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은 아시아적 가치를 대표하는 경영철학이다. 개성 상인, 휘주 상인, 오사카 상인 등 아시아의 유명한 산단(産團)의 경영자들은 의사결정과 경영실천에 있어서 중용의 미덕을 숭상하여 왔다.
치우치지도 않고(不偏) 기울지도 않고(不倚)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無過不及)를 중(中)이라 한다면, 용(庸)은 ‘언제나’라는 의미의 평상(平常)이라는 뜻이다.
중용의 성과관리는 지속성장 원천
아무리 눈앞에 이익이 있어도 그것이 중용의 미덕에 벗어나 있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시아 경영자들의 철학이었다. ‘과도하게 채우려 하면 넘칠 것이요(滿則溢), 모자라면 궁해질 것이다(不及則窮)’라는 중용의 성과관리는 단기간의 성장과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지속적인 성과를 내기 위하여 철저하게 지켜야 할 중용적 가치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汲), 일명 자사자(子思子)가 쓴 책의 이름이기도 하다. <중용>은 12세기 주자가 <대학>, <논어>, <맹자>와 더불어 <예기(禮記)>에서 분리하여 사서(四書)로 승격시킨 이후로 800여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책으로 <주역>과 함께 사랑받아 왔다. 중용은 <중용>이란 책에서 강조되는 삶의 철학이기도 하며, 의사결정의 기준이다.
중용을 영어로는 ‘황금률(golden mean)’이라고 한다. 그냥 중간(mean)이 아니라 황금(gold)같은 중간이다. A와 B의 정지되어 있는 수치적 개념의 중간이 아니라 상황(時)에 따라 장소(空)에 따라 가변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중용이다.
상황과 장소에 따라 맞춰가는 게 중용
중용이 갖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평형성(equilibrium), 역동성(dynamics), 지속성(continuance)이 그것이다. 중용은 평형을 유지함과 동시에 그 평형은 정지된 평형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지속되는 평형이다. 인생을 살면서 이 세 가지 중용의 원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중용은 모든 개인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수학적인 중간이 아니라 개인의 개별적인 상황을 고려하고 역동적으로 그 기준이 움직이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한 수치이어야 한다. 중용은 이도 저도 아닌 중간의 위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설 줄 아는 진퇴(進退)를 아는 것이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분노할 때 분노할 줄 알고, 슬플 때 울 줄 아는 것이 중용이다. 조직 내에 옳지 못한 결정이 내려질 때 중용을 지킨다고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취하거나 조직의 생존을 위협할 만한 불의에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하는 것 역시 중용은 아니다.
중용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가 시중(時中)이다. 일명 상황(時)의 중(中)이다. 세상은 무한히 변화한다. 그 변화를 인정하고 그 변화에 맞춰 정확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중이다. 중(中)이란 글자 속엔 적중(的中)한다는 의미가 있다. 과녁에 적확히 맞힌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정확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양 병법에서 강조하는 전략은 시(時)와 공(空)이다.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時)에,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한 장소(空)로 공격해야 한다. 이때 강조되는 것이 타이밍(時)이다. 그 정확한 시간을 찾아내는 것이 전략의 가장 중요한 기초다.
‘수시이처중야(隨時以處中也)라!’ ‘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정확한 중을 찾아 처해야 한다!’ 여기서 수시(隨時)는 상황의 변화다. 처중(處中)은 그 상황분석에 따른 정확한 판단과 실행이다. 업무를 처리할 때 상황을 정확히 살펴서 가장 적합하고 효율성 있는 해결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용적 일처리다. 중용은 과학이며 이성이다.
성실은 중용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초
중용의 중요한 개념 중에 또 하나가 성(誠)의 정신이다. 성은 성실이다. 성실은 중용을 지켜주는 든든한 기초다. 해가 뜨고 달이 운행하며 계절이 바뀌는 것은 자연의 성실함이다. 인간은 이 자연의 성실함을 배워야 한다.
쉬지 않고(無息) 운행하는 위대한 성실(至誠)을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고 한다. 고객의 만족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쉬지 않고 성실을 다했을 때 고객은 감동하고 영원한 충성고객으로 남는다. 잠깐은 쉽지만 지속은 어려운 것이다. 100년 기업들을 보면 모두 지성무식의 중용경영철학을 가진 기업들이다. 잠깐 있다가 사라져 가는 기업들은 대부분 성실은 했지만 무식(無息)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식한 기업과 사람이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논어>에서는 군자를 중용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며 소인은 중용에 반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군자(君子)는 중용(中庸)이요, 소인(小人)은 반중용(反中庸)이라!’ 군자와 소인은 지위나 학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중용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에 달렸다는 것이다.
중용철학으로 하루를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침에 가장 적당한 시간에 일어났는가? 식사는 적당히 하였는가? 가족이나 동료와의 관계에서 정확한 중(中)을 찾아냈는가? 오늘 저녁 혹시 중용에 반하는 스케줄은 없는가? 생각해 보면 하루를 중용으로 산다는 것은 보통 정신 차리지 않고는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용은 천하 평정보다 어려워
공자는 중용적 삶의 어려움을 이렇게 강조한다. ‘천하국가도 평정하여 다스릴 수 있고, 아무리 높은 벼슬이라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이라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을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能力)도, 천하의 높은 자리도 사양할 수 있는 의리(義理)도, 시퍼런 칼날을 밟을 수 있는 용기(勇氣)도 중용하기보다는 쉽다는 이 말은 중용의 실천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사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다만 어떤 모습으로 살든 그 삶의 기준은 중용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 얼마나 동의하는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며, 변화하는 상황을 정확히 읽어내고 처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역동적인 변화에 맞춰 정확한 판단과 지속적인 실행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진정한 중용을 실천하는 성공하는 사람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