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들의 전용서체가 붐이다. CJ제일제당 외에도 SK텔레콤의 ‘뫼비우스체’,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 현대카드의 ‘유앤아이’, 하나금융그룹의 ‘하나체’ 등 국내 10여 개 기업에서 전용서체를 내놓았다. 현재 서체를 개발 중인 기업도 많다. 기업들이 수억 원의 비용을 들여 전용서체를 개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른바 서체 마케팅을 통해 기업 고유의 이미지와 정체성을 뚜렷이 하기 위해서다. 고객에게는 기업 문화와 제품 특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한편 내부 구성원의 결속력과 애사심도 높이는 일석이조의 수단이다.
전용서체에 관심을 보이는 건 기업뿐이 아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전용서체를 적극 활용하고 나서는 추세다. 지난해 7월 서울시는 ‘한강체’와 ‘남산체’를 선보였다. 곧고 강인한 느낌의 한강체와 포용의 이미지를 담은 남산체는 현재 서울시청 현판을 비롯해 각종 안내판과 시설물에 적용되고 있다. 서울디자인올림픽이 개막된 10월부터는 공문에도 전용서체를 쓰고 있다. 서울 성동구와 중구 역시 지역 특색을 담은 전용서체를 활용 중이다. 또 전라북도는 ‘전라북도체’를, 제주시는 ‘제주체’를 개발했다. 이제 폰트가 단순한 서체의 기능을 떠나 기업과 지자체의 상징성을 나타내게 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보통 전용서체 1종을 개발하는 데는 8개월에서 1년 이상의 기간이 걸리며 디자이너도 두세 명이 필요하다. 당연히 비용도 많이 들고 가격도 비싸다. 얼마 전까지 폰트 전문업체 ‘활자공간’을 운영했던 이용제 계원예술대학 그래픽디자인학과 교수는 “대기업 전용서체의 개발비용은 3000만원에서 수억원대에 이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폰트 전문업체들이 전용서체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산돌커뮤니케이션 관계자는 “최근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용서체 개발 문의가 늘고 있다”며 “현재 7개 기업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웹폰트 인기 식을 줄 몰라
‘러브곰순씨’, ‘단발머리’, ‘참! 잘했어요’. 최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블로거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폰트 10위 안에 오른 한글서체 이름들이다. 인터넷상에서 널리 쓰이는 서체들을 웹폰트라고 하는데 누리꾼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다. 웹폰트가 가장 많이 활용되는 곳은 미니홈피와 블로그 등이다. 2005년부터 산돌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23개 업체로부터 글꼴을 받아 서비스 중인 싸이월드가 대표적인 예다. 싸이월드가 현재 제공하는 글꼴은 모두 725종. 출범 당시 240종보다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싸이월드 폰트 서비스는 1개월에 1000원, 3개월에 2000원, 6개월에 3500원의 정보 이용료를 내고 사용할 수 있다.

폰트 전문업체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웹폰트의 인기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아울러 웹폰트의 등장은 진입장벽이 높았던 폰트 시장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줬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예전에는 인쇄 및 출판 영역에 국한해 활용됐던 글꼴이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로 확대되면서 후발 폰트업체들의 시장 접근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얘기다.
김성남 폰트릭스 마케팅 이사는 “온라인 시장에서는 업체의 인지도나 규모가 중요하지 않다”며 “디자인 능력만으로도 승부를 걸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싸이월드에서 다운되는 인기 폰트 순위를 보면 특정업체가 시장을 독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위권에 윤디자인연구소, 산돌커뮤니케이션, 활자공간, 한양정보통신, 폰트릭스 등 여러 업체의 서체가 고루 분포돼 있다.
폰트업체 수가 증가하면서 폰트의 종류도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남상미체’, ‘슈퍼주니어체’ 등 연예인 이름을 딴 이른바 스타폰트는 물론 글꼴이 반짝반짝하며 움직이는 ‘액션글꼴’도 등장했다. 액션글꼴은 싸이월드 전체 글꼴 판매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손동원 폰트협회 사무국장은 “최근 4년 동안 4000여 종의 폰트가 생겨났다”고 전했다.

다양한 폰트가 등장하면서 소비자의 선택 폭도 넓어졌다. 미니홈피를 운영하는 대학생 김정세씨(25)는 “눈이 오는 날은 ‘첫눈이 오면’, 화창한 날씨에는 ‘일요일 맑음’ 서체를 쓰는 등 기분에 따라 폰트를 바꿔 사용한다”며 “서체는 사람들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웹폰트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폰트 전문업체와 제휴를 맺고 블로그나 카페 이용자들에게 웹폰트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폰트 시장 대중화에 톡톡히 기여를 하는 셈이다. 네이버는 현재 산돌커뮤니케이션, 폰트릭스, 모리스폰트, 활자공간 등 8개 업체가 개발한 119종의 폰트를 서비스하고 있다. 네이버가 무료 폰트 서비스를 하는 것은 폰트를 미끼로 방문자 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은 폰트업체에 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계산인 것이다. 네이버는 지난해 한글날을 기념해 산돌커뮤니케이션, 폰트릭스와 공동 개발한 ‘나눔고딕’, ‘나눔명조’ 등 한글 서체 2종을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모바일 폰트 산업도 탄력 받아
폰트의 인기는 모바일 기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웹폰트에 이어 모바일 폰트도 유망한 비즈니스로 떠올랐다. 휴대전화에 제공되는 폰트 서비스는 단말기 제조업체와 폰트업체 간의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KT의 ‘나만의 폰트’ 서비스와 ‘폰트문자’가 대표적인 사례다.
‘나만의 폰트’는 자신의 손글씨를 등록해 문자메시지로 보낼 수 있는 서비스로 지난해 7월부터 제공되고 있다. 애플리케이션을 내려 받은 후 33자의 글자를 펜으로 적어 이를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전송하면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쇼’ 고객만 사용할 수 있다. 무선인터넷으로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거나 글씨체를 등록할 때도 데이터 통화료는 부과되지 않는다. 선동철 KT 홍보팀 과장은 “나만의 폰트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킨다”며 “서비스 이용과정이 복잡한데도 이용자 수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폰트문자’는 전체 모바일 서비스 가운데 특히 인기가 높다. 매월 일정액을 내거나 전용폰을 구매해 이용할 수 있다. 한 달 기본요금은 1800원이며 폰트 1개를 다운받을 때마다 1000~1500원의 이용료가 부과된다. 현재 ‘폰트문자’ 서비스 가입자 수는 약 22만 명이며 폰트 전용폰 누적 판매량은 240만 대에 달한다.
SK텔레콤도 2006년부터 ‘폰트친구’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휴대전화에 이미 내장된 글꼴 외에 다양한 폰트를 다운로드할 수 있는데 900원으로 한 가지 폰트를 한 달간 이용할 수 있다. 서비스 다운로드 수는 2006년 3만 7000건에서 지난해 38만 건, 2009년 9월 현재는 42만 건으로 급증했다. 김대웅 SK텔레콤 홍보팀 대리는 “서비스가 시작된 2006년에는 ‘폰트친구’를 이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 단말기가 2종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40여 종에 이른다”며 “올해 말에는 서비스 다운로드 수가 50만 건을 돌파할 것”이라고 밝혔다.
폰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폰트 디자인 출원도 급증하고 있다. 특허청에 따르면 한글서체 디자인 출원 건수는 2005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190건에 달한다. 특허청에 등록된 글자체는 개정 디자인보호법에 의해 15년간 독점적인 보호를 받게 된다. 2004년 12월 의장법이 디자인보호법으로 바뀌면서 글자체가 디자인 개념에 추가됐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폰트가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 의해 보호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글자체의 유사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해 문제가 많았다.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에서는 서체 그 자체가 아닌 서체파일의 소스코드를 통해 모방 여부를 파악했기 때문에 우회적인 판단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법무법인 청진의 안진영 변호사는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은 실제 서체의 모양이 거의 같아도 법적으로 권리 침해를 인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던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디자인보호법 개정으로 지적재산권 침해 가능성이 줄긴 했지만 모방 사례는 여전히 많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폰트 디자인 출원이 증가하는 것도 웹폰트 시장에서 베끼기가 성행하기 때문이다. 김종규 산돌커뮤니케이션 온라인 사업부장은 “웹폰트는 특성상 다양한 디자인을 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기껏 새로운 폰트를 만들어 놓으면 다른 업체에서 금방 따라하니 개발 의욕을 상실할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김성남 폰트릭스 마케팅 이사는 “웹폰트는 개발 기간이 한 달 내외로 짧기 때문에 금방 모방이 가능하다”며 “액션글꼴 개발 후 바로 특허 절차를 밟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폰트 시장의 확대와 성숙을 위해서는 업체들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용제 계원예술대학 교수는 “웹폰트 시장에 이미 나온 폰트가 같은 이름으로 모바일 시장에 등장한 사례도 있다”며 “지금 폰트 시장은 연간 300억원 정도로 추산되지만 폰트업체 간에 공정한 경쟁이 이뤄진다면 400억~500억원까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