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해학성 담은 채색화 작가

천경자는 척박한 채색화의 큰 한줄기를 이루어낸 화가다. 한 마디로 그녀는 스스로의 재능을 다양하게 시험하며, 채색화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녀는 채색화뿐 아니라 드로잉 등 그 어떤 표현 방법 및 표현 양식으로도 자신을 세울 수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 곧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떠났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사실적이고 장식적인 채색 기법을 구사했다. 이후 환상적인 색채 사용과 초현실적 화풍으로 자전적 요소를 짙게 보여주는 시기로 전환됐다. 그러다가 1969년 시작되는 그녀의 해외여행에서 내면에 잠재된 욕구의 정체를 확인하고 색채에 대한 이때까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

해외여행 풍물화(그림1)에서는 시각적인 쾌감이 넘친다. 그리고 감성의 자유로운 발설을 본능적이면서도 감각적인 묘사로 받아쓰는 즐거움을 누린다. 생명감 넘치는 선의 유희로 정평이 나있는 그녀의 작품은 여행지에서 순간적으로 돌발하는 미적 감흥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겼다. 그랬기에 여행에서 돌아오면 거기에 채색만 덧붙이는 것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해외여행에서 얻은 이국적 특색을 주관적으로 재해석한 화면을 보여주며, 서구적인 소재에 더욱 관심을 나타냈다. 또 그 속에 낭만과 해학성을 담아 삶의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녀는 산다는 의미가 예술이라는 용광로에 활활 타올라 새로운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그 생활에 있고, 아프리카의 자극과 풍물은 그녀 마음의 용광로에 불붙게 하는 원동력이 돼 주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녀의 예술에 대한 태도는 고독의 철학과 슬픔의 미학이 작품 속에서 한층 승화된 것이었다.

그녀의 채색화, <황금의 비>(그림2)는 그리스 신화의 문학적이면서 신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내용인 즉, 바람둥이 제우스는 다양한 변용(變容, metamorphose)으로 모습을 바꿔, 아내 헤라의 눈을 피해 여러 여신들,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다. 예를 들어 하얀 백조가 돼 레다에게 다가가고, 황소가 돼 에우로페에게 접근하며, 검은 구름이 돼 이오와 사랑을 나눈다. ‘황금의 비’는 제우스의 또 다른 변용이며 제우스는 ‘황금의 비’가 돼 다나에에게 접근하여 사랑을 호소한다. 천경자의 그림    <황금의 비>는 ‘황금의 비’로 변용해 다가온 제우스와 다나에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황금의 비>는 여인의 머리 위에 비처럼 쏟아지는 노란 꽃잎과 하얀 나비가 어울려 환상을 자아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다나에는 아름답지만 강력하면서도 불길한 이미지, 원시적인 이미지로 보인다. 이는 천경자 회화의 주제가 문학적 사유의 세계, 생명의 신비, 자연의 아름다움 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녀 삶의 궤적과 일치하는 것으로, 실제 생활의 경험에서 우러나와 형식적 소재인 동시에 문학적 암시와 상상에 의해 윤색되고 변형된 것이다. 더욱이 화려하면서도 미묘한 채색기법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색채는 소재를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소재의 그림은 서양의 회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한 예로 클림트(G. Klimt)의 <다나에>(그림3)를 들 수 있다. 작품의 제목은 다르지만, ‘황금의 비’로 변용한 제우스가 다나에에게 다가가 사랑을 나눈다는 주제는 천경자의 <황금의 비>와 똑같다. 인간의 성(性) 표현은 휴머니즘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사랑하는 감정과 연결될 때 진정한 에로티시즘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환언하면 성이란 육체적 쾌락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합일을 통해 삶의 새로운 국면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육체의 내밀한 접촉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이 부재한 포르노그라피적 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소개

클림트(Gustav Klimt)


클림트는 19세기 말의 과도기적 화가였다. 그는 오스트리아 분리파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현란한 색채로 관능성과 악마적 요소 그리고 끊임없는 긴장이 뒤섞인 회화로 관객에게 언제나 강한 인상을 준다. 그의 작품 <요부>의 이미지는 성에 대한 공격적 사디즘(sadism)적 요소와 동물적 모티브에 나타난 힘과 공포 그리고 관음적이고 동성애적인 성적 표현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 표현은 단순한 본능적 성에 대한 갈망이나 충족이 아닌 의식과 비판이 담긴 예술작품으로의 승화로 해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