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혁명’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백색은 국내 농가에 광범위하게 보급된 비닐하우스(시설원예)를 가리킵니다. 혁명은 겨울에도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게 된 점, 인간이 농업에서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사실을 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물입니다. ‘물이 부족해 비닐하우스 못해먹겠다’는 불만이 쏟아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농업에 알맞은 물, 그러니까 양질의 농업용수가 모자란다는 푸념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곧 해결될 전망입니다. 최적의 농업용수를 만들어내는 ‘시설원예 농업용수 정수장치’가 개발됐기 때문입니다.

지하수 철분 완벽 제거…

수확량·품질 ‘쑥쑥’

 “우리 농가에도 이 시설을 설치해주세요.”  농촌진흥청이 2년에 걸쳐 개발한 ‘시설원예 농업용수 정수장치’의 현장평가회장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나 할 것 없이 새로 만든 정수장치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제는 물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게 됐다며 환호했다. 상용화 전이어서 당장 구매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현장을 봤다면 의아할지도 모른다. 농사짓는 데 정수기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물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동안 물 때문에 애를 먹었다는 호소도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대당 120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정수기를 구입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는 것도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도대체 농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농촌진흥청 연구원들은 출장을 많이 다닌다. 농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출장 지역이 된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농업공학부의 경우 시설원예 농가를 자주 방문한다. 시설원예란 비닐하우스나 유리온실과 같은 시설을 활용한 농업을 말한다.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서 시설원예는 계절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 년 내내 원하는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해 ‘백색혁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노지 재배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아 널리 활용되고 있다.

“수질 나빠 농사 못해먹겠다” 불만 많아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시설원예 농가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 때문에 농사짓기가 너무 힘들다는 불만이었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 얘기도, 관계시설 부족을 탓하는 것도 아니었다. 물 자체는 넉넉하지만 수질이 좋지 않으니 이를 해결해 달라는 탄원이었다. 한두 지역의 일부 농가에서 나온 요구가 아니었다. 전국 곳곳의 시설원예 농가에서 ‘수질 개선’을 외쳐댔다.

화근은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물에 녹아 있는 이온의 양을 가리키는 염류농도(EC)가 지나치게 높았다. 시설원예 농가는 작물에 ‘맹물’을 주지 않는다. 물에 각종 영양분을 녹인 ‘배양액’을 사용한다. 작물마다 최적의 배양액은 따로 있기 때문에 재배 작물에 따라 배양액의 성분을 달리 해야 한다. 그런데 물의 EC가 너무 높으면 최적의 배양액을 만들기 힘들다. 이렇게 되면 양질의 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물어보나 마나다.

EC가 높아진 원인은 다양한데 그 중 하나가 ‘폐양액’으로 인한 오염이다. 농가에서 작물에 흡수되는 것보다 20% 정도 많은 배양액을 공급하는데 이 20%의 남는 배양액이 폐양액이다. 한마디로 먹다 남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폐양액이 아무 처리 없이 버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 물에 비해 EC가 높은 폐양액이 땅 속으로 스며들어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지하수의 EC를 높이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등 선진 농업국에서 폐양액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공인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는 “선진국에서는 폐양액을 재처리 후 다시 사용하게 해 폐양액으로 인한 오염을 줄이고 있으며 우리 정부도 재사용을 유도하고 있다”며 “최근 우리 농가에서도 폐양액의 재사용율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물 파동’의 다른 원인은 철분이다. 농업용수의 철분농도가 기준치를 초과하는 지역이 적지 않다. 과도한 철분이 일으키는 문제가 매우 심각한 실정이다. 시설 자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시설원예는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시설을 사용하는데 물에 철분이 많으니 시설물이 녹슬어 버리는 것이다. 배양액을 공급하는 호스인 점적관수의 구멍을 막아 자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정상적이라면 5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매년 바꾸어야 하니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

수막재배를 하는 농가의 어려움은 훨씬 더 크다. 수막재배는 비닐하우스의 안쪽에 물을 뿌려 온실의 온도를 유지하는 농법이다. 지하수는 겨울에도 15도 정도로 따뜻하다는 특성을 이용한 것이다. 시설원예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난방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많은 농가들이 수막재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지하수에 철분이 많으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다. 물이 닿은 비닐에 빨갛게 녹이 앉는다. 비닐에 녹이 묻으면 빛이 들어오지 못하므로 비닐을 교체할 수밖에 없다.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가 녹스는 것은 물론이다.

화훼 농가의 경우 농사를 접어야 하는 상황마저 발생할 수 있다. 철분이 많은 물을 꽃에 뿌리면 꽃잎이 붉게 산화돼 상품가치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 때문에 농사 못해먹겠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수질 개선 덕, 낮은 일조량에도 ‘튼튼’

특히 간척지 농가의 지하수 문제가 심각하다. 땅을 얕게 파면 철분 비중이 높게 나왔고 깊게 파면 염분이 많이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게다가 시설원예 농가의 상당수가 간척지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민들은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였다. 1㎞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물을 끌어다 쓰는 농가가 있는가 하면 비싼 수돗물을 농업용수로 쓰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산업용 정수기를 가져다가 물을 걸러 쓰는 농민도 있다. 수질을 개선할 수는 있지만 모두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은 방법들이다.

한 파프리카 농가의 경우 수돗물 값으로 매월 수백만원을 쓰고 있다. 파프리카가 워낙 부가가치가 높아서 겨우 수지를 맞추고 있는 형편이다. 만약 파프리카 가격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버티기 힘들어질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물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시설원예 산업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지만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농가의 물 문제는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농촌진흥청이 ‘시설원예 농업용수 정수장치’를 개발하고 상용화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부여·하동·평택 등 3곳의 농가에 시제품을 설치해놓고 현장 검증을 진행하고 있는데 만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설을 설치,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는 충남 부여군 망포작목반의 염규석씨에게 사용 소감을 묻자 “아주 좋다”며 “상용화가 되면 무조건 구매할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무엇보다 작물의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시들시들하던 잎이 마치 근육이라도 생긴 듯이 탱탱해진 것만 봐도 효과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뿌리의 색깔도 달라졌다. 이 정수장치를 사용하면서 누렇던 뿌리가 원래의 흰빛으로 되살아났다. 염씨는 “오늘로 사흘째 날이 흐려 일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예전 같으면 잎사귀들이 다 시들었을 것”이라며 “하지만 정수장치를 사용하면서는 4~5일 정도 해가 나지 않아도 끄떡없다”고 웃었다.

작물이 건강해지니 병도 걸리지 않아 자연스레 농약을 쓰지 않게 됐다. 토마토 맛도 좋아졌다. 수확량도 20~30%가량 불어났다. 물 하나 바꾸니 모든 게 달라진 것이다.

“물에 철분이 많아서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여기 땅이 워낙 좋으니까 지금까지 농사지을 수 있었지 다른 곳의 땅 같았으면 3년도 농사짓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골칫거리가 사라져서 아주 기분이 좋아요. 예전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수경재배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균력 100%…병충해 피해 감소

농촌진흥청이 측정한 바에 따르면 이 정수장치의 성능은 매우 놀랍다. 두 가지 고민, 즉 철분과 염류를 완벽에 가깝게 잡아낸다. 철분 제거율은 100%, 염류 제거율은 90~92%에 이른다. 이 정도만 해도 농가로선 대만족이지만 이 장치엔 비밀병기가 하나 더 있다. 오존과 자외선을 활용한 살균기능이 그것이다. 살균율은 100%다. 세균이 없으니 작물의 발병율이 낮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번에 개발된 정수장치의 철분 제거력과 살균력은 고도산화처리(AOP) 기술을 채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AOP는 물속의 철분을 급속히 산화시켜 철분을 걸러내는 기술이다. 산화엔 살균력이 강한 오존을 사용한다. 이렇게 해서 철분 제거와 살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다.

이 연구사는 “농가의 가장 큰 골칫덩어리였던 지하수 내 철분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AOP 방식을 발견하게 됐다”며 “AOP 기술을 농업용수 정수에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지비도 저렴하다. 현재 일부 농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산업용 정수기에 비해 63.5%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초기 시설 투자비가 비슷한 수준인 만큼 경쟁력 면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수량도 풍부하다. 시간당 2~10톤을 정수할 수 있다. 이 정도의 양이면 물을 많이 쓰는 수경재배도 무난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가격이다. 영세농가의 경우 대당 1200만원은 부담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정부의 지원을 바라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정부가 보조사업을 진행하면 큰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경남 창원시의 경우 4억원의 예산을 편성해 시범보급계획을 추진할 계획이다.

Interview   이공인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

“지속적 모니터링 통해 더욱 개선해야죠”

“수처리는 끝이 없는 작업입니다. 수질은 계속 변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과제가 생깁니다. 그때마다 대응하는 수밖에 없죠.”

‘시설원예 농업용수 정수장치’ 개발을 주도한 이공인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 정수장치 역시 수질 변화에 따라 농가가 직면한 문제에 대응한 것이라는 얘기다. 언제부터인가 수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던 것이다.

먼저 전국의 농가를 방문하며 수질을 조사해야 했다. 분석하는 부서는 따로 있지만 샘플을 구해 오는 것은 이 연구사의 몫이었다. 여름이 문제였다. 물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를 들고 다니면서 물을 담아왔다. 출장 기간이 길어지면 이마저도 소용이 없어 식당 냉장고를 빌려야 할 때도 있었다.

“상용화를 앞두고 있지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농가마다 상이한 수질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같은 농가라도 수질은 계속 변하므로 수질에 대한 모니터링은 필수적입니다.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진행해 농가에서 더욱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 연구사는 이번 정수장치가 농가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가격 부담이 있겠지만 예전과 달리 ‘농업도 잘 하려면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가 있다면 수출 길도 열릴 것으로 이 연구사는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