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뮤지컬 배우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역할이라면 단연 <나인(nine)>의 ‘귀도 콘티니’다. 뮤지컬 <나인>에는 총 19명의 배우가 등장하는데 이중 17명이 귀도를 둘러싸고 있는 여배우들이다. 그리고 귀도 이외의 다른 한 남자는 바로 9살의 꼬마 귀도다. 뮤지컬 <나인>은 바로 귀도의, 귀도에 의한, 귀도를 위한 작품이다.
현재 뮤지컬영화 <나인>이 상영 중이다. 이 영화는 앞서 말한 한 명의 귀도와 17명의 여인이 등장하는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영화 <나인>에서는 프로듀서 릴리안 역을 남자 배우로 대치하는 등 귀도를 완전히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인물로 그리지는 않았지만 뮤지컬의 구성을 상당 부분 유지한다.
원작 뮤지컬 <나인>은 1963년에 만들어진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8과 1/2>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뮤지컬 <나인>의 작곡가인 모리 예스톤(Maury Yeston)은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를 보고 창조의 한계를 느끼는 천재 감독 귀도에게 크게 공감을 느꼈다. 그래서 이 작품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즉 1963년도 펠리니의 영화를 1982년 모리 예스톤이 뮤지컬로 만들고, 다시 2009년에 롭 마샬 감독이 뮤지컬영화로 만든 것이다.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천재감독 ‘귀도’
<8과 1/2>도 그렇지만 <나인(nine)> 역시 제목이 참 생뚱맞다. 우선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은 자신이 만든 작품 수를 의미한다. 6개의 장편영화와 2개의 단편영화 그리고 한 작품을 공동제작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 작품 속 천재 영화감독 귀도는 사람들의 기대와 새로운 작품에 대한 압박감으로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8과 1/2’이라는 제목은 바로 페데리코 펠리니의 창작의 고통을 상징화하는 숫자다. 모리 예스톤은 여기에 음악을 더해 ‘9’라고 타이틀을 정했다.
‘9’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부여되는데, 바로 귀도의 정체된 나이다. 어린 귀도는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사는 창녀 사라기나를 통해 성적인 흥분을 경험한다. 그를 매혹시켰던 흥분이 가톨릭적인 엄격한 절제에 의해 제지당하면서 어린 귀도는 그 상태로 정신적 성장을 멈추게 된다. 뮤지컬에서는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두고 창작력의 고갈을 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어린 시절과 연관시킨다. 귀도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창작욕을 불러일으키는 뮤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수많은 여인들이 더 이상 그에게 새로운 창작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모든 여인들의 품에 의지하려고만 드는 어린 아이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롭 마샬의 영화에서는 이러한 귀도의 성장 스토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고갈된 귀도의 창작의 샘과 그의 고뇌가 두드러진다. 뮤지컬에서는 그 문제의 근원적인 곳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멈춰있는 아홉 살의 귀도가 존재했고, 영화에서도 어린 귀도가 등장하지만 그는 뮤지컬에서와 같은 상징성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롭 마샬의 영화에서는 귀도의 고통이 가슴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단 볼거리 하나만은 훌륭하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는 판타지와 현실을 오고가는 형식이었다. 귀도의 머릿속에 떠도는 여인들이 귀도에게만 보이고 귀도에게만 들리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뮤지컬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이어진다. 상징적인 철골 구조물로 된 형이상학적인 무대를 선보였는데, 그것은 마치 귀도의 정신세계인 양 비사실적이고 상징적이다. 롭 마샬의 영화는 현실 장면에서는 로마의 수려한 건축물과 자연 경관으로 감탄을 자아내고, 판타지 장면에서는 무대를 촬영한 듯한 느낌으로 무대 공간 느낌을 살렸다. 이것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의 전작인 뮤지컬영화 <시카고>에서도 그는 현실과 무대 장면을 접목시키는 방식으로 무대 위의 판타지를 재현했다.
공감대 잃었지만 볼거리는 훌륭해
롭 마샬의 영화에서 단연 감탄을 자아내는 것은 귀도를 둘러싼 일곱 명의 여인들의 아찔한 매력이다. 창작의 샘이 막혀 구원의 손길을 원하는 귀도에게 관능적인 노래로 유혹하는 칼라 역의 페네로페 크루즈는 과감하면서도 섹시한 성적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서있는 그 자체로 여신의 우아함을 보여준 니콜 키드만은 또 어떤가. 고개의 위치를 바꾸는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매력을 발산했다.
아내 루이자 역을 맡은 마리온 코틸라르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휴식 같은 여인을 보여주었고, 귀도를 성에 눈뜨게 하는 사라기나는 힙합 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의 퍼기가 농염한 매력을 발산했다. 귀도의 팬인 여기자 역의 케이트 허드슨은 은밀하게 귀도를 유혹했다.
귀도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의상디자이너는 명배우 주디 덴치가, 귀도의 어머니는 등장하는 것만으로 포스가 느껴지는 소피아 로렌이 출연했다. 이들이 뿜어내는 매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 중심에 있는 귀도. 2003년 브로드웨이 공연에서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강렬한 카리스마로 17명의 여인들에게 사랑받는 천재 감독을 연기했다. 2008년 국내 공연에서는 황정민이 맡았다. <나인>을 뮤지컬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제일 먼저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낙점되었다. 이탈리아 억양이 강하게 담겨 있는 그의 노래는 섹시했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걷는 각진 어깨선에서는 병약하면서도 섬세한 천재 감독의 성향이 느껴졌다. 최고의 귀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각각의 캐릭터가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적인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해물, 야채, 육류 각각의 맛은 살아있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 비빔밥이라고나 할까. 각각의 요소들은 매우 훌륭했지만 단순히 볼거리로만 그치고 말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