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산탄데르 은행(Banco Santander)은 초고속 성장 은행이다. 25년 전만 해도 세계 152위에 그쳤던 산탄데르는 1990년 이후 무려 130여 건의 M&A를 통해 2009년 기준 세계 5위(시가총액 기준)의 대형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산탄데르의 성장사
산탄데르는 국내 시장에서 최고 은행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한 뒤 언어·문화적으로 익숙한 남미 시장과 유럽 시장을 단계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을 통해 세계적인 은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산탄데르의 성장사는 곧 M&A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산탄데르의 성장은 에밀리오 보틴(Emilio Botin) 회장이 취임한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줄곧 산탄데르만의 독자적인 가치 창출 역량을 강조했으며, M&A를 통한 규모의 경제와 경쟁력 강화를 중요한 성장전략으로 삼았다. 그렇다고 국내 시장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무턱대고 M&A부터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산탄데르는 본격적으로 M&A를 수행하기에 앞서 대고객 서비스의 질적 개선 및 혁신적인 상품 출시 등을 통해 산탄데르만의 고유한 가치 창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1단계 : 국내 시장 평정기
1989년 산탄데르는 스페인 최초로 ‘슈퍼통장(Supercuenta)’이라는 상품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오늘날 증권사의 종합자산관리계좌(CMA)와 유사한 상품으로 수시입출금이 가능하며 고금리 혜택까지 제공해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슈퍼통장의 출시로 인해 산탄데르의 시장 점유율은 8%에서 14%로 크게 확대되고 시장 내 입지가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산탄데르는 1991년엔 Superfondos(뮤추얼펀드), 1993년엔 Super Hipoteca(모기지) 등 혁신적인 상품을 잇달아 출시하고, 고객 서비스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 노력 등에 힘입어 스페인의 주요 은행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렇게 꾸준하게 성장해오던 산탄데르는 1994년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막대한 부실 누적으로 감독 당국에 의해 경매에 붙여진 당시 스페인 1위 은행, 바네스토(Banesto) 은행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산탄데르는 국내 5위에서 스페인 선두 은행으로 부상하게 된다.
2단계 : 중남미 시장 진출로 외형 확장기
스페인 국내에서 선두 은행으로 자리매김한 산탄데르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래의 성장 동력을 해외 시장에서 찾기 시작한다. 스페인 은행 산업 내 경쟁이 점점 더 심화되고 수익성이 급감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 정부가 이자율 상한제 시행 및 합병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 스페인 은행 산업이 성장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산탄데르는 금융 상품이나 서비스 수준은 낮으나 성장 잠재력이 높고, 문화적, 언어적 배경이 유사한 중남미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게다가 당시 중남미 국가들은 금융개방정책과 민영화를 꾀하고 있어 중남미 시장은 산탄데르에게 최고의 성장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산탄데르는 친숙한 지역인 중남미 시장에서 자신들이 강점을 가지고 있었던 리테일 영업부문을 공략함으로써 해외 진출에 대한 리스크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남미 지역 진출과정에서 산탄데르는 부족한 영업기반 확대를 위해 다수의 M&A를 시도했다. 1996년 베네수엘라의 베네수엘라 은행(Banco de Venezuela) 인수를 시작으로 2년간 5개 국가(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에서 6개의 대형 은행을 인수하면서 남미 지역에서 확고한 영업기반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1990년대에만 산탄데르는 남미 지역 10개국, 30개 이상의 주요 은행을 인수했고 그 외 신용카드사, 소비자 금융, 보험 등도 함께 인수함으로써 중남미 최대의 은행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남미 지역에서 산탄데르는 HSBC나 CITI를 능가하는 입지를 확보하고 있다.
3단계 : 영국 등 유럽 시장 장악기
1998년 남미 지역에 경제 위기가 발생하자 주로 이 지역 위주로 해외 진출을 했던 산탄데르는 수익이 감소되고 남미 지역에 대한 익스포져 문제가 대두되면서 위기에 부딪히게 된다. 경영 위기에 부딪히게 된 산탄데르는 이를 계기로 기존의 성장전략을 수정하게 된다. 산탄데르는 익숙했던 남미 지역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에서의 성장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다시 한 번 자국 내 M&A로 위기를 돌파하는 전략을 활용한다.
1999년 산탄데르는 위기의 돌파구로서 당시 스페인 3위 은행이었던 Banco Central Hispano(BCH)와의 합병을 단행한다. BCH와 합병 당시 산탄데르는 스페인 내 2위 금융그룹이었으나 BCH와의 합병을 통해 스페인 1위 은행의 입지를 굳힘과 동시에 유럽 3대 은행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산탄데르의 BCH와의 합병 취지는 “규모의 경제가 은행의 경쟁력 및 효율성 제고에 결정적 요소”이고 “유럽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국내 시장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경영신념에 잘 나타난다.
자국에서 입지를 공고히 한 산탄데르는 이후 영국으로 눈을 돌린다. 2004년 영국의 6위 은행이었던 Abbey National Bank(이하 에비 은행)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산탄데르와 에비 은행의 합병은 당시 유럽 은행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국경 간 인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탄데르는 에비 은행과의 합병으로 남미 지역의 익스포져 비중을 축소하고 이익의 변동성을 감소시킬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전보다 지리적으로 훨씬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를 갖춘 글로벌 플레이어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2007년 들어 산탄데르는 Fortis, RBS(Royal Bank of Scotland)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ABN AMRO를 인수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확산되고 있던 2008년에는 RBS로부터 유럽 부문 소비자금융사업부를 인수했고 같은 해 영국 모기지 업체인 Brandford & Bingley와 Alliance & Leicester를 인수함에 따라 영국 대출 시장의 13%를 차지하게 됐다.
산탄데르의 성공비결
130여 건의 M&A에 성공한 산탄데르는 고객 수를 1985년 75만 명에서 2009년 9000만 명으로 늘렸고, 세계 152위의 작은 은행에서 세계 5위의 대형 금융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탄데르의 성공비결은 단순히 M&A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산탄데르의 성공비결은 M&A에 대한 명확한 원칙하에서 외적인 성장 추구, 끊임없는 조직의 효율화 추구, 매트릭스 조직을 통한 통합관리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잘 하는 사업과 잘 아는 지역에 집중
산탄데르는 수많은 M&A를 수행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먼저 산탄데르는 잘 아는 지역에 우선적으로 진출했다. 앞서 기술한 산탄데르의 성장경로를 살펴보면 남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영업을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산탄데르가 중남미 지역에 진출할 당시 중남미 시장은 성장 잠재력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서구적 문화가치를 보유하고 있었고, 스페인어 혹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어 언어적 배경도 유사했다.
또한 산탄데르는 핵심 사업 분야인 소매금융과 소비자금융에 집중했다. 이는 보틴 회장이 늘 강조하는 ‘잘 할 수 있는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라’는 경영철학을 따른 것이다. 구태여 선진국 은행들이 강점이 있는 투자은행을 공략하기보다는 잘 아는 분야인 리테일 부문 중심의 진출 원칙을 고수했다. 산탄데르는 지금도 전체 수익의 약 80%를 리테일 부문에서 창출하고 있다.
M&A 이후 내부 효율성 제고와 조직 통합
산탄데르는 M&A 추진 후 통합과정에서 먼저 일상적인 비용 절감이 가능한 부문이 있는지를 분석한다. 우선 산탄데르는 IT 통합 이전에 프로세스나 조직구조, 일반 경비 등에서 즉각적으로 비용 절감이 가능한 부분을 찾아 최대한 비용 절감을 추구한다. 그런 다음에 인수한 회사의 IT 플랫폼을 본사의 IT 플랫폼으로 전환한다. 전 계열사가 동일한 IT 플랫폼을 도입하면 정보의 공유 및 실시간 리스크 관리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막대한 규모의 비용 절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수한 회사의 비용 효율성이 어느 정도 개선되면 산탄데르는 인수한 금융기관에 교육 투자를 한다. 전 세계 직원이 가치와 전략을 공유함으로써 그룹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본사가 위치한 스페인 산탄데르시티에 있는 교육센터에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2009년에만 교육센터에서 약 12만7000여 명이 연수를 받았으며 이러한 교육과정에만 약 9300만유로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산탄데르는 특히 M&A 이후 현지 인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산탄데르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본사의 노하우를 해당 회사에 이전하고, 현지 인력들이 향후 그룹 내 문화 통합에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산탄데르는 높은 비용 효율성을 유지하고 있다. 산탄데르의 비용 효율성 지표(cost to income ratio)를 살펴보면 1999년 66.1%에서 2007년 45.5%로 지속적으로 개선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07년 경쟁 은행인 JP모건체이스와 BOA(Bank of America)의 비용 효율성 지표는 62%, 81%로 산탄데르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매트릭스 구조로 유연하고 통합된 조직관리
산탄데르가 효율성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룹 전체가 동일한 IT 플랫폼을 구축하고, 오퍼레이션 통합 등 철저한 중앙집중형 관리체계를 통해 비용 절감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지만, 이러한 통합관리의 핵심에는 또한 매트릭스 조직이 자리하고 있다. 산탄데르는 매트릭스(matrix) 조직을 통해 전 세계 700여 법인 및 15만 명의 임직원을 관리하고 있다. 산탄데르의 각 사업부문(지역부문, 상품부문)은 산탄데르 본부의 총괄지시를 따르지만 개별 지역의 법인 수준에서는 현지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산탄데르가 매트릭스 조직체계를 처음 도입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1990년대 말 산탄데르는 연속적으로 20여 개 은행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통제가 어려워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은행별 CI(Corporate Identity), 점포 레이아웃, IT 플랫폼 등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던 중 1999년 크고 작은 사고가 터지더니 2002년 남미에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은행별 리스크 관리 시스템에 문제가 나타난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틴 회장은 매트릭스 조직의 도입을 제안한다. 오늘날 산탄데르의 조직구조는 지역과 사업 부문으로 구분한 매트릭스 조직이다. 이를 통해 인수한 은행을 기존 은행과의 인위적인 합병 없이 해당 지역 부문에 편입시키고 기타 후선 업무만을 산탄데르 본사에서 조정하는 방식으로 인수 후 통합작업을 수행해왔다.
산탄데르는 개별 법인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조직체계에서 벗어나 매트릭스 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법인과 광범위한 지역들을 유기적으로 통합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각 지역별로 고객 특성 혹은 지역 특성에 따라 상품 개발 및 영업 등에 있어서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산탄데르는 매트릭스 조직체계를 통해 전 세계 직원이 가치와 전략을 공유하여 개별회사가 아닌 원 펌 뷰(one firm view)를 실현함으로써 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산탄데르는 M&A를 통한 외적 성장과 함께 조직의 내부 효율성을 동시에 달성함으로써 성장과 함께 가치를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장 전략과 경영 역량이 있었기에 다른 글로벌 은행들과 달리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타격을 거의 입지 않고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산탄데르의 성공사례가 국내 은행에 주는 몇 가지 시사점이 있다. 현재 국내 은행 산업에서는 대형화를 통한 글로벌 진출이 성장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글로벌 진출을 추진하기에 앞서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고유한 가치 창출 역량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첫 번째다. 또한 글로벌 진출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라도 장기적인 성장 경로와 명확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자신만의 원칙을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M&A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한 이후 그룹 전체가 전략적으로 비용을 절감하고, 구성원들이 가치와 전략을 공유할 수 있는 조직 운영체계 및 인력 육성 방안 등이 중요하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