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문화 산업 허브 지향합니다”
카드•몰•미디어 사업 삼각 축으로 문화 유통 메카 꿈꿔
‘유밀레 사건’으로 추락했다 새로운 비전 앞세워 대반전

밀레21은 문화를 파는 기업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화 상품을 유통하는 기업이다. 21세기는 흔히 문화의 시대라고 한다. 밀레21은 그런 시대적 흐름에 딱 맞는 업종을 영위하는 셈이다. 밀레21 사람들은 “우리는 문화를 움직인다”는 표현을 즐겨 쓴다. 그들 나름의 업(業)에 대한 자긍심이 배어나는 대목이다.
밀레21은 얼마 전 열 돌을 막 지난 젊은 기업이다. 회사가 창립한 때는 1999년 12월10일이다. 기억하는가? 이른바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희망과 기대, 불안이 교차하던 그때의 들뜬 분위기를. 밀레21은 그런 흥분의 시기에 일찌감치 21세기가 펼쳐낼 문화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전했던 것이다. 회사 이름 자체도 새로운 천년에 대한 진취성을 담고 있다(밀레는 밀레니엄의 약자다).
“무슨 일이든 10년 정도는 파고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10년의 세월이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요. 일반적으로 기업의 10년 생존율이 20%도 안 되니까요. 저는 밀레21이 나름대로 문화의 공공성을 중시하고 배려하다 보니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은 돈을 좇으면 안 됩니다. 저는 종종 ‘돈은 발이 8개 달렸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발이 2개인 사람이 애초부터 돈을 좇아 갈 수가 없다는 뜻이지요.”
박형근(55) 밀레21 대표의 말이다. 그는 지난 세월이 마치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는 듯, 담담하면서도 자부심에 찬 소회를 밝혔다. 그의 말마따나 어떤 기업이 10년 동안 존속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기업들이 명멸하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게다가 밀레21은 이미 시장이 형성된 곳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해 왔으니 그 동안의 곡절을 짐작할 만하다.
사실 밀레21은 지난 10년 동안 험한 파고를 헤쳐 나왔다. 한때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던 이른바 ‘유밀레 스캔들’은 밀레21에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유밀레는 2000년대 초반 밀레21의 ‘홍보대사’ 역할을 했던 여성이다. 당시 그는 20대의 젊음과 발랄함, 탁월한 외국어 능력 등 다방면의 끼를 과시하며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밀레21 경영진은 그의 이름을 딴 독특한 복합패션매장 ‘유밀레 공화국’을 열어 젊은이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유밀레 신드롬은 마치 거품처럼 일거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많은 언론들의 흥미 위주 보도에 의해 한껏 부풀려진 그의 이미지가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2004년 한 방송사 보도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밀레21 역시 불똥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박형근 대표의 회고다. “유밀레 양과 관련돼 벌어진 일은 사건이라면 사건이죠. 당시 저는 회사가 유밀레 양에게 과도하게 쏠리는 것을 우려했습니다만, 결국 일이 생기고 말았죠. 사실 유밀레 양이 똑똑하고 재능이 넘쳤던 것은 맞아요. 하지만 좀 유명해지니까 아마도 많은 유혹들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유밀레 양의 흔적을 일부러 감추지는 말자고 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많이 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평판도) 좋아지지 않겠나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CFO서 CEO로 구원투수 역할 수행
박 대표는 밀레21 출범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영입됐다. 그는 금융권 출신이다. 유밀레 스캔들이 터진 얼마 뒤에는 부사장으로서 대표이사에 올랐다. 창업자는 회사를 떠났지만 그는 떠날 수 없었다. 흐트러진 회사 경영을 바로잡는 게 급선무였다.
“2004년 무렵 회사는 최악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CFO로서 모든 서류에 사인도 했었던 데다, 무엇보다 우리를 믿고 투자한 주주들에 대한 책임감을 저버릴 수가 없었지요. 경영 상태를 볼 때마다 어지럼증이 덮칠 만큼 괴로웠지만 모든 것을 떠안고 새 출발하자는 각오를 단단히 다졌습니다.”
박 대표는 근본부터 고민했다. 창업자가 경영한 시기에는 밀레21의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았다. 게다가 사업모델은 참신한 듯했지만 수익과 연결되지 못해 손실이 누적됐다. 결국 회사 정체성과 비전의 재정립에서 활로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는 대표이사 취임식에서 ‘문화유통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지식회사’라는 새로운 정체성과 비전을 제시했다. 이듬해 주주총회에서는 ‘좋은 이익을 내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주주 앞에서 천명했다. 이때부터 밀레21의 환골탈태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박 대표의 말이다. “저는 제게 주어진 몫이 ‘백년 밀레’의 틀을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의 틀만 잘 갖춰 놓으면 제가 다 못 이뤄도 후배들이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회사의 체계를 잡아 나갔습니다.”
박 대표는 우선 밀레21의 사업구조를 문화유통이라는 큰 틀 안에서 카드•몰(mall)•미디어 삼각체제(박 대표는 ‘트라이앵글 구조’라고 표현한다)로 재구축했다. 삼각체제는 단순히 3가지 사업을 한다는 차원을 넘어 서로 보완적으로 시너지를 내는 데 의의가 있다는 설명이다. 삼각구도는 회사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외부 파트너들과 사업제휴를 할 때도 적용한다. 박 대표는 “사업을 트라이앵글 구조로 가져가면 사업이 매우 안정적이고 튼튼하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했다.
밀레21의 카드 사업은 회원들이 공연•무용•콘서트•오페라•뮤지컬 등 각종 문화 상품을 소비할 때 할인 혜택을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문화 산업을 진작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사업은 국민은행과 제휴해 만든 ‘밀레문화KB카드’를 통해 주로 이뤄지고 있다. 금융과 문화의 접목인 셈이다. 현재 회원 수는 5만여 명에 달한다.
미디어 사업은 각종 공연예술 작품의 기획 및 제작, 그리고 이를 HD급 고화질 영상 콘텐츠로 제작해 유통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특히 IPTV 채널 등과 제휴해 가정에서도 편안하게 공연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한 점이 눈길을 끈다. 밀레21이 제작하는 영상 콘텐츠는 연간 150편 안팎으로 상당한 분량이다. 그 중 3분의 1은 직접 기획•제작한 작품을 영상물로 만든다고 한다. 지금까지 축적된 영상 콘텐츠 수는 무려 1000여 편. 한마디로 공연예술의 ‘디지털 보고(寶庫)’인 셈이다.

문화미디어팀 이성호 편성제작PD는 “연극•무용•콘서트•오페라•뮤지컬 등 모든 공연 장르를 만들고 있다”며 “공연 실황뿐 아니라 배우 인터뷰, 리허설, 사전 예고편 등 다채로운 영상 콘텐츠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문화 산업 저변 확대에 상당한 노력
밀레21은 문화 산업의 저변을 두텁게 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한국대학연극학과교수협의회와 산학교류 협정을 맺는 한편 예비 연극인들의 실습무대인 ‘젊은 연극제’를 후원하는 것도 그런 차원이다. 특히 ‘젊은 연극제’의 공식 홈페이지(www.ytf.or.kr)를 구축해 교수•학생들에게 상호소통의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박 대표의 말이다. “산학협력 사업은 한국 문화 산업의 기반이자 허리가 될 젊은이들의 끼를 살리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유밀레 파동의 여파 때문인지 색안경을 끼고 대하더군요.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꾸준히 설득한 끝에 마침내 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대학사회의 반응이 아주 좋아요. 저는 산학협력 사업이 밀레21의 확고한 성장 기반이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다. 밀레21은 공연예술 유통의 ‘허브’를 표방하고 있다. 극단•기획사•제작사•예술인 등과 광범위한 상호협력 관계를 구축해 공연의 기획•제작•마케팅•유통에 이르는 전체 사이클의 중심에 서려는 것이다. 이미 상당한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밀레21과 제휴를 맺고 있는 예술단체•협력업체만 해도 100여 개를 훌쩍 넘고, 또한 밀레21이 직간접적으로 유통에 관여하는 작품 수는 연간 200편에 달하고 있다.
밀레21을 떠받치는 삼각체제의 마지막 한 축은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에 자리 잡은 밀레21몰을 거점으로 한 패션•공예품 유통사업이다. 밀레21몰은 주로 패션 매장으로 특화돼 있다. 패션도 하나의 문화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셈이다.
밀레21몰에는 세계 패션 시장에서 이름을 얻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다수 입점해 있다. 특히 일본 최대의 SPA브랜드(생산부터 유통까지 모두 직접 맡는 패션 업체)인 ‘유니클로’도 입점해 있는데, 국내 유니클로 매장 가운데 단위 면적당 매출 규모가 최고라고 한다. 도심형 명품 아웃렛 ‘W•컨셉트'도 눈길을 끈다. 이 매장은 페라가모•구찌 등 약 100여 개의 명품 브랜드를 30%가량 할인 판매해 코엑스몰을 찾는 방문객 사이에 인기가 높다. 밀레21은 지난해 세계적인 팝 디바 비욘세가 2006년 런칭한 패션 브랜드 ‘데레온’의 한국 내 유통 및 상품 제조권을 따내 화제를 낳기도 했다. 비욘세는 지난해 11월 말 직접 밀레21몰을 방문해 ‘데레온’ 런칭 이벤트에 참석한 바 있다.
전통 공예품 및 아트상품 유통사업도
밀레21의 공예품 사업은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각종 생활용품과 기념품에 담아내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제조 기능만 외주업체에 맡기고 디자인•연구개발•마케팅 등 모든 사업을 직접 수행한다. 구자열 문화공예본부장은 “국내 문화 저변이 넓어지면서 문화 상품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며 “박물관 등 공공문화시설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보다 질 높은 기념품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밀레21의 공예품은 이미 상당한 판매망을 확보한 상태다. 국립민속박물관•서울역사박물관등 전국 주요 국공립 박물관에 다수 입점해 있으며, 대법원•검찰청•경찰청•국정원등 공공기관을 통해서도 팔려나가고 있다. 또한 에버랜드•두산타워 등 관광•쇼핑 명소에도 매장을 열었다.
박형근 대표는 한 가지 에피소드를 전한다. “밀레21이 소위 권력기관이라는 곳에 매장을 잇달아 여니까 항간에서는 저를 대단한 로비스트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어요. 허허. 하지만 저는 기업이란 항상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밀레21 공예품은 품질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한 고객이 다른 고객을 소개해주는 식으로 판매망을 넓힐 수 있었던 겁니다.”
밀레21은 2009년 매출 규모가 200억원을 약간 웃돌았다. 매출로만 보면 아직 작은 기업이다. 하지만 성장세는 엄청나게 가파르다. 2007년과 비교하면 불과 2년 만에 실적이 2배로 증가했다. 더욱이 2007년 이른바 ‘기술혁신형 중소기업(Inno-Biz)’으로 인정받았을 만큼 장래가 유망하다. 특히 문화 산업이 갈수록 고성장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유리한 환경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그래선지 올해 매출 목표는 300억~350억원으로 지난해보다 훨씬 높게 잡고 있다. 그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감은 CEO인 박형근 대표에게서부터 고스란히 느껴진다. “기업 경영에는 꿈과 희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CEO와 임직원 모두가 공유해야 하겠지요. 저는 직원을 애인처럼 여깁니다. 그만큼 마음을 열고 대한다는 것이지요. 저는 CEO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도 달라진다고 믿습니다.”
밀레21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회사 창립, 선풍적인 붐, 벼랑 끝 위기, 뼈아픈 반성과 권토중래…. 이 모든 부침을 온몸으로 겪어낸 박형근 대표는 “밀레21이 ‘넓고 깊은’ 회사가 되도록 하겠다”며 다짐, 또 다짐한다.
“유밀레 사건은 밀레21의 성장통”
문화전문 프리랜서 류희씨는 유밀레를 심층 인터뷰한 적이 있다. 류씨는 유밀레의 부상과 몰락 과정을 소상히 지켜봤다. 다음은 밀레21의 재탄생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다.
유밀레 공화국 신드롬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밀레21 입장에서는 한 번쯤 겪는 ‘성장통’이었지 않을까. 유밀레라는 브랜드로 바닥까지 쳤던 암담한 기업이 어느새 창립 10주년을 맞이했고, 또한 조용한 성장을 해왔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건 아마도 유밀레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던 게 아닐까 싶다. 박형근 대표는 취임 이후 문화 사업을 장기적으로 보고 “결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밀레21은 그 동안 안정적인 재무구조를 갖추는 데 노력하는 한편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분야에 승부수를 던져 왔다. 밀레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실수조차 끌어안고 가겠다는 정신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상처를 딛고 일어선 기업. 위기조차 또 다른 교훈이나 기회로 만든 기업이 아닐까. 문화 상품 개발, 공연 유통, 콘텐츠 제작 등 밀레21은 문화 산업의 블루오션을 개척해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내실의 중요성을 깨달은 만큼 앞으로 더욱 알찬 성장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