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추억으로 언제나 살아 있는
‘청노야’ 숲 마을

길이 점점 좁아진다. 버스 한 대 간신히 지날 만한 너비의 길이 산굽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길가 들꽃이 예쁘게 피었다. 푸른 논 뒤로 호두나무가 숲을 이루고 바람이 불면 호두나무 숲이 일렁인다. 냇가 나무그늘 아래 염소가 우두커니 서있다. 시냇물 소리가 ‘졸졸졸’ 들리고 가끔씩 저 먼 마을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린다. 구름이 해는 가렸지만 후텁지근한 날씨에 연신 땀이 흐른다. 우리는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어 숲실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계곡에서 벌어진 마을잔치
숲실마을(파천2구)은 예닐곱 가구가 사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길도 첩첩이 겹친 산에 가렸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숲실마을은 산속에 고립된 섬 아닌 섬마을이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숲실’, 숲 속에 묻힌 마을이다.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계곡이 범상치 않다. 3~4미터 높이의 폭포도 있고 어른 허리까지 빠지는 웅덩이도 그 아래 있다. 물길도 길고 수량도 많다. 마을 입구에서도 폭포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린다. 그 물소리를 따라 계곡으로 내려섰다. 스무 명 남짓 사람들이 물가에, 물속에 앉아 있다.

“어디서 오셨습니껴?” 사람들 중 나이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묻는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주머니가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히며 국밥 한 그릇 먹고 가라신다. 계곡 한쪽에 가마솥을 걸고 육개장을 끓인다. 그 옆에는 가마솥 솥뚜껑에 삼겹살을 굽고 있다. 그렇게 끓이고 구운 먹을거리를 젊은이들이 나른다. 계곡 옆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다. 아이들은 물에 들어가 장난을 치느라 ‘밥 먹어라’ 외치는 엄마들 말이 들리지 않는다. 계곡 물소리에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흥겨운 소리가 겹쳐져 계곡이 들썩거린다.
예전에는 그랬다. 밥상 차려 놓은 옆으로 누군가 지나면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밥 먹고 가라’고 청했다. 그게 논두렁 밭두렁에 차려 놓은 새참이라도 그랬고 안채 대청마루에 차려 놓은 밥상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라 전체가 못살던 시절 동냥그릇 들고 마을을 떠돌던 이른바 ‘거렁뱅이’가 동냥밥 얻으러 집으로 들어올지라도 우리의 할머니들은 마루 위 밥상 앞에 앉혀 밥그릇 그득하게 밥을 눌러 담아 함께 밥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그 마음을 이 마을에 와서 느낀다.
이제 막 도착한 아주머니와 여학생을 맞이하는 인사소리가 명랑하다. 그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먼 길 달려온 시장기를 달랜다. 반찬은 김치 하나지만 그득한 국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운다. 계곡에 넣어두었던 수박을 꺼내 큰 쟁반에 ‘숭덩숭덩’ 잘라 자리에 낸다. 수박을 건네는 손끝에 “이제 시집 갈 때 다 됐네”라며 말을 얹는다. 그만큼 예뻐지고 많이 컸다는 칭찬인데 대놓고 ‘예뻐졌다’고 하는 말보다 ‘시집 갈 때 다 됐네’라는 말이 오히려 더 정겹다.
계곡에서 나오는 등 뒤에 대고 아주머니는 사진 다 찍고 내려오시란다. 늦게라도 와서 밥 한 끼 먹고 가라는 말씀이다. 낯선 사람의 마음을 한 번에 열게 만드는 그 한 마디 “밥 묵고 가이소”, 도시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 또한 그러지 못했으나 지금 여기 숲실마을에서 내 마음의 빗장이 나도 모르게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숲 속의 집 한 채, 숲실산방
계곡을 나와 마을 위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넨다.
“여기 참 좋지요? 저기 저 위 계곡물은 그냥 떠먹어도 됩니더.”
흐르는 계곡물을 그냥 먹어도 된다는 그곳까지 우리는 걸었다. 중간에 시멘트 도로가 끝나고 흙길이 이어진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숲실산방’, 숲 속의 오두막집이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집과 집 주변 사진을 찍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주변을 살폈다. 닭과 병아리가 종종걸음으로 마당과 밭을 오간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들이 ‘컹컹’댄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뜨거운 열기가 쏟아진다. 흙과 나무로 지은 산채가 주변 자연과 잘 어울린다. 아궁이 입구가 시커멓게 그을렸다. 장작을 때 방을 덥히고 물을 끓인다.
‘숲실산방’이라는 작은 현판이 걸린 본채 옆에 오동나무가 그늘을 만들었다. 그 아래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 사람이 쉬게 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숲 속에 작은 물줄기가 흐른다. 나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계곡은 좁지만 물이 넘쳐흐른다. 나무 그늘에 햇볕 한 번 받지 못한 것 같은 곳에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자랐다. 키 작은 풀들이 이끼 위에 뿌리를 내리고 계곡 물소리에도 간지럽게 흔들린다. 계곡에 발을 담그고 세수를 한다. 시원한 계곡물이 얼굴에 닿자 더위가 ‘싹’ 가신다. 목덜미를 적시고 머리에 물을 뿌리는데 한기마저 든다. 2~3분 있었을까? 발이 시리다. 마음 같아서는 그 계곡물에 온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 계곡 위로 사람 사는 마을이 없고 논밭도 없다. 따라서 물이 맑다 못해 푸르게 느껴진다. 아까 길에서 만난 아주머니 말이 생각났다. “저 위 계곡물은 그냥 떠먹어도 됩니더.” 손으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셨다. 물이 차고 달다. 한 줄금 땀 흘린 뒤라서 그랬을까, 마음 속 찌든 때마저 씻어주는 느낌이다.
숲실산방으로 올라오니 주인아주머니가 콩국수를 내오신다. 막 점심을 드시려고 했던 차에 우리가 그곳을 방문했던 거였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계곡으로 내려간 사이 두 사람 분량의 국수를 더 끓이신 거다. 오동나무 그늘에 앉아 계곡 물소리 들으며 먹는 콩국수는 음식이 아니라 여름 한 철 거뜬히 날 수 있는 보약 같았다.
다시 돌아온 고향, 그 푸른 품에 안겨 사는 사람
숲실산방 주인아저씨 고향이 숲실마을 부근이다. 젊어서 도시로 나가 살다 고향 자연의 품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생활은 끝없는 경쟁 그 자체였다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시는 아저씨의 말 속에 당시 치열했던 삶의 입김이 묻어난다.
남부럽지 않은 도시 생활을 접고 자연과 벗하며 살고 싶은 마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짬날 때마다 아저씨는 전국의 숲을 떠돌았다. 풍경 좋고 숲 좋은 그 어떤 곳도 마음에 들지 않던 아저씨 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이 지금 숲실산방이 있는 이 자리였다.
처음에는 황무지였다. 숲이 우거지고 풀이 허리만큼 자라나 길도 없었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 살고픈 아저씨의 마음에 이곳이 자리 잡은 것이다.
가족들을 모아놓고 그래프를 그려가며 인생계획을 설명할 정도로 꼼꼼한 아저씨였다. 그 인생계획대로 아저씨는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으로 내려와 길을 내고 집터를 다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어려 아주머니는 아이들 곁에 있었고 아저씨만 이곳으로 내려와 살았던 것이다.
처음에 이곳에 내려와 개집 하나 만들고 이틀을 드러누워야 할 정도로 몸이 좋지 않았던 아저씨다. 자신의 인생 제2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산을 오르내리고 숲 속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강도 좋아졌다.

군에서 배운 중장비 기술이 이렇게 큰 도움이 될 줄 몰랐다. 아저씨는 작은 포클레인을 장만해서 일을 했다. 황무지가 집터로 변하고 길로 바뀌었다. 지금의 숲실산방 본채와 민박집으로 사용하는 사랑채가 완성된 것은 2000년이었다. 1997년부터 3년 동안 터를 닦고 집을 지은 것이다. 집이 완성되면서 아저씨의 제2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애초에 생각했던 귀농의 계획대로 아저씨는 오미자, 오가피, 호두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유치원 다니던 막내가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그때서야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불러와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옛 일을 돌이키는 아저씨 얼굴에 묘한 웃음이 번진다. 늦가을 흰 눈 펑펑 쏟아지는 산골짜기에 혼자 있을 때 유치원 다니는 막내 얼굴이 아른거려 한때는 꿈을 포기할까 고민도 했었단다.
오동나무 그늘에 앉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감자를 삶아 내오신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숲속의 나무꾼과 선녀 같았다. 아주머니가 물끄러미 계곡을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아저씨가 “집사람은 여기에 이렇게 앉아 저 아래 숲과 계곡을 보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그냥 좋아요”라 한다. 떨어져 살아야 했던 긴 세월, 혼자 아이들을 키워야 했던 시절의 고생은 봄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다.
고향 같은 자연과 고향사람 같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알려진 여행지는 아니지만 그 어떤 여행에서도 느낄 수 없는 훈훈한 정은 속도와 경쟁으로 찌든 도시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알고도 행하지 못하고 모르고 저지른 사소한 잘못 하나까지 반성하게 만드는 일종의 ‘고해성사’이기도 하며, 희미한 추억을 되살려 새 삶을 살게 하는 희망의 불씨가 될 것이다. 오후의 햇볕이 기우는 사이 이곳에 정이 들었나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자리를 일어나 숲실산방을 나서는데 닭들이 먼저 알고 내 뒤를 ‘종종종’ 따라온다. 다시 오라는 인사 같았다.
여|행|길|라|잡|이
● 주변여행지 및 먹을거리
* 직지사
숲실마을에서 약 44㎞ 떨어진 곳에 직지사가 있다.(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216번지)
직지사는 황악산(1111m) 자락에 있는 고찰로 신라 눌지왕 2년(418)에 아도 화상이 창건했다. 주차장부터 절까지는 아름드리 소나무 길이다. 그 길에서부터 여행자의 마음이 싱그러워진다. 절집도 예쁘지만 문살이 화려해 눈길을 끈다. 보물로 지정된 탑이 정갈하고 단아하다. 절집 담과 곳곳에 놓인 아기자기한 소품까지 잘 살펴보려면 아주 천천히 걸어야 한다.
* 월류한천 도리뱅뱅이와 매운탕
직지사에서 약 25㎞ 떨어진 곳에 ‘월류봉(400m)’과 ‘한천’이 흐르는 풍경 좋은 곳이 있다.(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리) 월류봉은 한천8경 중 제1경이며 월류봉 아래 큰 냇물 ‘초강천’이 흐른다. 이 봉우리와 물길을 두고 ‘월류한천’이라고 부른다. ‘달도 걸려 머물다 가는 봉우리(월류봉·月留峯) 아래 맑고 시원한 물길(한천)’이라는 뜻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작은 정사를 짓고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를 기리기 위해 ‘한천정사’(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8호)를 지었다. 이런 경치와 함께 즐기는 여름의 맛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리뱅뱅이’와 ‘민물매운탕’이다. 도리뱅뱅이는 ‘피라미양념튀김’으로 고소하며 양념의 매콤한 맛이 어우러져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민물매운탕에 쓰이는 재료는 잡어, 메기 등 여러 가지인데 입맛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월류봉’을 바라보며 그 옛날 여름 냇가의 ‘천렵’ 맛을 맛볼 수 있다.
● 여행정보
* 가는길
<자가용> 경부고속도로 - 김천 IC - 3번국도를 타고 지례·거창 방면 - 지례 태광주유소 앞에서 우회전 - 부항댐 공사 현장을 지나서 - 파천2리 숲실마을 - 숲실마을에서 숲실산방까지 약 800m.(내비게이션은 김천시 부항면 파천리 818번지)
·숲실마을에서 직지사 가는 길(약 44km) : 숲실마을에서 나오다 903번도로를 만나면 좌회전 - 안간리 - 마산리 - 901번도로 만나면 좌회전 - 궁촌리 - 상촌삼거리 우회전 - 매곡삼거리 우회전 - 복전교 건너 바로 우회전 - 대항면사무소 - 직지사우체국 - 직지문화공원 - 직지사
·직지사에서 월류봉 가는 길(약 25km) : 직지사 - 대항면사무소 - 덕천사거리에서 4번국도 만나면 좌회전 - 황간 방향 - 황간교 - 황간교 삼거리에서 우회전 - 다리 하나 건너 황간초등학교 - 남성삼거리에서 좌회전 후 약 200m 앞에서 우회전 - 신흥교 - 원천교 건너 월류봉(한천가든) 이정표 따라 좌회전
<대중교통> 버스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김천. 차가 드물다. 약 3시간 안팎 걸림.
기차는 서울역-김천역. 김천역 광장으로 나와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서 왼쪽에 있는 터널을 지나 길로 내려와서 오른쪽 방향으로 가다가 큰길 나오면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김천버스터미널(고속, 시외, 시내버스가 한 곳에 있다) 도착.
현지교통은 김천버스터미널에서 숲실마을(파천2구)까지 가는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는 오전 오후 각 1대씩 있다.(정확한 시간은 확인 요). 아니면 대야2리 가는 차를 타고 숲실마을 입구에서 내려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숙박과 먹을거리
숲실마을에는 가게와 식당이 없다. 숙박시설도 숲실마을 위쪽 약 800m 거리에 있는 숲실산방 한 곳뿐이다. 김천에서 먹을 것을 준비해 숲실산방에서 숙박해야 한다.
문의 : 김천 시내버스 054-432-7601~2
숲실산방 054-437-8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