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개봉한 영화 <체인질링>은 1920년대 미국 LA의 부패한 경찰과 싸우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환원으로 일하며 혼자 아들을 키우던 크리스틴(안젤리나 졸리)은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노력한 지 다섯 달 만에 경찰은 아들을 찾아온다. 그러나 그 아이는 크리스틴의 아들이 아니다. 성과를 올리려는 데 집착한 경찰은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고, 크리스틴은 진짜 아들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재수사를 요구한다. 영화 <체인질링>은 1920년대 미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부패하기 시작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호황 속 부패 싹튼 미국이 배경
인순이, 옥주현의 출연으로 이슈가 되었던 뮤지컬 <시카고> 역시 같은 시기가 배경이다. 1920년대 미국 정치인들과 경찰들의 부패는 도를 넘어섰다. <체인질링>에서 LA 경찰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틴이 아이 찾는 일을 그만두지 않자,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 정신병원에 가둔다. 뮤지컬 <시카고>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보드빌(통속적인 희극, 춤, 곡예, 노래 등을 섞은 쇼) 가수 벨마는 그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정부(情夫)의 배신을 알게 된 록시 역시 살인을 저지른다. 끔찍한 살인사건은 이 당시 시카고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쿡 카운티 교도소에 수감된 여죄수들이 부르는 ‘Cell Block Tango’에서는 한 치의 후회도 하지 않는 여섯 명의 여죄수들이 의자에 걸터앉아 살인을 저지르게 된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능한 변호사 빌리의 도움을 받으면 그들의 범죄 행위는 오히려 훈장이 된다.
범죄자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 부패한 경찰과 선정적인 보도만 일삼는 언론이 그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시카고에서 대중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인물은 마피아의 대부 알 카포네였다. 1919년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된 이후로 밀주 판매와 매춘, 마약 밀매 등 불법 사업을 주도한 알 카포네였지만 대중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언론은 자상한 아버지이면서 빈민층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했던 알 카포네를 미화시켜 보여주었다. 그의 자상함과 조직을 운영하는 카리스마를 강조했고, 사교성이 좋은 알 카포네는 대중들의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살인과 매춘, 마약 밀매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1920년대 시카고는 정의가 사라지고 진리를 사고파는 퇴락한 도시였다.
<시카고>에서 진실을 호도하고 범죄를 탈색하는 과정을 그린 노래는 빌리가 복화술로 부르는 ‘We Both Reached For the Gun’이다. 록시가 살인한 것은 정당방위였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 노래는 빌리의 무릎에 앉은 록시가 빌리의 조정에 따라 마리오네트(실에 매달아 조종하는 인형)처럼 입만 뻥긋거리며 부르는 노래다.
메리 선샤인 기자는 록시의 살인을 정당방위로 인정하고 빌리가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그대로 받아 적으며 선정적인 기사를 작성하는 일에 앞장선다. 이름에서부터 긍정적인 느낌을 담뿍 안겨주는 메리 선샤인은 록시의 죄를 옹호하는 노래를 부른다. 고음의 소프라노 음역대로 노래하는 메리 선샤인 역은 남자 배우가 맡는다. 분장으로 감쪽같이 속여오던 메리 선샤인은 마지막 부분에서 가발을 벗고 자신이 남자임을 드러낸다. 진실을 호도하는 기자 역할을 성이 반대인 배우에게 맡김으로써 작가는 진실을 거래하는 언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뮤지컬 <시카고>는 1975년 전설의 안무가 밥 포시와 프레드 엡, 존 칸더 콤비가 만든 걸작이다. 원작은 <트리뷴>에 실린 기사에서 모티프를 얻어 만든 희곡 <용감한 여인>이다. 이 희곡은 1927년과 1942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보드빌 형식의 공연으로 올린 뮤지컬의 인기를 따를 수는 없다. 이 작품은 토니상 시상식에서 10개 부문 11개의 후보를 낼 정도로 전 부문에서 고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해 <코러스 라인>과 맞붙으면서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다. 반면 1996년 리바이벌되었을 때는 초연 때를 설욕하듯 6개 부문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뮤지컬 침체기에 등장한 뛰어난 작품
뮤지컬은 대개 가족적이며 보수적인 장르다. 꿈과 행복, 그리고 사랑, 가족의 안녕 등 안정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시카고>가 등장한 1970년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까지 뮤지컬은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드라마와 노래가 결합되는 북 뮤지컬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뮤지컬은 대중들에게 최고의 엔터테인먼트로 자리매김했다. 오스카 해머스타인과 리처드 로저스 콤비는 20세기 중반 뮤지컬 전성기를 이끈 주역이었다. 지금도 간간이 공연하고 있는 <사운드 오브 뮤직>, <오클라호마>, <왕과 나>와 같은 작품들은 두 콤비가 만든 1950~1960년대 대표적인 뮤지컬이다.
196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던 뮤지컬은 1970년대로 넘어와 TV의 보급이 활성화하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TV에게 빼앗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반전사상과 히피정신이 충만했던 1960년대를 지나면서 보수적인 색채가 짙었던 뮤지컬은 침체기로 접어들게 된다. 시장 자체는 침체기였지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뮤지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실험적이고 내용 면에서도 사회적인 성격을 띠었다. 배우들의 애환을 오디션 형식으로 풀어낸 <코러스 라인>, 성서를 예수가 아닌 유다의 입장에서 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인종이나 성적 차별로 인해 자행되는 폭력을 담은 <카바레>와 같은 뮤지컬들이 1970년대에 등장했다. 비록 뮤지컬 침체기로 이어지는 상황이었지만 작품성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작품이 배출됐다. <시카고>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등장한 뮤지컬이다.
특히 <시카고>의 음악은 서사극을 완성한 브레히트의 오랜 파트너였던 쿠르트 바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인지 <시카고>에서는 서사극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사극은 관객들이 극에 몰입하는 것을 막고 비판적으로 공연을 보기 위한 연극적인 장치를 말한다. <시카고>에서 빈 무대 세트 위에 밴드를 그대로 노출시킨 것 역시 소외효과를 위한 서사극적 장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