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연장은 그 자체가 상품화하여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대중들에게 예술의전당의 공연은 그 밖의 공연장에서 하는 공연들보다 작품성과 상관없이 우월하다고 여겨진다. 상품 자체의 가치가 브랜드에 의해 정해지듯, 공연장은 일종의 작품에 매겨지는 브랜드인 셈이다. 그래서 국내 제작사들은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LG아트센터 등 국내 대표적인 공연장을 대관하기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인다.
한정된 공연장을 놓고 경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그에 준하는 공연장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공연장이 모래성도 아니고 하루 이틀 만에 뚝딱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바로 기존의 문화재를 이용한다거나 그 어떤 것도 흉내 내지 못하는 자연 그대로를 공연장으로 이용하는 공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시도되고 있는 고궁 뮤지컬 역시 그러한 시도다.
서울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고궁 뮤지컬’은 현대 도시인들에게 유리되어 있는 고궁을 좀 더 친근한 장소로 만들고, 시대물의 감성을 느낄 수 있도록 역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중에 적합한 작품을 선발해 경희궁 숭정전에서 공연하는 프로그램이다. 경희궁은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고 해서 광해군이 인조의 생부로부터 빼앗아 궁궐을 지은 곳으로 순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다. 광화문과 서대문 사이, 도심 속에 위치해 있지만 시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경희궁이 새로운 공연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초여름 저녁 색색의 조명이 고궁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드라마 <대장금> 각색한 뮤지컬
2010년 첫 작품은 고궁 뮤지컬 <대장금>이다. 경희궁 숭정전의 널따란 앞마당을 무대로 하고 숭정전 앞문을 배우들이 등·퇴장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마당의 양 옆에는 대숲을 만들어 앞마당을 독립된 무대로 만들었다. 고궁 뮤지컬 <대장금>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대장금>을 각색한 것이다.
서장금이 갖은 고생 끝에 상찬나인이 되지만 음모로 쫓겨난 후, 의녀가 되어 임금을 돌보는 대장금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와 같다. TV 드라마에서는 서장금의 성공 스토리를 주축으로 삼았다면, 뮤지컬에서는 그녀가 업을 얻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큰 줄기로 삼는다. 게다가 조광조를 등장시켜 정치적인 갈등을 더욱 부각시킨다. 2007년 TV 드라마를 그대로 축약한 뮤지컬 <대장금>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선보였으나 방대한 스토리를 담아내기에 바빴던 터라 큰 호응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다음해 장소를 고궁으로 옮기고 새롭게 각색해서 올린 고궁 뮤지컬 <대장금>은 내용도 바꿨지만 고풍스러운 운치가 감도는 경희궁 숭정전의 역할이 크게 작용해 2009년에는 더 뮤지컬 어워즈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년엔 하마터면 운치 있게 고궁에서 즐기는 뮤지컬 호사를 놓칠 뻔했다. 문화재 관리국에서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공연 중지를 검토한 것이다. 문화재라는 것이 한 번 훼손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소중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자체로 시간의 때에 덧입혀 잊히는 것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호흡하면서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남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가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서가 아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도 조심스럽게 문화재를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008년 로마의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재이자,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콜로세움에 공연의 막이 올라갔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발레리노 로베르토 볼레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발레 공연을 올린 것이다. 희극 발레인 <돈키호테>와 지리 킬리안의 <작은 죽음> 등, 갈라 공연이었는데 콜로세움에서의 역사적인 공연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공간이 주는 아우라에 힘입어 무지막지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수많은 검투사들이 피 흘려 죽어갔던 콜로세움 무대에서 아름답게 비상하는 발레리노가 주었을 감동은 쉽게 상상할 수 없다. 훼손을 막기 위해 대형 공연장인 콜로세움에 단지 600여 석만 만들어서 60만여원에 달하는 높은 티켓 가격을 책정했다.
자금성에서 올라간 장예모의 오페라 <투란도트>는 어떠한가. 세계화 속에서 미국과 함께 최강국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중국은 자신들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투란도트>를 올렸다. 자금성에 펼쳐진 웅장한 무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국의 위용을 과시하기에 충분했다.
해외에서도 문화재가 공연무대로
일시적인 특별 공연을 올리기도 하지만 베로나의 아레나에서는 매년 여름 오페라 축제를 연다. 수천 년 전 지어진 공연장에서 올라가는 오페라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매해 전 세계 50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몰려, 7000억원의 경제 효과를 창출한다고 한다.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은 지금까지 90여 년간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를 무대에 세우며 베로나의 중요한 관광 수입원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처럼 오랜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여 있는 곳은 문화재 자체가 훌륭한 공연장이 된다. 그러나 그런 문화를 가진 나라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오스트리아의 브레겐츠 오페라 페스티벌은 아름다운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오페라 페스티벌이다. 매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호수 위의 거대한 무대에서 올리는 오페라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도시 전체가 축제로 인해 술렁이고, 전 세계 오페라 애호가들은 매해 8월을 손꼽아 기다린다. 규정된 공연장보다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공간은 도처에 있다. 한 사람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가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거기에 창의력이 가미된다면 우리는 좀 더 신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