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연구개발로 신기술과 신제품을 먼저 내놓아야 남보다 앞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고경영자들의 기술혁신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야 한다.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CEO가 있다. 바로 정재창(46) 로엔케이 사장 얘기다.

“차세대 신소재 ‘그래핀’ 상용화되면

  엄청난 부가가치 창출될 겁니다”

2차전지 핵심소재 고순도 흑연 개발, 일본 수출 ‘쾌거’

하이닉스 연구원 시절  13년 동안 270여 건 특허 등록

정재창 사장과의 인터뷰는 예정보다 1시간 늦게 시작됐다.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한 투자설명회가 예상보다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회의실에서 간혹 웃음소리도 새어 나와 결과가 좋았냐고 물었지만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제 막 한겨울을 지났음에도 정 사장의 얼굴은 까맣게 타 있었다. 실험으로 인한 부작용이라고 했다. 알고 보면 그는 미친(?) 과학자다.

그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2008년까지 13년 동안 하이닉스반도체에서 소재 연구원을 지낸 공학도다. 그가 연구원 시절 개발해 등록한 국내 특허 건수만 270여 건이 넘는다. 13년 동안 매달 거의 2건의 특허 기술을 개발한 셈이다. 온전히 미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성과다.

고순도 흑연 등 신소재 사업 특화

그는 언제나 기술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기술혁신에 모든 열정을 쏟아 왔다. 하이닉스 연구원 재직 중에는 화학실험을 하다 실명할 뻔했다. 실험 도중 실수로 시약을 엎질렀는데, 그것을 치우면서 화학약품의 가스에 눈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마치 바늘 100개로 눈을 찌르는 듯 한 아픔이었어요. 응급실로 직행했죠. 각막이 녹아버렸다는 겁니다. 그래도 다행히 실명 위기는 넘겼어요. 두 번의 폭발사고도 겪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대형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그는 연구에서 손을 뗀 적이 없었다. 그는 “연구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찾지 못했다”며 “그렇지 않았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정 사장 인생을 이끌어온 것은 연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서울대 해양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 진학한 것도, KAIST를 졸업하면서 연구소로 간 것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택한 것도 다 연구가 좋아서였다. 연구에 대한 그의 애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에겐 사무실이 따로 없다.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연구실과 충북 음성의 생산 공장이 그의 사무실이자 일터다. 로엔케이 임직원은 채 30명이 되지 않지만 연구인력은 그를 포함해 6명이다.

고순도 흑연과 차세대 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은 이 같은 기술개발 열정에 따른 산물이다. 고순도 흑연은 2차전지, 태양전지 등의 핵심소재일 뿐 아니라 각종 첨단산업에 안 쓰이는 곳이 없을 정도로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

고순도 흑연의 수요는 최근 2차전지, 하이브리드카 등 신에너지 시장의 확대에 따라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흑연 생산업체가 그동안 전무했다. 그가 휴광한 흑연 광산을 인수하고, 고순도 흑연 생산에 뛰어든 이유다.

로엔케이의 흑연 정제기술은 기존 기술보다 우수하고 생산단가에서도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사장은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화학물질을 이용해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식을 접목해 시간과 원가를 절감하면서도 고순도의 흑연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생산한 흑연은 고품질이면서도 경쟁사 등에 비해 20% 정도 저렴하다.

로엔케이는 조기 생산을 위해 현재 충북 음성에 공장을 임대해 2만3100평방미터 규모의 공장을 건설 중이다. 이 공장이 완공되면 연간 1만 톤가량의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된다. 최근에는 충북 괴산에 39만6000평방미터 규모의 부지를 확보하고, 자체 공장 및 기타 시설 건립을 준비 중이다.

로엔케이의 고순도 흑연은 이미 일본 업체와 3년간 3000억원 규모의 납품 계약이 체결된 상태다. 지난해 일본 IT카즈와 하이브리드카용 전지의 일본 기준에 적합한 고순도 흑연 판매 기본계약을 체결한 것. 중국이 독점하고 있던 수입선을 다변화하겠다는 일본 업체들의 전략적인 판단도 있었지만 품질에서 중국 제품과 워낙 차이가 나 쉽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보유한 흑연 관련 기술이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정 사장은 “수입대체 효과와 함께 고순도 흑연 수출국의 위상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로엔케이의 미래 성장 동력은 차세대 소재로 불리는 ‘그래핀’이다. 그래핀은 최근 들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나노 소재다. 탄소나노튜브를 이어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신소재 중 하나로 꼽힌다.

나노기술로 각광을 받고 있는 탄소나노튜브는 형태가 조금만 바뀌어도 전기적 성질이 급변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 반면 그래핀은 구조가 붕괴할 염려도 없고, 변형에 덜 민감한 것이 장점이다. 접거나 휘어도 전기적 성질이 바뀌지 않아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전자종이나 휘는 디스플레이 재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그래핀은 현재 반도체에 사용되는 단결정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빠르게 전자가 흐를 뿐만 아니라 구리보다 100배 많은 전류가 한꺼번에 흐를 수 있어 산업적 응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는 고유한 성능을 잃지 않으면서 기존 방법들보다 빠른 시간 내에 대량으로 그래핀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기술과 적용방법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한 상태다.

정 사장은 “그래핀을 배터리에 적용하게 되면 지금보다 효율이 3~4배 이상 증가할 정도로 혁명적인 소재”라며 “현재 실험실에서 그래핀 연구가 진행 중이지만, 조만간 상업생산에 성공하게 되면 엄청난 부가가치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성 있는 연구에 집중

정 사장의 노력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기술개발 노력을 시장 여건 변화에 따라 효율적으로 구사했다는 점 때문이다. 상용화할 경우 경제성이 있는, 즉 ‘돈’이 되는 연구에 집중한 것이다. 그가 ‘현장 과학자’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구를 위한 연구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원리를 밝혀내는 연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노벨상을 수상하죠.(웃음) 하지만 전 그러한 원리를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개발에 더욱 관심이 많습니다.”

정 사장이 하이닉스에 입사한 1995년만 해도 세계 반도체 및 소재 시장은 거의 일본이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핵심 소재는 일본에서 수입하는 실정이었다. 우리와 기술 격차가 컸던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의 당시 회고다.

“700여 개의 반도체 공정에 딱 한 번 적용되는 소재가 있습니다. 일본의 한 업체에서만 생산했는데, 그 업체는 그 소재 하나로 1조원 매출을 올렸어요. 국내 업체에서 생산하지 않는 게 너무 아쉬웠어요. 그땐 반도체 산업에선 물, 사람 빼면 전부 외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기술력이 낮았어요.”

그는 미래를 위해서는 국산 기술을 개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정 사장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술개발에 대한 강한 의지뿐이었다.

“만약 일본이 반도체와 소재 산업을 주도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면 우리 반도체 산업이 지금과 같은 성장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가진 것은 열정뿐이었지만 부딪혀 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분야라는 생각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지요.”

하이닉스에 입사한 첫 3년 동안 아침 7시에 출근해 새벽 3시에 퇴근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토·일요일도 없이 연구에만 몰두했다. 당시 그가 처음 개발한 기술이 바로 반도체 감광제였다. 반도체의 꽃으로 불리는 감광제 역시 일본이 장악하고 있었던 기술이다.

“당시의 연구개발은 허들을 넘는 식이었어요. 하나를 개발하고 나면 또 다른 허들이 기다리고 있는 식이었지요. 그럼 또 허들을 넘기 위해 연구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죠. 이러한 기술개발을 통해 하이닉스뿐 아니라 국내 반도체 관련업체들이 수천억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지난해 대기업인 하이닉스를 나온 것은 자신만의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신소재 개발 연구에 대한 열정 또한 컸다.

“하이닉스는 반도체 완성품 업체입니다. 반도체 칩 개발이 우선이죠. 하지만 반도체도 결국엔 신소재 개발에서 승부가 갈릴 겁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골치 아픈 소재 분야는 외면하고 있어요. 외부에서 수월하게 공급받길 원하죠. 갈수록 소재에 대한 중요성은 낮아졌어요. 저는 신소재 개발에 더욱 매진하고 싶었고요.”

그는 지난해 손목시계 제조업체인 로엔케이에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손목시계 사업 외의 신규사업을 추진하던 로엔케이가 그의 고순도 흑연 기술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이후 그는 경영참여를 목적으로 주식을 취득, 최대주주에 올라 사업부문을 고순도 흑연 부문으로 특화시켰다.

로엔케이의 올해 매출 목표는 391억원. 정 사장은 고순도 흑연부문의 특화와 그래핀의 상업생산을 통해 2014년에는 3270억원의 매출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죽는 순간까지 연구하는 것이 꿈

로엔케이의 연구 인프라는 대기업이었던 하이닉스에 비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이닉스는 10억원 정도의 장비가 필요하다고 하면 다음날 바로 구입해 줄 정도였죠. 700억원짜리 장비도 있었고요. 인프라는 대기업을 따라갈 수 없지만 연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요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낸다. 하이닉스를 관두면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현재 로엔케이는 각자대표체제다. 경영학과 교수 출신인 이기호 회장이 경영 전반을, 정재창 사장은 기술개발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어요. 자금이 필요할 땐 주변 지인들과 투자자들이 저를 믿고 투자에 나서줬고요. 기술개발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죽는 순간까지 연구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