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온냉동고 최초 국산화 주역
생명공학·식품산업 ‘숨은 도우미’

생명공학 연구재료, 이식용 장기 등을 보관하는 초저온냉동고
알 프스나 알래스카의 빙하에선 수만 년 전 사람이 죽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발견되곤 한다. 얼음 속 영하 50도 이하의 극한(極寒)이 시신을 썩히는 곰팡이와 세균의 활동을 완벽히 차단했기 때문이다. 최첨단 의료기관이나 생명공학 연구실에서 생체조직을 보관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초저온’ 환경을 조성하는 냉동장비들을 사용하는 것. 다만 빙하보다 훨씬 낮은 온도로 보관물을 얼린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초저온 냉동장비는 세계적으로 급성장 중인 바이오산업의 핵심장비다. 수년 이상 관련 연구가 진행되더라도 실험에 사용되는 인체조직, 생물자원, 미생물 등을 안전하게 보존해주기 때문이다. 초저온 냉동장비 제작은 고도의 기술을 요구한다. 선진국의 몇몇 글로벌 메이커들이 시장을 독점하는 상황이지만 여기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진 국내 기업이 있다. 직원 70명의 일신바이오베이스(이하 일신바이오)다.
홍성대(53) 일신바이오 사장의 말이다. “초저온냉동고, 동결건조기 등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했던 초저온 냉동장비들을 최초로 국산화했습니다. 외산보다 저렴하게 대학, 종합병원, 공공기관, 제약·식품 기업의 생명공학 연구기관에 공급하면서 국내 바이오 업계의 숨통을 터줬다고 자부합니다.”
일신바이오는 다양한 바이오장비들을 만든다. 초저온냉동고, 동결건조기, 혈액보관기, 세균 인큐베이터, 제빙기 등 여러 종류의 기기들이 이 회사의 자동화 라인에서 조립된다. 전매특허는 초저온 냉동장비. 그 중 초저온냉동고, 동결건조기가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양대 기둥이다.
국내 동결건조기 시장 점유율 80%
초저온냉동고는 영하 80~90도 사이에서 보관물을 급속냉동하는 특수 냉동고다. 일반 냉동고의 냉동온도는 영하 40도 안팎. 그에 비해 일신바이오의 초저온냉동고는 영하 150도까지 낮출 수 있다. 당연히 일반 냉동고보다 복잡한 제작기술을 요구한다. 우선 온도제어기술이다. 오차가 ±1도로 전기가 들어오는 한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보관 중인 물질의 변질을 최소화할 수 있다.
단열기술도 필요하다. 여름에 영상 30도를 예사로 오르내리는 상온의 열이 조금이라도 냉동고에 침투하면 보관물이 손상될 수 있다. 단기간에 많은 열이 외부로 방출되도록 열교환기술도 갖춰야 한다. 일신바이오의 냉동기술은 국내외적으로 독보적인 수준이다. 이 회사의 초저온냉동고는 지난해 지식경제부에 의해 세계일류상품으로 지정됐다.
일신바이오의 초저온냉동고 국내시장 점유율은 20%다. 줄기·성체세포, 세균·바이러스 등 생명공학 연구재료와 안구·골수 등 이식용 장기를 보관하는 곳에서 광범하게 이용된다. 적십자, 식품의약청, 농업진흥청 등 국내 주요 생명공학 연구기관들이 앞장서 채택할 만큼 제품의 성능도 우수하다.
동결건조기는 초저온냉동고와 동일한 냉동기술이 적용되지만 진공기술이 접목되는 점이 다르다. 초저온의 진공 상태에서 식자재, 약재의 수분을 기화시키는 용도다. 삽입물의 물기가 제로(0)에 가까워지도록 바짝 말리는 것으로 2차대전 무렵 미국에서 전투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개발됐다. 그러나 국내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 일신바이오를 통해서다.
동결건조기는 특히 식품 분야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동결건조된 제품은 유통기한이 비약적으로 느는 데다 무게도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물이 닿으면 본래 형태대로 돌아오고 맛과 영양소의 변화도 최소화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라면, 즉석 북엇국 등 인스턴트식품이다.
일신바이오 동결건조기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80%. 국내 대부분의 식품업체가 보유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에는 제약업계의 수요도 늘고 있다. 주사제, 혈액제제, 백신 등을 제조하기 위해서다. 녹십자, 삼양제넥스, 동아제약, 일동제약, SK케미칼 등 주요 제약회사들도 일신바이오의 고객리스트에 포함된다.
미국 조달시장 진입 성공으로 ‘탄탄대로’
바이오장비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곳은 선진국의 대기업들이다. 초저온 냉동장비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산요, 미국의 버티스·포마 등 막강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다. 일신바이오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1% 미만이다. 지난해 매출 132억원 중 40%가 해외에서 왔지만 아직 글로벌 경쟁업체들에 비해 브랜드 파워가 약하다.
하지만 기술력까지 해외업체들에 밀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이어들로부터 호평을 얻으며 빠르게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일례로 2008년 7월 미국 조달청의 납품업체로 등록됐다. 미국은 엄정한 품질요건을 만족시켜야 하는 조달시장에서도 가장 진출하기 어려운 나라로 손꼽힌다. 미국 조달시장은 연간 4100억달러(455조원) 규모다. 조달시장 중에서 단연 세계 최대다. 진입은 어렵지만 한번 뚫으면 탄탄대로라는 홍 사장의 설명이다. “미국의 공공기관들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세계 도처에 조달 수요가 넘쳐나죠. 바이오장비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일례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선에 수혈이 필요한 부상자가 넘쳐납니다. 일신바이오의 혈액보관기를 필요로 하는 곳이죠.”
현재 일신바이오의 장비들을 사용하는 대표적인 미국 공공기관으로 스미소니언 박물관을 꼽을 수 있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161개의 박물관지부, 1억3700만 점의 소장품을 지닌 세계 최대 규모 학술기관이다. 이곳에 지난 7월 한 달만 초저온냉동고 3종 66대가 공급됐다. 유물, 희귀광물, 운석 등의 귀중 자료를 보관하는 용도다.
일신바이오의 해외시장은 미국만이 아니다. 네덜란드 골수기증센터 등 유럽의 대형 의료기관들도 고객이다. 중국, 동남아시아, 중동·아프리카에서도 수요가 늘고 있어 각 지역마다 총판을 개설해 둔 상태다. 제품의 품질 외에도 철저한 사후관리가 바이어들을 만족시켰다. 해외 총판 사업자를 선정할 때 바이오장비 분야의 엔지니어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 1년에 네 차례씩 해외 총판 관계자들을 불러 기기에 대해 교육하기도 한다.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현지에서 곧바로 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초저온 냉동장비의 수리가 장기간 지체되면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합니다. 내부에 보관하던 귀중한 자재들이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죠. 특히 조달시장은 부실관리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 대번에 수주가 끊길 만큼 민감한 시장입니다. 신뢰가 생명이라는 소리죠.”

홍성대 일신바이오 사장이 직원과 초저온냉동고의 성능을 테스트하고 있다.
헌신적인 고객관리로 신뢰 획득
홍 사장이 초저온 냉동기기 개발에 뛰어든 것은 1988년이다. 일신바이오의 전신인 ‘일신엔지니어링’으로 창업에 나서면서다. 직전까지 홍 사장은 한 바이오장비 수입업체의 수리기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연히 제품 견적서에 적힌 초저온냉동고와 동결건조기의 가격을 엿본 것이 창업 계기였다. 기계 가격이 웬만한 승용차보다 비쌌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매일 수리하던 장비지만 그 정도로 고가일 줄은 몰랐다고 한다. 적은 급여 때문에 퇴근 후에 ‘투잡’으로 군고구마를 팔아야 할 만큼 형편도 어려웠단다. “대번에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국산화에 성공하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수리기사 생활을 하면서 장비의 설계와 원리에 대해서는 훤히 꿰뚫고 있었던 데다 서울의 청계천상가나 세운상가에서 얼마든지 부속을 조달할 수 있었죠. 여건은 충분해 보였습니다.”
사표를 내고 전세금 500만원으로 서울 중화동에 2평짜리 창고를 빌렸다. 동료를 끌어모아 밤낮으로 냉동기기 개발에 매달렸지만 작업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금이 달렸다. 개발비를 벌기 위해 낮에는 실험장비들을 수리하고 밤에는 장비 개발에 몰두하는 생활이 5년간 반복됐다. 동결건조기를 먼저 국산화하면서 그 판매 대금으로 초저온냉동고 등 다른 기기들의 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국산이라면 일단 고개부터 내젓던 시절이지만 다행히 실적은 꾸준히 늘었다. 홍 사장이 수리기사 시절부터 쌓아올린 고객들의 신뢰가 든든한 받침대였다. 사연은 이렇다. 그가 근무하던 회사는 제품 판매에만 열을 올리고 사후관리는 뒷전이었다. 순전히 돈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홍 사장은 미안한 심정에 창업 전까지 꼬박 3년 동안 주말마다 대학과 기업의 연구실을 돌며 무상으로 고장 난 실험기기들을 고쳐줬다.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우선 연구진들이 무척 고마워했죠. 당시 얼굴을 익혀뒀던 대학원생들이 지금은 모두 교수진이나 실험실의 간부로 성장했습니다. 모두 일신바이오의 고객들이 된 것이죠. 다양한 실험장비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득이 됐습니다. 실험장비 100여 종의 설계와 작동원리를 익히면서 직접 사내 연구개발을 감독할 수 있게 됐죠.”
적극적인 투자도 성공 요소로 작용했다. 일례로 2000년 한 벤처캐피탈로부터 받은 투자금 10억원을 자동화라인 개설에 남김없이 털어 넣었다. 주문에 따라 한 대씩 소량생산하던 것을 대량양산체제로 바꾼 것. 본격적으로 매출이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는 설명이다.
“최근 들어 국내서도 냉동장비 분야 경쟁자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간 수백 대 이상 대규모로 양산할 수 있는 곳은 일신바이오가 유일하죠. 기술 격차도 좀처럼 메우기 어렵고요. 진입 장벽이 높은 분야라 국내만큼은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내년 새 공장 가동으로 성장 탄력 전망
일신바이오는 경기도 양주 공장 인근에 새 공장을 짓고 있다. 4300㎡(1300평)인 현재 공장 면적보다 6배가량 넓어진 규모다. 완공되면 초저온냉동고가 연 1000대에서 4000대로, 동결건조기가 200대에서 800대로 생산량도 각각 4배씩 늘어난다. 이 공장이 가동되는 내년부터 일신바이오는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들 것으로 점쳐진다. 홍 사장은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바이오장비 수요에 맞춰 수년 전부터 공장 확장을 계획했다. 투자비 120억원은 100% 지금까지 장비를 팔아 모은 돈이며 공사대금을 모두 현금으로 지급했을 만큼 재정도 건실하다.
홍 사장은 지금까지 회사가 안정궤도에 오른 것이 임직원들의 노고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핵심 연구진은 창사 때부터 한솥밥을 먹던 ‘동지’들이다. “새 사옥을 설계하면서 동아리방, 헬스장, 농구장, 축구장 등 복지시설들을 빠짐없이 갖추도록 지시했습니다. 앞으로도 직원들의 복지와 안전한 작업환경을 갖추는 데 아낌없이 투자할 계획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우수한 제품이 나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