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 간 영화와 뮤지컬의 환상 결합… 창작 뮤지컬 흐름 주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가 공연 중이다. 1980년대 파업이 한창인 영국의 북부 탄광촌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 빌리의 이야기다. 영화는 잔잔한 감동을 주며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았고 여기에 참여한 작가 리 홀과 감독 스티븐 달드리가 작곡가 엘튼 존의 권유로 뮤지컬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2005년 런던의 빅토리아 시어터에서 올라간 후 지금까지 공연 중이다. 2008년 브로드웨이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히트를 기록하며 토니상 10개 부문을 수상했다.

8월 오픈한 <빌리 엘리어트> 한국 공연은 영국, 호주, 미국에 이어 네 번째로 올라가는 공연이다. 비영어권에서는 처음 공연되는 셈이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노팅힐>과 같이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어온 워킹 타이틀 작품이다. 뮤지컬 제작 역시 영화사가 직접 참여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빌리 엘리어트>와 같이 자사의 영화를 뮤지컬로 옮기는 뮤지컬, 소위 ‘무비컬(movical; movie+musical)’이 하나의 트렌드를 이루며 제작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주유소 습격사건>이나 <싱글즈>, <댄서의 순정>, <파이란>, <서편제> 등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들이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많이 등장했다.

몇 해 전 어느 일요일 자리에 누워 생각 없이 TV 퀴즈 프로그램을 보다가 ‘무비컬’을 묻는 질문이 나와 깜짝 놀랐다. 무비컬이 이렇듯 일상에 파고드는 것을 보니 확실히 중요한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나보다 싶었다.

그런데 혹시 아는가? 뮤지컬의 메카 브로드웨이에서는 ‘무비컬’이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용어가 영어로 말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작품은 아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브로드웨이에서도 간혹 무비컬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뉴욕타임즈>를 검색해보면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세 차례 정도 무비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기사가 검색된다. 그중 2005년 기사를 보면 최근 브로드웨이 트렌드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때 공연계 사람들 중 일부가 이러한 트렌드를 ‘무비컬’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무비컬, ‘콩글리시’ 아니다

당시 한국에서도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댄서의 순정>, <싱글즈>와 같은 작품이 공연 중이거나 준비 중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를 브로드웨이 사정과 엮어 설명하는 기사를 한 일간지에서 쓰면서 무비컬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 이후 국내 많은 매체에서 이러한 뮤지컬 트렌드를 소개하는 글을 통해 무비컬이란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무비컬이란 용어가 만들어진 곳은 브로드웨이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더 이상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뮤지컬은 흔히 원작이 있다. 세계 4대 뮤지컬이라는 <오페라의 유령>이나 <레 미제라블>, <캣츠>는 소설이나 동화가 원작이고 <미스 사이공>은 잘 알다시피 오페라 <나비 부인>을 토대로 한 작품이다.

많은 뮤지컬들이 소설이나 영화, 아니면 오페라나 연극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원작 없이 순수 창작 되는 뮤지컬은 20%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다양한 원작을 가지고 있는 뮤지컬들을 그 원작에 따라 노블컬, 드라마컬, 오페라컬이라고 하지 않는데 굳이 영화가 원작인 작품들만 무비컬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와 뮤지컬은 유성영화가 등장한 1920년대부터 빈번하게 교류했다.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들은 몇 해 지나지 않아 곧바로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었다.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남태평양>, <오클라호마>,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은 모두 무대에서 인기를 끌고 난 후 영화로 제작된 작품들이다. 그런 배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브로드웨이에 무비컬이란 용어가 등장한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무비컬 붐 원조는 ‘디즈니 애니’

1990년대 중반 디즈니가 자사의 애니메이션을 뮤지컬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공연 관계자들은 디즈니의 도전이 무대예술을 우습게 여긴 무모한 시도라고 보았다. 첫 뮤지컬 <미녀와 야수>를 ‘무대 위에 올려놓은 디즈니랜드’라고 폄하하며 작품이라기보다는 아이들의 장난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 작품에 가족 관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차기작인 <라이온 킹>은 아프리카의 밀림을 무대 위에 재현해내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흥행뿐만 아니라 작품성마저 인정받았다. 디즈니가 이 두 뮤지컬로 벌어들인 수익은 10년 만에 두 애니메이션 수익의 두 배를 넘어섰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의 경우 DVD 판매 수익 정도만이 지속되고 있고 실질적으로 더 이상 자체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 데 반해, 뮤지컬은 해가 지나도 지속적으로 꾸준한 수익을 가져왔다.

이를 유심히 지켜본 영화사들은 자사의 한때 잘 나갔던 영화 목록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2000년대 쏟아진 <위키드>, <웨딩싱어>,

<금발이 너무해>, <스팸머랏>, <헤어스프레이> 등은 모두 영화사가 뮤지컬 제작에 뛰어든 작품들이다. 기존 뮤지컬 제작사가 아닌 영화 제작사들이 자사의 콘텐츠를 ‘원 소스 멀티 유즈’로 이용해 새로운 변신을 꾀하는 현상이 두드러졌고 그러한 제작 붐을 호명할 명칭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근 국내의 무비컬 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내 최대 영화사 중 하나인 싸이더스는 악어컴퍼니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뮤지컬 제작에 나서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은행나무 침대>를 개발하고 있고, 김달중 연출, 이우형 조명디자이너가 주축이 된 크리에이터 그룹 드림캡처와 <주유소 습격사건>을 뮤지컬로 만들었다. 씨네라인2는 자사의 콘텐츠를 뮤지컬로 제작하기 전에 창작뮤지컬 <폴 인 러브> 제작에 나섰으며,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제작사인 KM컬쳐는 뮤지컬 제작사인 쇼노트와 손을 잡고 이 작품을 뮤지컬로 제작해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국내 영화사들 역시 이미 상품성이 끝난 영화들을 뮤지컬로 재탄생시켜 새로운 수익구조를 도모하고 있다. 창작뮤지컬을 제작하는 입장에서도 대중들에게 익숙한 스토리를 가지고, 탄탄한 스토리와 개성 있는 캐릭터를 지닌 영화 원작을 거부하기 힘들다. 국내에서도 기존 영화사와 뮤지컬 제작사의 협력이 곳곳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들이 창작뮤지컬의 중요한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