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家)의 3세 경영 시대가 본격적인 막을 올렸다. 2010년 12월2일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와 장녀 부진씨가 각각 삼성전자 사장(최고운영책임자·COO)과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사장으로 승진했다. 차녀 서현씨는 제일모직·제일기획 부사장으로 승진해 최고경영자 자리에 한 걸음만 남겨뒀다. 세 남매 중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은 이부진 사장이다. 이재용 사장은 이미 10여년 전부터 이건희 회장의 후계자로 공인된 인물이라 크게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또 이 회장이 인사 전부터 그의 사장 승진을 예고한 바도 있다. 반면 이부진 사장은 전무에서 부사장을 건너뛰어 곧바로 사장으로 승진한 데다, 명실상부한 최고경영자(대표이사)라는 직함을 받았다. 삼성전자와 호텔신라의 회사 규모는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실질적 최고경영자의 첫 테이프를 장남 이재용 사장이 아닌 장녀 이부진 사장이 먼저 끊었다는 점은 세간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몰입경영’ 아버지와 닮은 꼴…

향후 보폭 확대에 관심

이부진 사장의 승진 소식이 전해진 날 오후. 삼성그룹 태평로 사옥 주변에서는 삼성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총수 자녀들의 사장 승진 소식을 화제에 올리는 모습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이재용-부진 남매의 사장 승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듯했다. 삼성 직원들의 대화 가운데 몇 토막이다.

“이부진 사장은 ‘여자 이건희’라며?” “외모도 그렇지만 성격도 회장님을 많이 닮았다고들 하대.” “이부진 사장 때문에 이재용 사장이 영향을 받을까?” “글쎄, 아무래도 혼자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 건 맞지 않을까?” 

삼성 직원들이 ‘여자 이건희’라고 지칭한 이부진 사장. 많은 언론매체들은 흔히 ‘리틀 이건희’라는 수식어를 달아주기도 한다. 어쨌든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점을 주목한 별칭인 셈이다. 하지만 정작 이부진 사장 자신은 ‘리틀 이건희’라는 호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게 삼성 관계자의 귀띔이다. 이부진 사장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떠나 독립적인 경영자로서 자신의 능력과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다는 뜻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여자 이건희’ ‘리틀 이건희’ 평판



 호텔신라 측이 언론에 제공한 공식 프로필 자료는 이부진 사장을 “무엇보다도 적극적이고 노력하며, 몰입하는 진지한 업무 자세가 능력과 자질을 갖춘 차세대 전문경영인으로 성장케 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실제 이부진 사장은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어떻게든 결실을 맺으려는 집념의 소유자로 전해진다. 그의 ‘끝장 승부욕’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가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인천공항 신라면세점 입점을 이끌어낸 일이다.

이부진 사장은 상무 시절이던 2008년부터 루이비통을 인천공항 면세점에 유치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왔다. 특히 베르나르 아르노 루이비통 회장을 설득하기 위해 수 차례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4월 아르노 회장의 한국 방문 때는 직접 인천공항에 가서 그를 ‘영접’해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결국 이런 삼고초려 덕에 신라면세점은 마침내 루이비통을 입점시키는 데 성공했다. 루이비통이 공항면세점에 매장을 연 것은 최초의 일이라서 이부진 사장의 역할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삼성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부진 사장의 루이비통 유치 성공은 아주 ‘큰 건’이다. 루이비통을 세계 최초로 공항면세점에 유치한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 사장이 아르노 루이비통 회장을 직접 설득하며 유치 작업을 주도한 거나 마찬가지다. ‘오너’가 직접 나서서 공을 들인 점이 아르노 회장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님도 그런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부진 사장의 승진 배경에 대한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설명도 ‘성과’에 초점을 맞췄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 부사장은 사장단 인사 후 기자들에게 “삼성의 고유한 성과주의가 반영된 인사다. 뛰어난 성과를 올렸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 승진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2001년 8월 호텔신라에 입사했다. 처음 보직은 기획팀 부장이었다. 이후 2004년 경영전략담당 상무보로 승진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진에 합류한 뒤 상무, 전무를 거쳐 사장에 올랐다.

이부진 사장이 함께한 10년 동안 호텔신라는 양적·질적으로 크게 성장했다는 평가다. 실제 호텔신라 매출액은 2002년 4157억원에서 2010년 1조4500억원(추정액)으로 약 3.5배 신장했다. 연 평균 17%의 고성장을 지속한 결과다. 세전 이익은 같은 기간 무려 7배 이상 급증했다. 그야말로 외형과 내실이 모두 튼튼해진 셈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지난해 ‘CES 2010’행사에 이부진 사장(맨 왼쪽)등 가족을 대동하고 참석해 화제를 모았다. 이 회장 오른쪽으로는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과 부인 홍라희 씨.

호텔신라 급성장으로 능력 인정받아



이런 가파른 성장세에는 ‘이부진 효과’가 적지 않았다는 게 호텔신라 측의 설명이다. 그가 주도한 사업들이 많은 성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특히 면세유통사업의 눈부신 성장은 이부진 사장이 사실상 주도해왔다고 한다. 서울면세점 리노베이션, 인천공항 면세점 진출 등이 그의 작품으로 꼽힌다.

매년 초 개최되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는 항상 언론의 초점이 된다. 세계 전자산업 트렌드는 물론 삼성전자, LG전자 등 토종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최신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그런데 2010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0’에서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파격 행보가 큰 관심을 모았다. 각종 행사에 자주 대동하던 장남 외에 두 딸도 함께 데리고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당시 이 회장은 양손에 부진씨와 서현씨의 손을 꼭 잡고 나타나서는 대뜸 “우리 딸들 광고 좀 해야겠습니다”라고 먼저 취재진에게 말을 건네는 이례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또 자녀들이 일을 잘 배우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아직 배워야죠. 내가 손잡고 다니는 것이 아직 어린애”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이 회장은 두 딸을 승진시켰고, 특히 맏딸에게는 ‘삼성그룹 사상 최초의 여성 CEO’라는 타이틀을 안겨주기까지 했다. 이런 점을 보면 이부진 사장에 대한 이 회장의 애정과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의 책 <삼성을 말한다>에서 이부진 사장의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삼성 내부 사정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이부진은 결코 만만한 성격이 아니다. 이부진은 평소 호텔신라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곤 했다. 삼성석유화학 지분을 대거 인수해 최대주주가 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삼성석유화학은 안정적인 이윤이 보장될 뿐 아니라 비상장회사다. 후계구도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사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부진 사장이 삼성가 후계구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종종 제기돼 왔다. 몇 가지 근거도 있다.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이 두 형을 제치고 경영권을 물려받은 전례가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세간의 추측에 대해 삼성 측은 그 가능성을 일축한다. 삼성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이부진 사장이 오빠와 경쟁할 것이라는 항간의 말들은 어불성설이다. 각자 맡은 회사와 업종이 다른 데다, 승계구도 역시 이미 다 정리된 이야기”라고 잘라 말했다.

세간의 추측은 호사가들의 말뿐일지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부진 사장이 삼성가 3세 경영 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이부진 사장은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외에도 삼성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사장, 그리고 삼성물산 상사부문 고문까지 맡았다. 그의 보폭이 향후 어디까지 넓어질 것인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