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 의무사항’ 위반하면
보험금 땡전 한 푼 없을 수도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것이 보험 증권이다. 그런데 정작 보험금을 청구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보험금을 받지 못하거나 기대치보다 적은 보험금을 받게 되어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보험은 비자발적 상품이라는 속성상 외부 모집이 아직도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보험 가입 당시의 정확한 상황은 계약자와 모집자만이 알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문서와 증거로 남기지 않는 한 분쟁이 생기는 경우 보험사는 모집자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며 계약자 역시 책임으로 인한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지난 호에 이어 보험 가입 시 유의사항 및 중요한 약관 내용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 2010년 5월 건강보험을 가입한 김씨는 최근 보험금 청구를 했다가 보험 해지를 당했다. 간질환 치료력을 고지하지 않고 가입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동료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다행히 납입한 보험료는 다 돌려받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과연 김씨는 보험료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보험료는 돌려받을 수 없다. 2010년 4월1일 이전에 가입한 김씨의 동료는 ‘계약 전 알릴 의무사항’을 똑같이 위반했지만 당시 약관은 납입 보험료와 해지 당시 해지환급금 중 많은 금액을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돈을 돌려받은 것이다. 도덕적 해이가 조장되고 법률상 의무인 계약 전 알릴 의무사항이 경시될 수 있다는 것이 개정 명분이다. 개정된 표준약관에 의하면 이 경우 해지환급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 뿐인데 보장성 보험의 경우 이 정도 경과기간이라면 해지환급금이 없거나 매우 미미할 것이다. 이제는 보험 가입 시 계약 전 알릴 의무사항을 더 꼼꼼하게 들여다봐야겠다.
* 김 대리는 대출 부담 때문에 퇴근 후 피자 가게에서 배달 부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서툰 오토바이 운전 솜씨 때문에 그만 골절상을 입고 5일 동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보험금으로 병원비라도 해결해야 하는데 과연 가능할까? 김 대리가 손해보험사에 의료실손보험을 가입한 것은 부업 시작 전이다.
보험금 지급이 거절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손해보험의 경우 ‘계약 후 알릴 의무사항’이라고 해서 통지 의무가 약관에 명기되어 있다. 통지 의무자는 계약자 또는 피보험자이다. 보험대상자인 피보험자의 직업 또는 직무를 변경하거나 이륜자동차(오토바이) 또는 원동기장치 자전거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지체 없이 보험회사에 알려야 한다. 예를 들면 자가용 운전자가 영업용 운전자로 직업을 바꾸게 되거나 사무직이 판매직이나 기술직으로 직무를 변경하는 경우다. 보험 가입 당시 김 대리는 사무직이었고 오토바이를 운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만약 보험회사가 부업과 오토바이 운전에 대해 알았다면 아마 가입을 제한하거나 거절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김 대리가 사실대로 통지를 했다면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을까? 역시 받을 수 없다. 우연한 외부적 충격으로 인한 보험사고를 상해사고라고 하는데 통지를 했다면 이 보장 내용이 아예 삭제되거나 미미한 금액으로 감액되어 처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김 대리가 위염 치료를 받은 경우라면 이는 변경된 직업 혹은 직무와 관련성이 없기 때문에 통지 의무 이행과 무관하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 박 과장은 지인의 권유로 큰 맘 먹고 종신보험을 하나 더 가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박 과장은 2년 전쯤 지방간 판정을 받은 사실이 있다. 계약 전 알릴 의무사항에 기입하면 보험가입이 제한되거나 거절될 수 있으니 그냥 알리지 말고 계약하는 것이 좋다는 지인의 권유가 찜찜하기만 하다. 과연 괜찮을까?
약관에 의하면 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중요한 사항에 대하여 사실과 다르게 알린 경우 보험사는 일방적으로 해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이란 보험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청약을 거절하거나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했을 것으로 인정되는 사항을 말하는데 건강상태나 치료력은 당연히 이에 해당된다. 다만 예외 조항으로 가입 후 3년이 경과한 경우는 해지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박 과장이 이 사실을 알리지 않고 보험 가입을 한다면 3년만 잘 견디면(?) 된다. 악용될 소지가 큰 예외 조항을 둔 이유는 뭘까? 돈 빌려주고 일정 기간 지나면 채권 추심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민법상 ‘소멸시효 제도’나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일정 기간 후에는 공소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소시효 제도’의 가장 큰 취지는 법적 안정성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현재의 상태를 존중하는 것이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이 예외 조항은 의학적 비전문가인 소비자들이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까지도 책임을 묻는 불합리를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 박 과장의 경우 만약 가벼운 증상이라면 당당하게 검진을 받고 보험 가입을 하거나 가입 제한 조건을 수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비록 3년이지만 그다지 유쾌한 기간은 아닐 것이다.
* 장 사장은 5년 전에 종신보험과 암보험에 가입했다. 그 동안 보험금을 청구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사실 보험 가입 1년 전에 위 절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고지하지 않고 가입한 것이다. 가끔 TV를 통해 보험 분쟁에 대한 얘기를 접하면 왠지 찜찜하다. 과연 그의 보험계약은 무탈할까?
약관은 대리진단, 약물복용 혹은 진단서 위·변조 등의 수법으로 가입한 경우를 사기에 의한 계약으로 보고 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규정해 놓았다. 암이나 HIV(에이즈) 진단 사실을 숨기고 가입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장 사장이 가입한 시점은 현재의 표준약관 개정 이전이므로 앞에서 언급한 3년 제척기간의 적용이 없다. 약관은 취소권을 규정하면서 역시 예외를 두었는데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보장 개시일로부터 5년이 지난 경우이거나 보험사가 알고도 1개월을 방치했다면 취소권 행사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장 사장의 보험은 유효하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비자 보호와 법적 안정성을 위해 각종 제척기간을 두고 있지만 이를 악용하는 경우 적지 않는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보험 가입 시 약관 규정에 따른 정확한 고지 의무, 통지 의무 이행은 계약자 혹은 피보험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담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