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폭 바위병풍 산자락 속엔 조선 선비정신이…
10년도 훌쩍 전의 일이다. 늦가을에 청량산(870m)을 찾았다.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경북 내륙에 있는 청량산까지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청량산이 그리 좋다는데, 산길보다 그곳까지 가는 길이 더 험하고 멀어 못 가겠다고 할 정도였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사방으로 나 있지만 당시는 서울 남쪽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청량산까지는 1박2일이 걸렸다. 첫날은 안동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에야 청량산을 찾아갈 수 있었다. 산길을 돌아 오르며 ‘참 먼 곳이다’는 생각에 절대적으로 동의했다. 한편으로 이런 수고를 들여서 여기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러나 응진전에서 청량사를 바라보면서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청량산은 낙엽이 지고, 산은 잿빛처럼 검은 12월에도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열두 폭 바위병풍을 친 산자락에 포근하게 안긴 청량사의 모습은 이태백의 시나 겸재 정선의 그림 속에 등장하던 선계 그것이었다. 이처럼 특별한 경치를 가진 곳은 이 땅에 몇 되지 않는다. 나는 청량산의 빼어난 풍경에 감탄사를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박2일에 걸쳐 이 산을 찾은 수고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사실 청량산의 존재감은 조선시대부터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이름난 선비들은 하나같이 청량산까지 걸음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운 풍기군수 주세붕을 시작으로 미수 허목, 성호 이익, 청담 이중환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청량산을 찾은 후 하나같이 기행문이나 경탄의 시구를 남겼다. 선인들이 남긴 기행문은 100여 편, 시는 1000여 수를 헤아린다. 이처럼 많은 칭송을 받은 산이 조선팔도에 또 있을까. 선인들의 기행문과 시는 2007년 청량산 박물관에서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 1>이란 책자로 발간됐다.

청량산과 인연을 맺은 선비 중에 퇴계 이황(1501~1570)을 빼놓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청백리의 표상이었던 퇴계는 스스로를 ‘청량산인’이라 부를 만큼 청량산을 사랑했다. 청량산은 퇴계의 5대 고조부 때 나라에서 하사받은 봉산(封山)으로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곳에서 수학을 했다. 퇴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13세가 되던 해 청량산에 들어가 사촌들과 학문을 익혔다. 그 후로 퇴계는 틈만 나면 청량산을 찾았다.

도산서당을 지을 때는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애착을 보였다고 한다.

퇴계는 55세가 되던 해 11월에 청량산에 들어 한 달간 머물렀다. 이 때 그는 <십일월입청량산(十一月入淸凉山)>이란 40구(句)의 시를 남겼다. 이 시는 40여 년 전 여러 형제들과 함께 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처음 들어오던 때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퇴계가 ‘청량산인’이란 호를 쓴 것도 이 무렵부터다.

퇴계는 청량산을 소재로 한 55편의 시와 한 편의 발문과 기행문을 썼다. 그 중에 하나, 주세붕이 지은 <청량산록>에 쓴 발문은 퇴계와 청량산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말해준다.

안동부의 청량산은 예안현에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 거리에 있다. 나의 고장은 그 거리의 반쯤 된다. 새벽에 떠나서 산에 오를 것 같으면 5시가 되기 전에 산중턱에 다다를 수 있다. 비록 지경은 다른 고을이지만, 이 산은 실지로 내 집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형을 따라 괴나리봇짐을 메고 이 산에 왕래하면서 독서하였던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퇴계가 떠난 뒤 청량산은 선비의 산이 됐다. 퇴계의 정신과 학문을 계승하려는 후학들도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서 청량산으로 걸음을 했다. 청량산을 올라야 퇴계의 높은 학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다. 청량산을 오른 이들은 또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오묘한 산세에 심취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기실 청량산을 찾은 이들은 산길을 정하기가 만만치 않다. 일단 청량산과 마주보고 있는 축융봉은 논외다. 이곳도 고려의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숨어들어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산세가 예사롭지 않지만 청량산과 이어서 돌아보기에는 빠듯하다. 산행에 이골이 난 산꾼들만 시도한다.

문제는 청량산만 돌아보려고 해도 코스 짜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열두 봉우리를 모두 섭렵하려면 최소 6시간은 잡아야 한다. 봉우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오르락내리락도 많다는 것. 청량산의 유명세에 취해 덜컥 산길을 길게 택하면 곡소리가 절로 날 수도 있다. 따라서 무리는 금물이다. 체력에 맞게 산길을 잡아야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산길마다 청량산의 빼어난 절경을 즐길만한 전망대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억지로 산 정상을 오르지 않아도 정상보다 더한 조망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청량산을 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입석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다. 입석은 청량사 대문 격인 선학정에서 찻길로 1킬로미터쯤 더 올라간다. 입석부터 청량사까지는 산을 가로질러 간다. 반면 선학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오르막이라 만만치 않다. 입석에서 청량사까지는 응진전과 산꾼의 집을 경유하는 두 갈래 코스가 있어 오가는 길이 겹치지도 않는다. 이 코스로 청량사를 돌아보는 데는 1시간30분이면 넉넉하다.

하늘다리를 목표로 한다면 꽤나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봉화군이 야심차게 놓은 하늘다리는 자소봉과 선학봉에 걸쳐 있다. 다리의 높이는 70m, 길이는 90m다. 산에 놓인 현수교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길다. 2008년 5월에 개장해 지금은 청량산 최고의 명물이 됐다. 이 다리의 등장으로 청량산의 산길이 새롭게 재편되기도 했다.

하늘다리까지는 입석에서 응진전을 경유, 김생굴까지 간 다음 자소봉을 거쳐 오르는 길이 가장 좋다. 이 길은 하늘다리로 가는 이들을 위해 최근에 조성한 새로운 길이다. 돌아올 때는 하늘다리 전에 있는 뒷실고개에서 곧장 청량사로 내려온다. 청량사-입석은 산꾼의 집을 경유한다. 산꾼의 집에서 차 한잔 마시는 여유를 부려보는 것도 괜찮다.  

청량사는 최근에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절은 2009년 영화계를 강타한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첫 장면을 장식했다. 소와 함께 30년을 살았던 할아버지가 소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아픈 다리를 끌고 절을 찾는다. 할아버지가 창끝처럼 치솟은 탑과 마주앉아 죽은 소의 극락왕생을 빌던 곳이 바로 청량사다. 이 장면은 응진전에서 자소봉으로 가는 길의 김생굴 앞 전망대에서 촬영했다.

만약 김생굴을 지난다면 응진전에서 느꼈던 감흥에 뒤지지 않는 감동에 휩싸일 것이다. 이 산이 정말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풍경이 거기에 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mountainfire

여|행|길|라|잡|이

※ 코스  청량산은 어떻게 코스를 짜는가에 따라 산행시간이 천양지차다. 또 쉬운 길도 있지만 가파른 산길을 오르내리는 험로도 있다. 특히 자소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깎아지른 벼랑을 가로질러 나있어 겨울철 산행 시에는 조심해야 한다. 아이젠을 필수로 챙겨야 한다. 다만 입석-응진전-청량사 코스는 초등학생도 부담 없이 갔다 올 만큼 길이 좋다.  

※ 교통  청량사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한다. 풍기IC로 나와 5번 국도와 36번 국도를 이용, 봉화읍을 거쳐 봉성면까지 간다. 봉성면소재지에서 918번 지방도와 35번 국도를 이용하면 청량산 입구다. 남쪽에서는 안동에서 35번 국도를 따라 도산서원을 거쳐 온다.  

※ 숙박 및 별미  청량산 입구에 펜션과 민박집이 여럿 있다. 들꽃 피는 펜션(054-672-1475), 산들레(054-673-8998). 봉화 봉성면은 ‘봉성숯불돼지’로 유명한 곳이다.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를 화덕에 구운 후 춘양목에서 딴 솔잎을 섞어서 내놓는다. 청봉숯불구이(054-67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