깊이를 더하고, 유럽과 아시아 시장을 적극 공략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경쟁을 위해 보유하고 있는 재래식 무기(일반 휴대전화)와 최첨단 신무기(스마트폰)를 적절히 사용해 시장을 공략할 겁니다.”
성공신화에 이은 위기
직원 6명으로 출발, 한때 매출 3조로 키워
박 부회장은 1991년 무선호출기(일명 삐삐) 사업에 뛰어들어 1996년까지 연간 50%가 넘는 지속적 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박 부회장은 ‘삐삐’ 시장이 오래 가지 못하리란 걸 직감했다. 1997년 사업 방향을 재빨리 휴대전화 쪽으로 선회했다.
1998년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 휴대전화 시장에서 고전하던 미국의 모토롤라가 박 부회장에게 지분을 팔 것을 제안한 것이다. 박 부회장으로서는 엄청난 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는 거꾸로 투자를 요구했다. 1998년 박 부회장은 오히려 모토롤라로부터 1500만달러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여기서 힘입은 팬택은 2000년에 매출액 2871억원을 달성했다.
2001년 박 부회장은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 휴대전화 사업부가 분사해 설립된 현대큐리텔을 인수했다. 현대큐리텔은 당시 10년 연속 적자에 2001년 한 해에만 순손실 1427억원을 기록한 골칫덩어리였다. 하지만 박 부회장은 현대큐리텔의 기본기가 탄탄한 만큼 잠재력도 크다고 봤다. 이렇게 해서 팬택과 함께 팬택계열의 양대 산맥인 팬택앤큐리텔이 탄생했다.
박 부회장은 2005년 스카이 브랜드의 SK텔레텍을 인수하면서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물론 노키아와 모토롤라와도 어깨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회사의 덩치를 키웠다. 1991년 종자돈 4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를 14년 만에 연매출 3조원, 세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7위의 대기업으로 일궈낸 것이다.
하지만 영광은 잠시였다. 2006년 유동성 위기에 몰리며 존폐의 기로에 섰다. 당시 모토롤라의 레이저폰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상대적으로 팬택 제품은 판매 부진의 늪에 빠졌다. 2004년 출시된 모토롤라의 레이저(RAZR)폰은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대 이상이 팔리며 휴대전화업계에 쓰나미를 일으켰다. 레이저폰과 비슷한 가격대와 성능의 팬택 휴대전화는 거의 팔리지 않을 정도였다. 재고는 쌓여갔고, 그러다보니 가격은 계속 떨어졌다. 2006년 팬택의 적자는 3391억원에 달했다.
“당시 위기 징조가 보였지만 전략을 재빨리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타이밍을 놓친 것이죠. 그때 4명의 CEO들이 (위기대응에 대한) 절박함이나 집요함이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고 봅니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모두 제 책임이죠.”
팬택의 유동성 위기 도미노는 가장 믿었던 곳에서 비롯됐다. 주거래 금융기관이나 다름없던 모 외국계 은행이 느닷없이 자금회수에 나서면서 채권금융기관들의 자금회수가 줄줄이 이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잘 나갈 때 (그 은행이) 우리 덕을 많이 봤어요. 자금회수가 있기 며칠 전엔 서울 모 호텔에서 월드포럼을 개최하면서 우리나라 기업 대표로 나를 연사로 초청까지 했습니다. 그랬던 은행이… 설마 그럴 줄 몰랐어요.”
일시적인 위기라는 그의 설득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6개월이면 해결된다.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무시당했다”고 말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빼앗긴 꼴이었다.
박 부회장은 이 대목에서 흥분했다. 하지만 박 부회장은 ‘여태 참아왔는데 이제 와서 화를 내본들 어찌할 것인가’ 하는 침착성을 유지하려는 마음과, ‘지금껏 참을 만큼 참아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를 억누를 수가 없다’는 불같은 마음이 그의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음이 그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났다. “언젠가는 그 금융기관의 실명을 꼭 밝히고야 말겠다”는 대목에선 그의 ‘불같은 마음’이 일시적이나마 이긴 듯 해보였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외국계 금융기관의 자금회수 이후 불안감을 느낀 국내 금융기관들이 채권을 회수하겠다며 달려들었다. 분위기가 대번에 싸늘해졌다. 채권단은 2006년 한 해 동안 2000억원 규모의 신용 한도를 축소했고, 또 2000억원의 채권을 회수했다. 팬택은 4000억원의 추가 자금 부담을 안아야 했다. 당시 팬택의 부채비율은 200%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채권단이 돈을 회수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팬택은 2006년 11월15일 기업개선작업을 신청했다. 하지만 채권단의 100% 동의를 얻어야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박 부회장은 백의종군을 결심하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팬택 지분 모두를 내놓았다. 시가로 4500억원 상당이었다. 박 부회장은 채권금융기관에 진정성을 보일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죽어 기업을 살리기로 한 것이다. 채권단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설득에 나섰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던 채권단이 그의 회생의지를 알아주기 시작했다. 팬택계열은 결국 2007년 4월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그 땐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서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자살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러한 그의 처절한 반성은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단련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일하는 방식을 뜯어 고치고, 인적 구조조정에 나섰다. 임원들을 먼저 내보냈다. 당시 70여 명에 이르던 임원은 지금 20여 명에 불과할 정도다. 과거 경영기획실을 폐지하고, 핵심 경영 인력들을 각 부문의 스태프로 배속시켜 현장경영을 강화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 한편으론 소통과 공유가 이뤄졌다. 그리곤 죽을 정도로 일했다. 토·일요일도 반납했다.
사실 그에게 남은 것은 독기뿐이었다. 팬택이 회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오기로라도 버텨내야 했고, 그래서 죽기로 일만 했다. 박 부회장의 말대로 팬택은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6개월 후부터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박 부회장은 “죽겠다 싶을 정도로 일했는데, 그래도 죽지는 않더라”며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쉬면서 어떻게 경쟁자들을 이기겠냐며 독기를 품었다”고 말했다.
“1년 정도 지나자 이제는 (팬택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전까지는 오로지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기나긴 출자전환 과정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설득해 출자전환 이끌어 내
지난 3년간 박 부회장의 회생의지와 열정은 채권자들의 출자전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기나긴 줄다리기였다. 그 동안 팬택은 제1금융권을 비롯해 새마을금고, 신협 등 제2금융권에 추가 출자전환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집요하고 끈질기게 설득해왔다. 지난 4월부터 시작된 국내 채권자들의 출자전환 동의는 9월 말경 완료됐다. 2000여억원에 이르는 채권이 자본금으로 전환된 것이다.
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은 팬택계열의 기술적 우월성과 기업개선작업 이후 보여준 놀라운 회복 속도, 전 임직원의 하나 된 회생의지를 높게 평가했다. 제2금융권 중 극소수가 끝까지 박 회장의 애를 태웠지만 결국 채권단은 기업개선작업 사상 유례가 없는 2차 출자전환에 동의했다.
“출자전환에 반대하는 채권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집요하게 설득했어요. 아마 나하고 우리 재무팀 얼굴 보기가 징그러웠을 겁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찾아갔고, 두 번에 안 되면 세 번 찾아갔으니까. (출자전환이) 될 때까지 말이죠. 그길밖에 없었으니까요.”
팬택계열은 지난 8월 휴대전화 핵심 칩 개발 기업인 미국의 퀄컴에 지급해야 할 로열티 7600만달러를 자본금으로 전환시키기로 합의했다. 9월에는 미국 특허괴물 인터디지털(IDC)에 지급해야 할 로열티 378억원을 출자전환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들 글로벌 기업의 로열티에 대한 출자전환 역시 박 부회장의 집요한 설득과 협상 끝에 얻은 뚝심의 승리였다.
퀄컴과의 출자전환 협상이 시작된 것은 2007년 5월. 실무진간에 어느 정도 얘기 오간 후 최고경영자가 결판을 지어야 했다. 2008년 12월 어느 날. 퀄컴과 출자전환 담판을 짓기 위한 무박 3일의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오전 9시쯤 뉴욕에 도착한 박 부회장은 한인 목욕탕에서 목욕과 면도를 끝마치고 퀄컴이 있는 샌디에고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며 박 부회장은 왠지 좋은 예감을 느꼈다.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을 찾은 박 부회장은 “칩 값 줄 돈이 없다. 팬택이 살아남지 못하면 퀄컴에도 이로울 게 없다. 출자로 전환해 달라”고 떼 아닌 떼를 썼다. 그는 테이블 위에 팬택의 제품들을 펼쳐 놓고, 이 제품들 덕분에 삼성과 LG가 떴다며 나와 이 제품을 믿어 달라고도 설득했다. 3시간에 걸친 담판 끝에 그는 제이콥스 회장으로부터 “OK”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솔직함과 엄포를 적절히 조화시킨 그의 협상 방식이 통했던 것이다.

“쭉 듣고 있다가 이때다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쏟아 부었어요. 그리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비전(팬택의 생존)을 공유한 다음 진득하니 이해를 구했지요.”
제이콥스 회장의 ‘OK’ 사인이 있었지만 이를 처리하는 양측의 실무 처리 과정은 지루하게 진행됐다. 박 부회장은 이후 두 번이나 더 퀄컴을 방문했다. 그가 방문할 때마다 출자전환을 담당한 퀄컴 쪽 변호사가 긴장했다고 한다. 로열티의 출자전환을 설득시킨 그가 또 다시 제이콥스 회장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대화 기술을 또 다시 발휘했다. 제이콥스 회장을 만날 때마다 퀄컴 쪽 변호사들 칭찬만 늘어놓은 것이다.
2년 반에 걸친 줄다리기 끝에 결국 지난 8월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은 각각 1697만달러와 3042만달러 규모의 증자 지분을 액면가인 주당 500원에 퀄컴에 넘기기로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으로 퀄컴은 팬택 지분 12.55%, 팬택앤큐리텔 지분 12.17%를 확보해 각 회사의 2대 주주가 됐다. 박 부회장은 “기술기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제이콥스 회장이 합리적 경영자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미친 경영인’ 박병엽의 소통 경영
직원들과 경영 상황 공유…‘다독이고 챙기고’
팬택계열 임직원들은 기업개선작업 이전과 현재의 차이점으로 단연 ‘공유’를 꼽는다. 맨주먹에서 시작해 조 단위의 제조기술 기업을 일군 박 부회장의 경영철학의 핵심이 바로 격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공유다. 이는 지난 3년간 팬택을 변화시킨 원동력이기도 하다.
박 부회장은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직후부터 과장급 이상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분기마다 경영설명회를 개최했다. 직접 마이크를 잡고 회사의 상황을 3개월에 한 차례씩 구성원들에게 설명했다.
“지난해 6월부터는 사원, 대리급 중심의 1100여 명의 직원에 대해 반기 단위로 간담회를 진행했어요. 직원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목표와 회사의 목표를 일치시키기 위해서였죠.”
박 부회장의 ‘공유’는 공식적인 자리와 비공식적인 자리, 밤과 낮,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뤄졌다. 이미 습관으로, 일하는 방식으로 굳어진 이메일 경영이 대표적이다. 하루에도 수백 통씩 보내는 최고경영자의 메일은 직급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날아간다. 박 부회장은 하루 100통 이상씩 보고되는 이메일에 매번 답장을 보내고, 회신하는 내용에 또 답장을 보낸다.
“관련 부문 간에 토의가 됐나요?”라는 박 부회장의 일상적인 질문을 통해 상품기획에서부터 연구개발, 구매, 생산, 품질, 마케팅, 영업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업무 부문의 협의와 협업이 시스템으로 정착됐다. 팬택의 그룹웨어인 ‘피웨어(Pware)’에서는 최고경영자가 주도하는 사이버 토론이 매일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팬택빌딩 앞의 허름한 생맥주집은 직원들에게 ‘공짜 술’을 먹을 수 있는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업무로 지친 마음을 달래려 생맥주잔을 기울이는 직원들에게 박 부회장의 지갑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
“매번 생맥주집에 가니까 이젠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습디다. 생맥주 값에다 운이 좋으면 집에 가는 택시비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으니까요.”
토요일 오후 4시면 박 부회장은 팬택빌딩 20층에서 실험실이 위치한 4층까지를 내리 훑으며 사무실을 순례한다. 그는 퇴근하지 않고 일하고 있는 직원들에게 “왜 아직 안 들어갔어?”라며 애정 어린 핀잔을 준다. 최고경영자 스스로가 토·일요일 가장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는 모습은 직원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일요일 점심엔 출근한 전체 직원들을 구내식당에 모아서 함께 볶음밥을 시켜 먹는다.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이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생맥주를 마시다가, 밥을 먹다가 그런 것이 공유가 되지요. 회의를 한다고 공유가 되겠습니까.”
팬택의 주요한 모든 회의는 발언자의 호흡까지 기록할 정도로 상세하다. 이 회의록은 최고경영자를 포함해 관련된 모든 부서의 책임자 혹은 관련 직원들에게 배포된다. 모두 읽기에도 버거울 정도로 회의록이 쏟아진다. 그렇다고 회의록을 읽지 않으면 흐름을 따라가기 어렵다. 따라서 팬택에서의 ‘읽기’는 생존을 위해 감수해야 할 고통이다. 박 부회장도 미처 읽지 못한 회의록은 토·일요일에 모두 읽는다.
‘공유’는 부서단위, 직급 단위별로도 활발하게 정례화 돼 있다. 박 부회장은 지난 2년 반 동안 반기에 한 번씩 40~50명 단위로 간담회를 개최해 왔다. 반기마다 박 부회장과 직접 대면하는 사람은 대략 1000명 선. 박 부회장 개인으로서는 똑같은 얘기를 20번 이상, 2시간 이상씩 반복해야 하는 셈이다. 간담회 자리에서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쏟아져 나온다.
“회사의 경영 상황 같은 거창한 얘기에서부터 구내식당 메뉴에 대한 불만까지 거론됩니다. 아무리 사소해도 경영지원팀을 비롯한 해당 부서가 이행 현황을 회사 그룹웨어를 통해 알리도록 했어요. 말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철저히 점검합니다.”
박 부회장은 이 같은 ‘공유’를 위해 자신의 월급의 상당 부분을 써야 했다. 회사 앞 생맥주집에서 우연히 마주친 직원이 기업개선작업 이후 중단된 야구동호회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자, 박 부회장은 그 자리에서 지갑을 꺼내 격려금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튿날 회사의 전 동호회를 소집해 사비로 같은 액수의 격려금을 전달했다. 중앙연구소 연구원의 배우자가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소식이 게시판에 올라오자, 박 부회장이 먼저 격려금을 내놨다. 이것이 자발적인 모금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공유와 열정의 산물 ‘혁신’
토•일요일 반납…열정이 팬택DNA
팬택을 변화시킨 또 다른 키워드는 열정이다. 최고경영자에서 말단직원에 이르기까지 열정은 글로벌 거대 경쟁사들을 압도하는 팬택의 핵심 DNA다.
팬택계열의 월요일 아침은 동트는 새벽 6시30분에 시작된다. 매주 월요일 경영점검회의와 EM(Executive Meeting), 판매전략회의 등 주요회의는 오전 6시30분에 시작된다. 박 부회장은 회의 시작 30분 전에 계열의 중역들과 사전 미팅을 갖기 때문에 새벽 5시40분 전후에 출근한다.
“남들과 똑같이 일하고, 남들 쉴 때 똑같이 쉬고 어떻게 경쟁자를 이길 것인가”라는 말은 직원들이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박 부회장은 “지난 3년간 죽을 듯이 일했지만 죽지는 않더라”고 소회를 밝혔다.
신입사원이 입사해 환영회를 갖는 자리에서 박 부회장이 던지는 일성(一聲)은 “사표 쓰는 법부터 배우고,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녀라”는 말이다. 일이 힘들고 무서워 떠나겠다는 직원은 잡지 않고, 단 한 명이라도 죽을 각오로 일하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는 것이 박 부회장의 소신이다.
팬택은 지난 3년간 토·일요일을 포함해 공휴일에도 출근하는 ‘이상한’ 회사로 입소문이 나 있다. 토요일 평균 출근 인원은 적게는 300명에서 많게는 1600명. 전체 상암사옥 근무자의 60% 이상이다. 실패 사례를 공유하기 위한 세미나, 주요 보직자간의 정례 미팅도 대부분 토요일에 잡혀 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에도 박 부회장은 추석 당일인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빼고 모두 출근했다. 그나마 이틀을 쉰 것은 혹여 자신이 명절에 나오면 임직원들도 출근할까 하는 배려 때문이었다.
팬택의 새해는 지난 3년간 12월1일이었다. 전통적인 휴대전화 비수기인 1분기 실적이 한 해 농사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12월부터 긴장의 고삐를 단단히 죄지 않으면 경쟁사에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월1일자로 주요 임원의 인사를 단행하고, 모임이 많은 연말연시에 금주령이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팬택계열은 최근 ‘팬택 마사이상’과 ‘팬택 펭귄상’을 신설했다. ‘마사이상’은 결과에 관계없이 집념과 열정을 발휘한 구성원을 선발해 격려하는 상이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에 마사이족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펭귄상’은 천적에게 잡혀 먹힐 가능성이 제일 많으면서도 용기 있게 가장 먼저 물로 뛰어드는 ‘First Penguin’에서 따온 것이다.
공유와 열정의 산물 ‘혁신’
제품 개발 급급하기보다 품질 확보 주력
맨주먹에서 시작해 조 단위의 제조기술 기업으로 성장한 팬택에는 그만의 ‘열정’이라는 DNA가 잠재하고 있다. 팬택은 ‘공유’를 도구로 구성원들 개개인에게 잠재돼 있던 열정을 다시 불러냈다. 그것은 각 부문에서 빛나는 혁신을 가져왔다.
기업개선작업 이전에 연구소가 개발 일정을 정확히 맞추는 경우는 드물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늘 연구소에 부여되는 과제는 ‘타임 투 마켓(Time to market)’이었고, 개발 일정 준수는 연구소가 꼭 지켜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이후 연구소에게 개발 일정 준수는 더 이상 핵심이 아니었다. 개발 일정을 앞당기는 것이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연구소의 새로운 미션을 품질을 높이는 것으로 바꿨어요. 개발 일정에 맞추기 급급하다 보면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죠. 품질이 좋아지니까 실패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죠.”
또 품질관리의 주체는 품질본부라는 상식에서 벗어난 역발상으로 연구소가 품질에 대한 책임을 지게 했다. 개발자들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나, 설계할 때부터 품질에 대해 의식하고, 품질에 대해 고민하도록 시스템화했다. 특히 A/S(After Service)를 책임지는 고객서비스(CS: Customer Service)본부를 품질본부와 함께 품질부문으로 엮었다. 고객 접점에서 나오는 불만사항을 연구·개발부서에 피드백하고 품질 확보에 나선 것이다. 이를 통해 사후 관리 비용의 절감과 함께 품질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불량률을 낮추는 것은 기본이고, CS본부를 통해 개발 과정에서 품질을 확보하도록 했지요.”
연구소는 개발 품질 향상을 위한 세미나를 매월 2회씩 개최해 왔다. 개발팀장급인 시니어급 연구원이 강사로 나서 신기술 트렌드와 핵심 기술에 대한 개발 노하우 그리고 성공, 실패한 모델에 대한 사례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특히 실패한 모델에 대한 개발지식 공유는 동일한 사례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는 연구개발 품질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각 부문에서 정기적으로 만들어지는 각종 ‘트렌드 리포트’는 최고경영자에서부터 말단직원까지 배포된다. 비정기적이고 폐쇄적이었던 것을 정기적이고 모든 구성원이 볼 수 있는 프로세스로 바꾼 것이다. 이 리포트는 회사의 경쟁력을 한 단계 끌어 올리는 정보의 ‘오아시스’로 자리매김했다.
경영진은 회사의 전략 방향을 유효적절하게 수정하면서 시장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기업개선작업 초기, 한정된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쓰기 위한 전략은 올해부터 효율, 효용,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수정됐다.
출자전환을 통해 팬택과 팬택앤큐리텔의 합병을 발표했지만 끝난 게 아니다. 그의 혁신과 열정은 아직 진행형이다.
“대세를 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잠시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아야죠. 내년에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익률도 지켜야 되고, 그동안 뿌린 씨앗도 잘 자랄 수 있도록 관리를 잘 해야죠. 기본에 충실하고, 경쟁사보다 잘할 수 있는 것 하나를 더하자는 생각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