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는 건강한 경제의 밑거름

한국경제가 경제위기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빠른 회복세란 평이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남긴 상흔도 함께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소득불평등의 확대와 중산층의 붕괴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2000년에 0.286에서 2009년에는 0.345까지 상승했다. 특히 2008년과 2009년 사이에는 0.02포인트나 상승해 소득불평등이 급격히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계청 자료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중산층 가구(가구 중위소득의 50~150% 기준)의 비중이 2009년 현재 66.7%로 2003년의 70.1%에서 3.4% 하락했다.
중산층의 감소와 소득불평등 확대는 빈곤층의 증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으며, 경제성장과 분배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 1933~)은 한국사회가 당면한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와 그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경제학자다.
센은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의 논리에는 단순한 ‘계산’이 아닌 ‘철학’을 바탕으로 한 비전이 짙게 배어 있다. 때문에 센을 ‘경제학자의 양심’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경제와 윤리의 관련성을 자신만의 논리로 설명한 학자가 바로 센이다. 노벨상위원회는 센의 연구가 “중요한 경제적 문제들에 관한 논의에서 윤리적 차원을 복원시켰다”고 평가했다.

파레토 최적은 편협한 정의
센의 경제학은 흔히 ‘센코노믹스(Senconomics)’라 불린다. 철학적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한 경제학적 접근, 또는 경제학의 철학적 접근이라고 불리는 그의 독특한 방법론 때문이다. 센은 현대 경제학의 공리주의와 결과주의적 요소를 비판한다. 공리주의는 사회의 모든 제도와 개인 행위의 기본 준거를 쾌락(편익)과 고통(비용)에서 찾는다. 공리주의에서 사회 전체의 후생은 사회 전체로서의 주관적 가치합계가 정(+)이냐 부(-)냐에 따라 행위의 옳고 그름이 판정되는 결과주의를 낳는다. 누가 파이를 더 많이 갖고, 누가 더 적게 갖느냐 하는 건 관심사항이 아니다.
센은 주류경제학의 편협한 ‘합리적 인간’에 대한 정의를 넘어 인간의 행동동기와 윤리적 관계를 보다 넓게 포용해야 함을 강조한다. 센에게 개인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갖는 동시에 타인과의 상호관계를 자신의 행동준거에 반영하는 존재다. 센이 말한 개인의 행동준거란 현실참여, 약속, 의무, 책임 등과 같은 사회적 커미트먼트(commitment)를 말한다. 그는 자기 이익만의 극대화를 합리성의 기준으로 볼 때, 실제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협동과 희생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
따라서, 센은 주류경제학의 파레토 최적상태라는 개념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파레토 최적상태란 어느 한 사람의 효용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효용을 증가시킬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즉 어느 한 명의 효용을 극대화하자면 필연적으로 다른 이의 효용을 떨어뜨려야 하는 상태를 말하며 주류경제학에서는 자원배분(분배가 아님에 주의) 효율성의 척도로 사용된다. 경제적 자원이 얼마나 편중되게 배분돼 있는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이는 곧 파레토 최적상태 개념이 빈부격차와 같은 분배문제와는 무관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센은 이에 대해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사과 두 개를 형과 동생이 나눈다고 생각해보자. 동생은 정이 많아 남이 없는 것을 보면 자신의 것을 줌으로써 기쁨을 얻는 사람이라고 하자. 이때 애초부터 동생에겐 사과가 2개 있고 나에게는 없다고 생각하자. 만약 동생이 사과 하나를 나에게 주면 어떻게 될까. 주류경제학의 기준에 의하면 두 상황 모두 파레토 최적상태다. 누가 사과를 소유하고 있건, 사과는 남김없이 배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사과를 주고받은 후 정신적 만족감을 따져본다면 어떻게 될까. 즉, 나는 사과를 받아 기쁨이 늘었고, 동생은 타고난 성격 덕에 사과를 나눠줌으로써 역시 기쁨이 늘었을 게 분명하다. 즉 사과 두 개를 동생이 모두 가졌을 때보다 형인 나에게 하나를 줌으로써 사회 전체의 후생은 올라간다. 이는 확실히 사회적 후생의 개선이라 말할 수 있다.
이를 넓게 보면 거시경제나 국민경제의 측면에서 한 국가의 경제성장률보다 경제성장과 아울러 부의 분배의 공평성도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뜻한다.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이 적정하고 정책목표로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부가 가진 자에게서 못 가진 자에게로 이전되었는가, 또는 앞으로 이전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거시경제정책의 목적에 중요하게 자리 잡아 왔던 경제성장률의 달성이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와 이의 제도적 정비라는 목적과 얼마나 보조를 맞춰왔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대목이다.
식량이 있어도 굶어죽는 이유
센은 기아와 빈곤, 그로 인한 불평등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이는 어린 시절 경험과 무관치 않다. 센이 9세였던 시절 벵골에선 대기근이 일어났다. 굶어죽은 사람만 200만 명이 훨씬 넘은 대재앙이었다. 센은 당시 인도에 식량이 충분했더라면 그처럼 엄청난 인명손실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후에 센은 많은 경우 기아가 발생한 때에도 식량 공급량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센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식량 공급량의 감소보다는 임금감소, 실업, 식량가격 상승, 식량배급 체계미비 등의 수많은 사회·경제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특정집단의 기아를 유발시켰다.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교육과 공중보건 개선처럼 사회개혁이 경제개혁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net)을 확충하고 경제위기로부터 타격을 받는 계층이 사회적 안전망에 용이하게 접근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승승장구하던 한국경제는 1997년 말부터 씁쓸한 참상을 맞이하게 된다. 1997년의 외환위기가 그 원인이었다. 그 결과 실업률은 급상승하였고, 한국의 지니계수는 1997년과 1998년의 불과 1년 사이에 0.027%나 상승하여 경제적 불평등도가 심화되었다. 센은 이를 두고 민주주의에 의한 보호역할이 부족해 불황에 따른 고통이 분담되지 않고 유독 실업자와 해고 노동자에게만 고통을 감당하게 만드는 사회제도가 비참한 상황을 연출했다고 진단한다.
당시 선진국에서 일반적인 실업수당과 고용보험, 직업훈련과 같은 사회적 안전망이 대단히 미비했던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근년의 상황은 10여 년 전과 많이 다르며, 사회적 안전망도 확충되고 있다. 그러나 세제와 같은 제도적 측면에서 소득 재분배를 통한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확충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이것이 사회적 갈등 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경제적 불평등의 개선은 확실히 경제 성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경제적 계층 간 알력을 완화하고, 정부의 정책과 의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용이케 하는 요소이다. 이는 정책의제의 발의, 합의, 실행에 따른 정책의 사회적 거래비용을 낮추는 효과도 있다. 특히 중산층과 저소득층으로의 부의 재분배는 건실한 소비계층을 확충해 내수시장의 기반을 강화시킨다. 무릇 소비성향, 즉 소득 대비 지출의 성향은 고소득층보다 중소득층과 저소득층으로 내려갈수록 높은 법이다.
저소득·중산층 친화적 세제 정비 필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이 4%가 되느니, 5%가 되느니 하는 문제보다 건실한 한국 경제의 체질을 키우기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불평등 해소의 문제라는 걸 센은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정책은 저소득층과 중산층에 대한 친화적인 세제를 정비하면서, 이전소득을 늘리는 정책일 것이다. 즉, 서민층의 삶의 질에 악영향을 미치는 주거 및 교육비용 등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키는 정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2008년 1월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기존의 국내총생산을 기준으로 성장을 측정하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며, 국민의 삶의 질, 행복요소까지 포괄한 새로운 경제성장 지표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위해 센을 초빙했다. 그는 지니계수 등 분배정도를 측정하는 전통적인 지수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소위 ‘센지수’라는 걸 고안해냈다. 센은 무엇보다 경제성장과 분배문제는 별개의 문제, 즉 어느 것을 먼저 성취해야 하는가와 같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