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그룹, ‘BL그룹’될 수도 있었다?
2004년 겨울, LG칼텍스정유(현 GS칼텍스)로부터 의뢰가 들어왔다. LG그룹에서 분리되는 4개사가 뭉쳐 새로운 그룹이 출범하는데, 이 그룹의 사명을 지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룹 브랜드의 개발은 그리 쉽지 않다. 제품 브랜드와는 다르게 그룹 브랜드는 그룹 내 여러 기업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룹의 이름은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장기적인 혜안을 가지고 선택해야 하는 사안이다. 이번 그룹 브랜드 개발에 있어 가장 큰 이슈는 ‘소비자들이 분리된 새 그룹의 규모감을 기존 그룹과 비교해 작지 않도록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확장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생각했을 때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룹으로서의 규모감은 절실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규모감을 부여할 것인가?
첫 번째 방법은 그룹명을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느낌으로 만드는 것이다.
삼성, 현대, 롯데, 대우, 한솔, 두산 등 국내의 그룹 브랜드들은 하나같이 추상적이며, 가치 중심적인 이름들이다. 이러한 스타일의 이름들은 역사성으로 인해 이미지가 고착되기 전에는 그 이름 안에 어떤 산업 카테고리를 담아도 흡수가 가능하다.
두 번째 방법은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이름을 짓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단어의 두음(頭音)을 따서 결합하는, 이른바 ‘두음 조합형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다. 이 경우 이름의 노후화를 지연시키고 다양한 가치로의 확장도 가능하다.
영어철자 두음 조합 형태 ‘하나의 유행’
글로벌 경쟁시대에 돌입하면서 영어 철자 두음조합 형태의 기업명은 하나의 유행이 됐다. 이 방식은 업종 영역과 가치의 확장, 포괄적인 규모감을 확보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LG, SK, CJ, KCC, LS, KT’과 같은 그룹명들은 그러한 장점을 가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철자를 가지고 다양한 가치 슬로건이나 캐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그룹명들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KCC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2음절어라는 사실이다. 왜일까? 이는 선두 기업들의 브랜드 형태를 따라가려는 작용으로, 이제는 2음절어 혹은 두 철자가 그룹 브랜드의 한 유형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상표법 대응 문제도 있다. 그룹들은 될수록 많은 산업군에 상표를 등록하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이미 등록되어 있는 상표가 너무 많고 등록 심사판정도 매우 까다롭다는 점이다. 두 철자로 구성된 브랜드는 그런 점에서 볼 때 상표로서 보호력은 다소 약할 수 있지만 디자인을 통해 어느 정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런 배경하에서 우리는 글로벌하게 활용 가능하고 가치 지향적인 이미지를 담는다는 방향을 잡고 두 철자의 영문명을 목표로 그룹명 개발에 들어갔다.
먼저 알파벳 26개로 두 철자 조합을 만들어 보니 총 676개의 조합이 나왔다. 여기에서 적합하지 않은 대상을 골라냈다. 우리말로 발음했을 때 3음절 이상인 H(에이치)나 W(더블유)와 같이 음절이 긴 철자들, X(엑스)·Y(와이)·Z(지)처럼 우리나라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철자, 그리고 이미 등록된 철자 등을 제외하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추려내 보니 676개에서 657개가 탈락, 총 19개가 남았다.
흔히 아이디어 혹은 크리에이티브는 즉흥적이고 의외의 상황에서 떠오르거나, 순간적인 번뜩임의 결과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론 기계적으로 계산하고 지루하게 반복하며 분석하는 가운데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GS’는 바로 그렇게 탄생한 이름이다.
‘Gold Star’ 후광에 새 의미 추가
676개의 두 철자 조합형에서 살아남은 19개의 후보들 중에서 우리는 고객사에 최종적으로 ‘GS’와 ‘BL’을 추천했다. BL은 ‘Beyond LG(LG를 넘어서)’의 의미였는데, 모그룹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면서 GS로 힘이 실렸다.
모그룹이던 LG그룹은 과거에 ‘Gold Star(금성)’ 브랜드를 쓸 때 왕관 모양의 로고와 함께 GS를 사용한 적이 있고, GS 상표도 전 세계에 디자인과 함께 출원된 적이 있다. 이미 브랜드에 어느 정도 글로벌 자산이 구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과거 왕관 모양의 로고와 함께 노출됐던 GS가 오래된 이미지나 낙후된 느낌을 줄 가능성은 우려됐다. 그래서 GS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지속적으로 노출할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글로벌 기업으로서 이미지 포지셔닝을 할 것, 서비스 기업으로서 정체성을 표현할 것, 가치 창출의 극대화를 표현할 것’이라는 대전제하에서 GS를 재해석했다.
그렇게 나온 GS의 새로운 의미는 바로 ‘Good Service(좋은 서비스), Great Satisfaction(큰 만족), Global Standard(국제적 표준)’이었다.
GS그룹은 GS의 ‘Gold Star’ 연상 효과를 희석시키고, 초기에 많은 노출이 일어나도록 빠른 조치를 취했다. 그룹 내에서도 간판 등 외부 표시물을 많이 보유한 정유회사(LG칼텍스)와 편의점 브랜드(LG25)의 간판을 ‘GS칼텍스’와 ‘GS25’로 빠른 시간 내에 교체하도록 한 것이다. GS25를 운영하던 LG유통의 사명도 GS리테일로 개명하여 글로벌 이미지를 강화했다.
GS는 출범 1년 후 92%의 인지도를 기록하여 새로 선보인 그룹 브랜드들 가운데 가장 빠른 시일 내 인지도 확보라는 새로운 기록을 수립했다.
기업의 생명력은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어갈 수 있으며, 활동 무대는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또한 기업의 경쟁력은 고객에게 얼마나 차별화된 가치를 전달해 주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회사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명의 개발은 Global(세계화), Value-Oriented(가치 추구성), Extension(확장성)의 관점을 중심으로 수백 가지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