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세스 혁신으로 효율성 배가 …
“자동화하지 말고 없애라”

챔피와 해머가 토요타 공장 방문에서 얻은 큰 깨달음은 ‘프로세스(process)’의 중요성이었다. 프로세스란 기업이 고객들에게 가치 있는 결과를 제공하는 활동, 혹은 작업들의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컨대 고객이 특정 상품을 주문하면 대금 결제, 상품 포장, 상품 배달, 애프터서비스 등의 활동으로 구성된 프로세스가 작동한다. 주문한 상품을 고객의 손에 전달하는 것은 이러한 프로세스가 만들어 낸 최종적인 가치일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대부분의 기업들이 개별 작업이나 활동들만 관리하다 보니, 정작 고객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체 프로세스는 전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보험회사의 경우 고객에게 보험 관련 서류를 하나 발급하는 데 무려 24일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 서류를 작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0분에 불과했다. 원인은 이 서류가 실제 고객에게 발급되기 위해서는 무려 17개의 서로 다른 부서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프로세스 혁신, 즉 리엔지니어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 보험회사의 고객 만족도나 재무적 성과를 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리엔지니어링은 비용, 품질, 서비스, 속도와 같은 고객들이 중시하는 핵심적인 성과 지표 측면에서 극적인 성과 향상을 위해 기업 업무 프로세스를 다시 생각하고 근본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을 프로세스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새로운 혁신의 기회를 찾자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마침내 1990년 이들이 창시한 리엔지니어링의 핵심 개념을 소개하는 논문이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소개되었다. 논문의 부제는 ‘자동화하지 말고 없애라(Don’t Automate, Obliterate)’였다. 이때부터 미국 기업을 중심으로 서서히 리엔지니어링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리엔지니어링 기업 혁명
1990년 논문으로 처음 소개된 리엔지니어링은 1993년 <리엔지니어링 기업 혁명(Reengineering the Corporation)>이라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출간되면서 단번에 리엔지니어링 열풍을 일으켰다. 많은 기업들이 앞 다투어 리엔지니어링 개념을 경영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리엔지니어링이 이처럼 짧은 기간에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을 일으킬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정보 기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리엔지니어링을 처음 소개한 논문의 부제가 ‘자동화하지 말고 없애라’였던 점을 상기해보자. 사실 1980년대 컴퓨터로 상징되는 정보 기술은 미국의 기업 경영자들에게 천덕꾸러기 혹은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다. 197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정보 기술은 한때 미래 기업 경영의 희망이고 상징이었다. 정보 기술이 기업 경영의 전반적인 효율성을 높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경영자들이 늘 고민하는 의사결정의 질을 획기적으로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보 기술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예상보다 미미했고, 이로 인해 1980년대 경기 불황과 함께 정보 기술은 돈만 축내는 고철 덩어리 취급을 받았다. GM은 생산성 향상과 노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명분하에 공장 자동화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지만, 경쟁사인 도요타에 참패하고 말았다.
이때 챔피가 제시한 해법이 바로 ‘없애라(obliterate)’였다. 기업 내 존재하는 복잡한 작업 프로세스를 없애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최신 정보 기술을 접목해봐야 큰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 핵심 요지였다. 당시 미국 경영자들은 정보 기술을 업무 자동화를 위한 수단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 기술의 진정한 힘은 낡은 프로세스를 보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낡은 규칙을 깨뜨리고 새로운 방식을 창조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불합리한 업무 프로세스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아무리 최신 정보 기술을 도입해도 성과가 창출될지 만무했다. 리엔지니어링을 통해 프로세스 재설계를 한 후 정보 기술을 도입할 때 비로소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물론 정보 기술이 리엔지니어링의 유일한 필수 요소는 아니다. 하지만 리엔지니어링에 반드시 필요한 기반임에는 틀림이 없다. 프로세스 재설계라는 리엔지니어링의 이상을 최첨단 정보 기술이 기업 현장에서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리엔지니어링은 컴퓨터 혹은 정보 기술의 효과에 대한 경영자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정보 기술이 돈만 먹는 고철덩어리에서 혁신의 총아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현대 기업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전사적 자원관리(ERP), 고객관계관리(CRM), 공급사슬관리(SCM) 등 최신 경영혁신기법도 근본적으로는 모두 리엔지니어링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리엔지니어링은 프로세스 관점으로 기업과 조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경영자들에게 제공했다. 앞서 설명한 보험회사의 사례처럼 대부분의 기업들은 개별 과업을 달성하는 데 치중했기 때문에 기업 내부 조직들은 극단적인 부문화(departmentalization)와 전문화(specialization)에 기인한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흔히 리엔지니어링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전문화나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Taylor)의 과업(task) 관리와 비교된다. 회사 업무를 전문화된 몇 가지 과업으로 보는 것과 몇 개의 프로세스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관점이다. 프로세스의 설계는 모든 개별 단위 업무가 총체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협력해야 하는 방법을 규정한다. 즉, 프로세스는 정확히 어떤 일을, 어떤 순서로, 어디에서, 누가 해야 하는지를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리엔지니어링에 성공하면 몇 개의 과업들이 하나로 통합될 수도 있다.
IBM크레디트(IBM Credit)의 사례를 살펴보자. IBM크레디트는 IBM이 판매하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에 자금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리엔지니어링 전에는 고객들의 융자 신청을 처리하는 프로세스는 5단계로 이루어졌으며 평균 6일, 최장 2주일이 소요되었다. 이 중 대부분의 시간은 서류를 한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넘겨주는 데 소비된 것이다.
하지만 리엔지니어링에 의한 프로세스 개선을 통해 6일씩 걸리던 소요시간을 4시간으로 단축할 수 있었고 처리되는 거래 수는 100배나 증가하였다. 업무 프로세스 전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처리시간 90% 단축, 생산성 100배 증가라는 획기적인 성과 향상을 이룩했던 것이다. IBM크레디트는 특정 업무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 아니라 전체 프로세스를 개선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가능했다.
또한 리엔지니어링을 통한 프로세스 재설계는 순차적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고정관념에서 경영자들을 해방시켰다. 예컨대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사람 1은 과업 1을 완성해서 과업 2를 수행하려는 사람 2에게 결과를 넘겨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리엔지니어링에 의하면 과업 1과 과업 2는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과업을 수행하는 순차적인 순서는 작업의 속도를 낮추는 인위적인 순위에 불과했다. 병렬적인 일처리를 통해 많은 작업들이 동시에 행해질 수 있으며, 프로세스의 앞 단계와 뒤 단계 사이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X-엔지니어링 기업 혁명
과업의 전문화는 19세기 이후 기업을 성장시킨 중요한 경영 원리였다. 그러나 지나친 전문화는 고객 입장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를 만들어냈다. 결국 리엔지니어링은 프로세스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개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고객이 원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소중한 교훈을 남겨 주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챔피가 제안한 리엔지니어링 기법이 너무나 유행처럼 번지자, 리엔지니어링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효과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건강에 만병통치약이 없듯이 혁신에도 만능기법은 없다. 당연히 리엔지니어링이 기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엔지니어링 혹은 프로세스 혁신의 중요성이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리엔지니어링 열풍 후 10년이 지난 2002년 챔피는 ‘X-엔지니어링(X-engineering)’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들고 다시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사실 리엔지니어링이 발표된 1990년대 이후 정보 기술 분야는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인터넷의 확산은 기업 활동은 물론 사람들의 생활 방식 자체를 변화시켰다. X-엔지니어링은 이처럼 인터넷과 연결된 최신 정보 기술의 특성과 리엔지니어링의 기본 원리를 결합한 디지털 시대의 리엔지니어링이라고 볼 수 있다.
X-엔지니어링의 핵심 내용은 정보 기술을 활용해 인터넷의 특성인 기업 간 관계, 조직 간 경계를 뛰어넘는 기존 프로세스의 혁신과 새로운 프로세스의 창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과거 리엔지니어링이 기업 내 프로세스의 혁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X-엔지니어링은 기업 내부는 물론 기업 외부를 포괄한 프로세스 혁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때 X는 조직간 경계를 넘나든다는 ‘cross’라는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챔피는 X-엔지니어링을 통해 자사는 물론 고객, 공급자, 협력자 등 외부 이해 관계자들과의 프로세스를 모두 혁신함으로써 업계 전체를 재편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챔피는 X-엔지니어링의 세 가지 요소로 이미 리엔지니어링에서 강조했던 프로세스 외에 핵심 제안(proposition)과 참여(participation)라는 개념을 들었다. X-엔지니어링은 기업 혼자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이해 관계자들과의 적극적인 참여는 물론 업계 전체를 포괄해서 고객에게 새롭게 제안할 수 있는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했던 것이다.
X-엔지니어링이 성공한 대표적인 예로 이베이(eBay)를 들 수 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경매 사업은 상업적으로 침체기에 있었으며, 주로 고가의 예술 작품이나 주택 경매, 저가의 벼룩시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베이는 놀랄 만큼 짧은 기간에 업계를 변화시키고 사업을 확장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온라인 거래 공동체를 형성했다. 본질적으로 이베이는 판매자와 구매자를 이어줘 거래를 맺게 해주는 인터넷 광장이다. 이베이 자체는 확실히 중개인 역할만 하기 때문에, 물자 조달이나 판매, 발명, 주문, 선적 등의 부담이 전혀 없다. 따라서 약간의 중개료를 받고도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발한 프로세스 덕분에 이베이는 확실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닷컴 기업의 거품이 빠지고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인터넷과 정보 기술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과열 투기가 잘못된 것이지 인터넷 기술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업이 인터넷과 정보 기술을 활용해서 혁신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스마트폰 열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보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전작인 리엔지니어링보다는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X-엔지니어링은 정보 기술을 통해 개별 기업은 물론 업계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미래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시도, 새로운 모델
2002년 이후 한동안 뜸했던 챔피는 컨설팅 회사 CEO에서 은퇴한 후 다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프로세스 혁신에 관한 전도사 역할도 2010년 신간 <의료 산업의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 Health Care)>을 출간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민간 부문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챔피의 열정과 노하우가 이제 공공 부문에 접목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의료 산업이야말로 기술과 프로세스와 사람이 만나는 접점에서 모든 일들이 처리되는 현장이며, 리엔지니어링 개념을 도입해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잠재적 산업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출간된 두 권의 저서와 향후 출간될 한 권의 책 등 자신의 새로운 저서 시리즈물을 기획하고 저술하고 있다. 2008년 <아웃스마트(Outsmart!)>, 2009년 <착한 소비자의 탄생(Inspire!)>이라는 책은 이미 출간되었으며, <딜리버(Deliver!)>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저서의 출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출간된 두 권의 책에서 알 수 있듯이, 챔피는 30년이 넘는 자신의 컨설팅 경험을 집대성해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창안해 성공한 기업들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기업들은 덩치 큰 거대 기업보다는 재기 넘치는 강소 기업과 기존의 사업 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창조한 기업들이 많았다. <아웃스마트>가 독특한 아이디어를 실천한 기업들을 주로 소개했다면, <착한 소비자의 탄생>은 ‘진정성’을 새로운 기업 경쟁력의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진정성이란 제품이나 서비스 판매를 넘어서는 고결한 소명의식을 포함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 출간되지 않는 세 번째 저서 <딜리버>에서는 아주 단순하고 흠잡을 데 없으며 엄청난 속도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기업들이 소개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