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색·무게감 있는 톤 그림 사라

작품 가격은 화가가 정한다. 시장성이 있는 작가는 화가와 작품의 판매를 대행하는 화랑과 협의해 가격을 정한다. 옥션의 경우, 시장 가격을 감안하여 보다 현실적인 추정가를 정한다. 시장이 활성화되고, 내놓기가 무섭게 팔리는 작가의 작품 추정가는 올라간다.

그러나 요즘처럼 미술 시장이 바닥에서 겨우 고개를 내밀 때는 추정가는 최저가와 최고가의 편차를 크게 벌여 모호한 가격대가 된다.

어쨌거나 시장에서 작품 가격은 공급자들이 정한다. 소비자들은 구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뿐이다. 이 패턴이 미술 시장에서의 작품 가격 결정의 일반론이다. 그러나 실제 미술 시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소비자 입김이 작용하는 측면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같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 돈 되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의 결정이 그것이다.

동일 작가의 작품 중에서 ‘돈 되는 그림’과 ‘돈이 되지 않는 그림’은 미술품 투자자들이 실전에서 반드시 따져봐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초보 투자자들이 설익은 정보와 얇은 귀로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가장 흔하게 빠지는 수렁도 바로 이 부분이다.

소비자 취향이 가격 차이 유발

미술 시장에서 작품 가격을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접하는 게 ‘호당 가격’이다. 중진의 A작가는 호당 50만원을 넘는다더라, B작가는 신인이지만 호당 30만원은 된다더라 등의 얘기들이 그렇다. 호당 가격은 미술품 거래의 판매기준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정보다.

미술품 가격 정보지나 옥션 등을 통해 특정 작가의 작품 가격을 알아보는 것은 투자의 ABC다. C작가의 작품 20호짜리가 모 옥션에서 2000만원에 낙찰됐다면 투자자는 C작가의 작품은 호당 100만원이라고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C작가의 또 다른 작품은 같은 20호짜리임에도 1000만원에 유찰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까지 확인해야 제대로 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같은 작가라도 작품 가격의 편차가 큰 경우가 적잖다.

이 편차는 작가의 작품 제작 연도나 작품의 소재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원로급 작가나 작고 작가의 경우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높을 때나 작품 수가 몇 점 되지 않는 시점이거나, 또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소재일 경우 가격대가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소비자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작품 가격의 편차에는 뜻밖에도 소비자의 개인적 취향이 큰 영향을 미칠 때가 많다. 작품성이나 희소성 따위와는 달리, 순전히 선호도의 차이다.

서울옥션 111회 경매에 박서보의 그림 두 점이 나란히 출품됐다. <묘법 NO-920115>과 <묘법 NO-930528>이 그것이다. 둘 다 150호로 같은 크기이며 재질도 한지에 혼합재료를 사용했다. 추정가는 모두 9000만~1억2000만원이었으며, 시작가도 7700만원으로 같았다. 그러나 한 작품은 1억1500만원에, 또 하나는 8000만원에 낙찰됐다. 40% 정도의 가격 차이가 난 것이다.

정상화의 작품 두 점도 동일 경매에 나란히 올랐다. <무제88-10-99>와 <무제90-3-4>다. 두 작품 모두 100호 짜리로 캔버스에 아크릴을 사용했다. 그러나 한 작품은 5000만원에 낙찰되고, 또 하나는 유찰되었다.

무엇이 동일 작가의 똑같은 크기의 작품의 운명을 갈라놓았을까. 작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둘 중 하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적거나, 두 작품의 작업 시간에 차이가 있거나, 한 작품은 졸다가 그렸다거나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게다.

굳이 차이를 찾으면 색이다. 박서보는 한 가지 색이나 같은 계통의 색조를 이용한 그림을 그리는 대표적인 모노크롬 작가다. 그에게 있어 색은 모두 같은 무게를 갖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그 색의 차이에 따라 가치를 크게 달리 본 것이다. 정상화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기준을 모든 작가의 작품에 대입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소비자들은 무채색보다는 유채색을, 어둡고 칙칙한 색보다는 밝은 화려한 색을, 가벼운 느낌보다는 무게감 있는 톤을 선호한다. 화면의 한쪽이 비어있거나 헐렁하지 않고 밀도가 있고 꽉 찬 그림을 좋아한다. 화장으로 치면, 가볍지 않으면서 화려하고 진한 화장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 선호도는 아무도 예술적 가치로 설명할 수 없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네 미술 시장이 갑자기 성장하여 아마추어 소비층이 대거 유입되면서 빚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전문적 해석과는 무관하게 시장가격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더욱이 최근 들어 작품을 구입한 뒤 되파는 순환주기가 짧아지면서 소비자의 취향은 더욱 무시할 수 없는 잣대가 되고 있다. 새로운 소비자에게 되팔기 편한 작품을 구입하려면 보편적 소비 취향에 맞는 작품을 구입하는 게 투자손실을 줄이는 한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