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딸'프리미엄 없이 글로벌'명품 CEO'등극

김성주 회장은 고 김수근 대성그룹 회장의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부친인 김수근 회장은 “조신하게 자라 좋은 집에 시집가라”고 했던 ‘옛날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성주 회장은 ‘재벌가의 딸로 온실의 화초’처럼 살아가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상황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상황을 개척해 나가기로 했다.
그의 홀로서기는 미국 유학을 떠날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어려운 유학 시험을 통과하여 미국 앰허스트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유학은 무슨 유학”이라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단식투쟁까지 벌였지만 아버지는 눈도 끔쩍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수단으로 아버지의 친구 중 앰허스트대학 출신을 집으로 초대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앰허스트대학 동창회가 벌어진 그날 아버지는 결국 손을 들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떠난 유학이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이 됐다. 앰허스트대를 졸업한 뒤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원을 거쳐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그는 하버드대에서 만난 영국계 캐나다인과 결혼했다. 아버지는 노발대발했다. 가족들 몰래 150달러 결혼식을 올린 그에게 ‘호적을 파 가라’며 모든 지원을 끊었다.
손에 쥔 돈은 고작 1800달러. 당장 생활이 곤란해져 학업을 접고 직장을 구해야 했다. 지인의 소개로 얻은 첫 직장은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백화점인 블루밍데일이었다. 그는 미국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던 백화점에서 소매 유통업과 명품 시장에 대한 기본기를 쌓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 그가 패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였던 셈이다.
혼자서 사업 시작 2005년 MCM 인수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김수근 회장의 집무실 옆방에 ‘대성산업 패션사업부’라는 이름을 달고 직원 한 명 없이 혼자서 일했다. 월급은 고작 18만원. 사무실에는 책상 하나, 전화와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그나마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유학 시절 대성산업과 미국 회사와의 합작 프로젝트가 성사될 수 있도록 도운 데 따른 보답이었다.
구찌 등 명품의류를 수입하는 성주인터내셔날을 설립하고 나서는 또 다른 장벽에 부딪혔다. 바로 ‘돈 봉투’와 ‘술대접’으로 상징되는 소매 유통업계의 부패 관행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업계의 왕따’가 되는 길을 택했다. 정직하게 돈을 벌지 못할 바에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결심한 것이다.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업계의 불문율을 깨뜨리겠다는 그의 결심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거래처에 구매 담당자를 만나러 가면 두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잘 나가는 매장 자리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다.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버텼다. 오기도 생겼다. 옳지 못한 유혹에 과감하게 맞선 것은 그만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큰언니인 김영주 코리아닷컴 커뮤니케이션즈 부회장의 회상이다. “성주는 어릴 때부터 아프고 어려운 친구들을 잘 도왔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어요. 워낙 활달하고 명랑하기도 해서 초등학교 때 성주의 별명은 ‘잔 다르크’였어요. 깨끗하게 비즈니스 하겠다고 했을 때 괴롭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래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
악조건 속에서도 서서히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1989년 3월 부산 파라다이스호텔에 첫 번째 구찌 매장을 연 이래 1997년 말까지 매년 40~50%의 성장을 거듭했다. 구찌 외에도 프랑스의 소니아 리키엘(Sonia Rikiel)과 이브 생 로랑(YSL), 독일의 MCM을 들여왔다. 매장은 89개에 달했고, 매출은 500억원을 넘어섰다.
1997년 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김 회장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른 업체보다 앞서 구조조정에 나섰다.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인근에 있던 사무실은 경기도 김포의 공장 창고로 옮겼다. 270억원을 받고 구찌의 국내 독점 판매권을 본사에 되팔았다. 다른 브랜드도 모두 내보내고, 명품 브랜드 수입 사업을 종료했다. 그러나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국내에서 제품을 생산했던 MCM은 포기하지 않았다.
구조조정을 마친 그는 MCM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사업을 성장시켜 나갔다. 다행히 한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2000년 100억원에 머물렀던 매출은 5년 만에 6배로 불어났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서 날개가 꺾인 MCM 본사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김성주 회장 때문에 MCM이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김 회장은 MCM 본사를 인수키로 했다. 주변에선 다들 미쳤다며 만류했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국에서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 사업을 전개하며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도전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계라고 여기는 모든 관념에 도전해 그것을 극복한 ‘강력한 의지’가 성공 요인인 셈이다. 그는 평소 “뉴욕 백화점 말단사원으로 시작해서 정말 고생하며 일한 경험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한다.
현재 성주그룹은 MCM 브랜드를 갖고 있는 성주D&D와 마크앤스펜서(Marks & Spencer) 라이선스 사업을 하는 성주머천다이징, 그리고 비영리법인인 성주재단으로 구성돼 있다. 성주D&D와 성주머천다이징의 연간 매출액을 합하면 2000억원이 넘는다. 특히 성주D&D는 지난해 MCM을 인수한 2005년 대비 3개 가까이 성장했다.
5년 안에 중국 시장 장악 ‘의욕’
김 회장은 21세기에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도구로 ‘글로벌 마인드’를 꼽는다. ‘한국에서 내가 최고’라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마인드 없이는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인수해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 선진시장에서 거침없었던 그의 행보는 이제 중국으로 향하고 있다. 성주D&D의 한 임원은 “최근 김 회장의 관심은 온통 중국에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제주도에서 열린 전국경제인연합회 하계 포럼에서 김 회장이 한 말이다. 중국 시장에 대한 그의 생각이 그대로 묻어난다. “금융 중심적인 서구 자본주의 시대가 쇠퇴하고 있습니다. 익사이팅한 시대의 중심은 이제 더 이상 유럽과 미국이 아닙니다. 주역은 바로 아시아이고, 남은 곳은 중국밖에 없습니다. 중국을 잡게 되면 5년 후에는 세계를 잡게 될 것입니다.”
그는 세계 명품 브랜드의 각축장으로 떠오른 신흥시장인 중국에 주요 거점을 확보해 명품 브랜드 입지를 확고히 한다는 계획이다. 중국 시장 개척을 통해 글로벌 명품 시장의 패러다임을 MCM 중심으로 바꾼다는 복안이다. 이를 위해 중국에서는 고가 이미지로 승부를 건다는 원칙도 세웠다.
이는 소위 ‘3·5·7전략’의 일환이기도 하다. 즉 3년 안에 중국에 50개 매장을 오픈해 루이뷔통을 넘어서 중국의 소비자들이 열광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만들고, 이 여세를 몰아 5년 안에 글로벌 시장을 정복하며, 7년 안에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태리 밀라노에 글로벌 디자인센터를 세웠으며, 카이스트와는 신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심하지만 원칙에는 철저
김 회장은 하루 24시간을 72시간으로 쪼개 쓸 만큼 바쁘다. 낮에는 한국에서 일하고, 해가 지면 미국과 유럽에서 일한다. 빈틈없는 일정은 토요일까지 계속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독일 본사를 방문하는 등 1년의 절반 이상은 해외에서 보낸다. 미국이나 유럽 등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가 출장 때마다 가장 먼저 찾는 곳은 매장이다. 매장의 전시 상태 등을 점검하고, 지역마다 어떤 제품이 잘 팔리는지도 직접 살핀다. 최고 경영자는 최일선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실력이 곧 경쟁력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생산된 제품의 실밥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살핀다. 전문 지식과 기술이 따라주지 않으면 글로벌 명품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주요 사안을 직원에게 믿고 맡기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경영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만 큰 흐름과 방향을 제시한다. 한 임원의 말이다.

김 회장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상대방을 세심하게 배려하지만, 원칙에는 철저하다. 그와 함께 일해 본 임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에 대해 온화한 성품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창의적인 CEO이기도 하다. 다른 임직원들이 못해내는 좋은 생각이나 신선할 발상으로 주변을 놀라게 한다. 그는 창의성이 마술쇼처럼 아무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신기한 능력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창의성은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기도 하다. 언니인 김정주 연세대 교수의 얘기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창의적이었어요. 성주는 인형의 옷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입혔는데 솜씨가 굉장히 좋았어요. 컬러가 조화를 잘 이뤘고, 단추도 어떻게 색깔을 잘 맞추는지. 아마 그때부터 패션에 소질이 있었나 봐요.”
그는 특히 ‘여성’에 대한 관심이 많다. 남성이 바꿔주길 바라고, 정부가 뭔가 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여성이 능동적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가 성주재단을 통해 매년 50명의여성 글로벌 리더를 양성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러나 ‘재벌가 딸’을 포기하고 험난한 기업인의 길을 걸었던 만큼 날카로운 직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김 회장은 전경련 하계 포럼에서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아니라 여성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라며 “여성들은 남자 탓, 사회 탓만 하지 말고 스스로 강인해져서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과 신념에 충실하라.”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기본과 신념은 ‘투명한 손의 경쟁력’을 이른 말이다. 국내 업계에 토착화된 뿌리 깊은 부정과 부패에 과감히 맞서고, 선진 글로벌 패션 경영을 누구보다 먼저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신념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평소 “국내에선 정직한 사람을 바보로 아는데 글로벌로 나가면 정직성은 경쟁력”이라고 말한다.
전 재산 사회 환원하고 명예은퇴 ‘꿈’
그는 부의 사회 환원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몸에는 근검절약 습관이 배어 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씀씀이가 헤픈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인 여귀옥 여사는 재벌가의 부인답지 않게 검소하고 소탈했다. 헌 옷과 헌 천으로 이불을 기워 사용했고, 그에게는 언니들 옷을 물려 입도록 했다. 생활비의 80~90%를 모아 두었다가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썼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인 돈으로 재단이 만들어졌고, 이는 대한기독교 여자절제회로 발전했다. 현재는 김정주 교수가 이끌고 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성주가 성주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도 아마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거예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과외 한 번 시키지 않으셨고, 공부하란 말씀도 한 번도 안 하셨어요. 다만 성경 공부는 열심히 시키셨어요. 공부를 잘하기보다는 좋은 인간이 되라고 가르치셨죠.”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기독교 정신에 따라 나눔을 실천하는 한편 사회 환원 기업으로서 소명을 다하고 있다. 지난 3월 성주그룹 20주년을 기념해 설립한 성주재단이 그것이다. 북한 동포와 국내 소외계층을 돕기 위해 김 회장과 성주그룹 등이 20억원을 출연해 만든 것이다. 성주그룹은 매년 50여 개의 국내외 NGO뿐만 아니라 각종 자선공연과 기부모임 등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그의 꿈은 MCM을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로 키운 후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다. 재벌가 딸이라는 프리미엄을 포기하고 맨손으로 시작해 연 매출이 2000억원이 넘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 김성주 회장. 이제 그는 자신의 마지막 꿈을 현실에 옮기기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