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중시 ‘소통의 CEO’
건설 패러다임 전환 앞장서다
CEO 경력 4년차에 벌써 ‘경영의 달인’ 평가 받아
혁신·변화 통한 ‘선진국형 디벨로퍼’ 도약 새 비전
요즘 국내 건설업계에서 가장 바쁜 CEO는 단연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일 것이다. 지난 6~7월 그의 동선만 보더라도 카자흐스탄, 싱가포르, 쿠웨이트 등 한 주가 멀다 하고 외국 출장을 다녀왔다. 신사업 진출 모색, 기공식 참석, 수주 계약 체결 등 출장 업무 내용도 굵직굵직하고 다양하다. 현대건설 측에 따르면 김 사장은 2009년 3월 취임 후 17회에 걸쳐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유럽 등 세계 35개국을 누볐다고 한다.
이처럼 글로벌 경영에 여념이 없는 김중겸 사장이 잠깐 짬을 냈다.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건설 사옥 집무실에서 그를 만난 날은 우연찮게도 2010년 상반기 경영실적이 발표된 날이다. 상반기 기준으로 사상 최대의 순이익 달성과 10조원이 넘는 신규 수주. 기분 좋은 성적표를 받아 든 김 사장의 구릿빛 얼굴은 환한 미소와 성취감으로 가득했다.
“현대건설 사장으로 취임해서 단기 실적보다는 회사의 미래 가치를 제고하는 데 역점을 둬 왔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단기 실적도 올라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부터 변화와 혁신을 많이 주문했는데 임직원들이 잘 따라와줘 고마울 따름입니다.”
현대건설은 올해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10·20 클럽’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매출에서 10조원 이상, 수주에서 20조원 이상의 실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아직 어떤 업체도 밟아보지 못한 고지이지만, 최근 추세로 보아 현대건설이 그 첫 번째 영예를 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게 회사 관계자의 전망이다.
일종의 ‘CEO 효과’라고 해야 할까. 현대건설은 김중겸 사장이 취임한 첫 해부터 무섭게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각종 실적 지표를 근거로 살펴보자. 지난해 현대건설은 매출액 9조2786억원, 순이익 4558억원을 달성했다. 이는 회사 역사상 최대의 실적이다. 신규 수주 규모도 무려 15조6996억원에 달했다. 전체 수주 잔고는 47조원을 넘었다(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수주 잔고는 52조6088억원을 기록했다. 약 5년 치 이상의 일감을 이미 확보해둔 셈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현대건설은 지난해 7월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시공능력 평가에서 6년 만에 1위 자리를 되찾는 기쁨을 맛봤다. 시공능력 평가는 건설업체의 종합적인 역량을 가늠하는 가장 대표적인 지표다. 현대건설은 42년 연속으로 시공능력 평가 1위를 유지하다가 2004년 처음 왕좌를 내놓은 바 있다.
“현대(건설)라는 조직이 대단한 조직입니다. 방향을 잡아주니까 금세 실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세요. 저는 그저 ‘연출자’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출연진’이 신나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 분위기를 마련하는 데 중점을 뒀을 뿐이지요. 말하자면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는 ‘에너자이징(energizing)’을 했다고 할까요.”
김중겸 사장은 겸손했다. 자신이 CEO에 오른 이후 현대건설의 실적이 놀랍게 좋아졌지만 그 대부분의 공을 주저 없이 임직원에게로 돌렸다. 기업의 성과에서 CEO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막 꺼내려던 찰나,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업 성과 95%는 CEO와 임직원 소통에서
“저는 CEO가 회사에서 하는 역할은 5% 정도라고 봅니다. 나머지 95%는 임직원들의 몫이에요. 다만 그 95%를 제대로 움직여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바로 CEO가 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CEO가 임직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도 ‘소통 점검’이었어요.”
그는 평소 “기업의 전부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경영철학의 가장 기본이기도 하다. 사실 경영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말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김 사장은 실행을 중시하는 행동파다. “노잉(knowing)과 두잉(doing)은 다르다”는 신념의 소산이다. 그는 소통과 격려를 위해 수시로 ‘직원들 속으로’ 들어간다.
김 사장은 취임 후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재임 기간 동안 모든 직원과 밥 한 끼 정도는 먹겠다”는 게 그것이다. 스스럼없이 만나 스킨십을 나누면서 직원들과 소통하고 사기를 북돋아주겠다는 마음이다. 실제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직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이른바 ‘CEO 조찬간담회’다.
‘책 읽기’도 그가 중시하는 소통 방식의 하나다. 그는 독서를 매우 즐기는 경영자다. 워낙 바쁜 자리에 있다 보니 느긋하게 책을 읽지는 못하지만 외국 출장을 떠날 때는 반드시 책 네댓 권을 챙겨간다. 비행기 안에서 독서를 하기 위해서다. 물론 단지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임직원들에게 나눠줘 교훈과 아이디어를 공유한다.
“신입사원 시절이었어요. 부장님이 어느 날 영어 원서를 한 권 주시더군요. 저는 고민을 많이 했죠. ‘도대체 왜 내게 이 책을 줬을까? 번역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독후감을 쓰라는 것일까?’ 결국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자네가 느낀 것과 내가 느낀 것을 나눠보자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임직원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도 바로 ‘화두’를 던져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한 겁니다.”
“담을 치는 자 망하고, 허무는 자 흥한다.”
김 사장의 ‘독서경영’은 현대엔지니어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2007년 1월 현대건설 계열사인 현대엔지니어링 사장에 취임하면서 처음 CEO가 됐다. 건설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게 플랜트, 발전, 환경 사업 등 엔지니어링 분야는 낯선 영역이었다. 그뿐 아니라 당시 현대엔지니어링은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해외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초보 CEO 김 사장은 책을 들었다. 지혜와 영감, 방법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만든 비전은 책을 통해 임직원들과 공유했다.
그의 말이다. “가령 <대국굴기>에서는 ‘담을 치는 자는 망하고 허무는 자는 흥한다’는 교훈을 새겼고,
독서를 통한 소통과 공감, 그리고 비전 공유를 바탕으로 모든 임직원이 하나가 된 덕분일까. 현대엔지니어링의 실적은 순식간에 치솟았다. 2006년 현대엔지니어링의 매출액은 2400억원이었다. 그런데 김 사장 취임 첫 해인 2007년 370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이듬해인 2008년에는 7400억원으로 수직 상승했다. 불과 2년 만에 매출액이 3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외형 성장뿐 아니라 수익성도 훨씬 좋아졌다. 영업이익은 2006년 180억원에서 2008년에는 900억원으로 증가했다.
현대엔지니어링 시절의 탁월한 성과는 그가 현대건설 CEO로 선임되는 데도 결정적 디딤돌이 됐다. 물론 그는 주변의 평가와 기대에 100% 이상으로 부응하고 있다. 이제 CEO 경력이 4년차에 불과한 그를 가리켜 ‘경영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좋음은 위대함의 적이다(Good is the enemy of Great)’라는 말이 있다. 세계적인 경영 석학 짐 콜린스의 역저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단계가 되면 그 자리에 안주하기 쉽다는 점을 경계하는 명언이다. 김중겸 사장도 이런 진리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회사의 ‘현재 가치’보다 ‘미래 가치’에 경영의 방점을 찍고 있다. “회사가 잘 나갈 때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 정도다. 그게 바로 지속성장의 열쇠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건설 사장 취임 후 회사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야 할지를 골똘히 고민했다. 유럽과 일본의 선진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세계적인 트렌드도 면밀하게 살폈다. 그런 과정에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이 점차 또렷해졌다. ‘뉴 콘텐츠’를 사업에 담아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집 짓고 도로 닦는 사업은 국내 2군 업체나 후발국 업체들도 할 수 있는 일이 됐어요. 이제는 현대건설이 새로운 길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등은 어려운 겁니다. 항상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건설은 사실 개척과 창조의 화신 같은 기업이다. “길이 없으면 길을 찾고, 찾아도 없으면 길을 닦아가면서 나가면 된다”던 고 정주영 회장의 유명한 어록은 현대건설 역사의 고비고비에 깊이 스며 있다.
김 사장의 말이다. “정주영 회장께서는 ‘현대건설이 언제 해본 사업을 했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남들이 모두 하는 일을 하는 것은 ‘현대 정신’이 아닙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일을 해나가는 게 바로 ‘현대 정신’이죠.”
현대건설의 DNA는 ‘개척과 창조’
김 사장은 고 정주영 회장 스타일의 ‘불도저 경영자’는 아니다. 그보다는 부드럽고 친화적이며 소통을 중시하는 경영자다. 하지만 현대건설 특유의 ‘개척과 창조의 DNA’를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지금 현대건설의 대대적인 변신을 모색하고 있다. 그 방향은 직접 사업을 기획·제안 뿐 아니라 디자인·구매·엔지니어링·시공·금융조달까지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선진국형 개발업체인 ‘인더스트리얼 디벨로퍼(industrial developer)’다.
“지난해 유럽의 선진 건설·엔지니어링업체 사람들을 두루 만나고 다녔는데,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이 현재 사업 방식으로는 지속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거죠. 이제는 순수 시공이나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수익성 확보가 어려워졌어요. 세계적인 건설업체가 되려면 사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영업 패러다임을 바꾸고, 지속가능경영을 추진해야만 합니다. ‘인더스트리얼 디벨로퍼’로의 변신을 지향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현재 세계 건설산업은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들어섰다는 게 김 사장의 진단이다. 관행과 틀을 깨고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2009년 말 현대건설이 선포한 장기 미래전략 ‘비전 2015’는 그런 고민과 성찰에서 비롯된 청사진이다.
‘비전 2015’는 혁신적 사고와 끊임없는 도전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2015년까지 ‘글로벌 톱 20’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담고 있다. 핵심전략은 사업구조 고도화 및 글로벌 경쟁력 강화다. 특히 신성장 동력 육성에 대한 의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대건설은 해외 원자력발전소, 오프쇼어 워크(Offshore Work; 해양 석유·가스 채취 사업), 환경, 신·재생에너지, 복합개발사업을 5대 신성장 동력 사업으로 집중 육성할 계획이다. 해외 원전 사업은 이미 지난해 말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를 계기로 상쾌한 출발 신호를 울렸다.
글로벌 톱20 향한 원대한 구상 ‘비전 2015’
김중겸 사장은 차세대 인재 육성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비전 2015’의 추동력은 결국 임직원들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그의 차세대 인재관은 확실히 기존 건설업체 CEO들과는 남다른 면이 있다. 이른바 ‘소프트 파워(Soft Power)’ 강화에 초점을 맞추는 게 단적인 사례다. 이는 “세계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려면 역사, 철학, 종교, 심리학 등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인문학과 예술 공부를 강조할 뿐 아니라 아예 직원들과 어울려 연극·영화·뮤지컬 등 문화예술 체험 기회를 함께 갖기도 한다. 올해 신입사원 중 10%가량을 철학, 심리학, 조각 등 ‘건설과는 거리가 먼’ 전공자들로 뽑고, 교육 커리큘럼 역시 국립중앙박물관 관람이나 서울대 인문학과정 등 인문학적 소양 함양에 초점을 맞춘 것도 이채로운 대목이다.
김 사장은 자신이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건축과 건설은 사람들의 동선과 편리성, 만족감 등을 고려해야 하지요. 결국 인간에 관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바탕이 돼야 창조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어요.”
한국 건설산업은 우리나라 국토 재창조와 국민 주거환경 향상에 혁혁한 공을 세운 주역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아직도 심심찮게 불거지는 부실공사 논란이나 주택 시장 거품의 원인제공자 중 하나라는 비판 등으로부터 건설업계는 자유롭지 못하다. 김 사장도 그런 점을 잘 안다.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그래서다.
“건설은 인간의 삶을 좀 더 편리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건설업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 동안 우리 경제가 압축 성장을 해오는 과정에서 비롯된 부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사업의 포커스를 ‘인간’과 ‘인류’에 맞춰갈 겁니다. 전체 건설업계도 그런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언젠가 국민들도 우리 건설업계를 인정하고, 우리 스스로도 긍지를 가질 수 있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김중겸 사장 어록 10선
① 회사가 잘 나갈 때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② 현재 가치보다 미래 가치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③ 연구, 교육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다. 미래 가치에 투자하지 않으면 언젠가 회사 가치는 하락한다.
④ 퀀티티(quantity: 양)에 치중해 퀄리티(quality: 질)에 소홀한 것은 미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다.
⑤ 제3국 문화의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현지 매니지먼트 역량을 갖춰야 한다.
⑥ 직원 양성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멀티플레이어(multiplayer)→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 이뤄지는 것이 대세이며, 출연자보다는 연출가 역할이 더 중요하다.
⑦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편하게 해주는 주거철학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⑧ 건설은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사람 이야기다. 건축물에 인문학 향기가 더해져야 인간 오감에 만족을 주고 생명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
⑨ CEO의 능력은 5%다. 나머지 95%는 조직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 온다.
⑩ 5전3선승제라면 3대 0으로 이기는 것보다 3대 2가 낫다. 실패가 없다면 성공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도전한 것이다. 더 많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