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에 대한 향수·그리움을 평생동안 ‘푸른색’으로 표현
한국 화단에 추상회화의 선구적 역할을 한 김환기는 자연의 형태를 거부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소재를 선택해 소박하고 질박한 자연주의 미의식을 구현함으로써 독특한 회화 양식을 정립하고 나아가 순수추상에 이르는 예술의식의 근간을 마련했다. 또 그는 한국 근대미술이 시작되던 시기에 국제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한국의 추상미술 1세대로서 우리나라에 추상미술을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김환기의 <새와 항아리>에서 항아리가 갖는 미는 단순, 소박함과 질박함, 생략미, 그리고 여유와 해학 등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항아리는 조선 백자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는 문양들이 점차 단순화되며, 여백을 많이 두어 한가로운 느낌이 난다. 그리고 과감한 생략과 활달하게 표현하는 한국인의 마음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다. 즉 그의 항아리는 우리 민족이 예부터 갖고 있었던 단순, 소박미와 활달한 자유분방함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특히 그의 그림 속의 항아리는 둥근 보름달을 연상시키는 형태 때문에 ‘달항아리’라는 별칭이 붙었다. 조선인의 자연친화적인 심성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듯한 넉넉하기 그지없는 이 달항아리에서 안분자족함을 생활철학으로 삼고자 했던 당대의 소망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이런 백자 항아리는 상하접합 성형으로 인해 대개가 찌그러져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를 즐기는 듯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경지의 도자 미학을 창조할 수 있었다. 동산 위로 떠오른 보름달 같이 환하게 빛나면서 무한의 관용을 보여주는 듯한 이 경이로운 원형의 아름다움 앞에 서면 신의 손길인 양 눈부실 따름이다.

<새와 항아리>의 새는 학으로, 십장생 중의 하나다. 학은 우리의 전설 속에서 봉황 다음으로 이름 높은 새이며, 수많은 신화적 속성을 갖고 있다. 학은 날짐승의 우두머리로서 장수를 상징한다. 김환기의 작품 속에서 학은 목을 길게 빼고 날개를 넓게 펼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천 년 맺힌 시름을 인내하며, 고요하게 나는, 영원의 형상화다. 그리고 학이 날고 있는 배경인 그릇의 표면과 화면을 푸른 하늘로 생각했다. 즉 그릇과 화면 전체가 푸른 하늘로서 그곳은 무한한 공간이요, 학이 유연하게 날고 있는 천공이다. 그리고 학은 이상세계의 상징적 존재다. 

한편 매화는 사군자의 하나로 이른 봄의 추위를 이기고 꽃을 피우기 때문에 군자의 지조와 절개에 비유된다. 또 겨울이 되어 잎이 지고 나면 죽은 듯 보이나 다음해 다시 꽃이 피는 속성에 연유해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김환기의 <정물>에서 항아리는 매화와 함께 함으로써 사군자의 위상에 버금가는 존재가 됐고, 또 매화의 표현에서 서체적 운필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매화의 긴 가지가 한결같이 강한 기운을 느끼게 하며, 동양화의 갈필법과 유사하다. <정물>에서 매화의 표현은 자연 공간에서 자라고 있는 매화나무의 가지를 선택한 형식으로 그려지고, 그 배경에 항아리가 푸른색 배경 위에 병치되고 있다.

이처럼 김환기가 전 생애 동안 추구했던 색채는 푸른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작품 중에는 푸른색으로 그려진 것이 많다. 그가 사용하는 푸른색은 하늘빛 청색, 군청색, 암청색, 보랏빛 청색 등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김환기의 색으로 이야기되는 푸른색은 김환기의 고향 바다이자 유난히 푸른 한국의 하늘색이다. 즉 고향의 환유물이고 노스탤지어의 색이다. 그는 “우리 한국의 하늘은 지독히 푸릅니다. 하늘뿐이 아니라 동해바다 또한 푸르고 맑아서 흰 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들 것 같은 그런 바다입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결국 김환기의 작품에서 푸른색은 이상에 대한 동경이며, 향수, 그리움 그리고 욕망의 색이다.

그리고 김환기의 또 다른 색채인 흰색은 백의민족의 백자이자 도자기의 흰색이다. 조선의 자연환경과 전통에서 유래된 흰색은 김환기의 자유로운 비행이 민족과 역사의 틀 내에서 행해지는 것임을 입증한다. 그러면서도 흰색은 지상이 아닌 피안의 색으로 문인들의 투명한 정신성을 투영하는 색이며, 백자의 흰색은 백의민족으로서의 흰색이고 동시에 모든 것을 비워내는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색이다.

 Tip | 추상회화

▷▶▷ 추상회화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시작됐다. 추상회화는 서양의 오랜 사실주의와 합리주의 전통에 대한 반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추상회화에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기하추상이고 다른 하나는 서정추상이다. 전자는 화면을 기하학적으로 분해하는 데 비해 후자는 화면을 내적 감정에 따라 서정적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