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2월14일 충남 아산시의 영인면 농공단지. 어마어마한 화재가 발생했다. 대륙제관의 부탄가스 생산공장에서 전기합선으로 발생한 불이다. 창고로 번진 불길은 보관 중이던 200만개의 부탄가스통을 덮쳤다. 일제히 폭발한 부탄가스의 화력은 엄청났다. 굉음과 함께 불에 탄 가스통 3만여개가 인근 마을로 날아들면서 일대는 아비규환에 빠졌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대륙제관 측의 피해는 처참했다. 공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박봉준 대륙제관 사장은 서울 본사에서 사고를 보고받자마자 주저앉았다. 부탄가스는 대륙제관의 사업에서도 박 사장이 가장 기대를 걸던 부문. 본격적인 성장세를 나타내며 주력사업으로 자리잡아가는 듯했다. 그에 따라 회사 전망도 장밋빛이었다. 전년 매출은 3년 전 박 사장이 취임할 때보다 20% 올랐다. 추세대로면 연말께 매출 1000억원 고지를 돌파할 수 있었지만 희망은 물거품으로 변했다.
박 사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공장을 새로 짓더라도 가동되려면 꼬박 1년 동안 일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손실을 메울 자신이 없었죠. 부탄가스 사업을 접으려고 하자 직원들이 뜯어말렸습니다. 전망이 있고 기술도 갖췄는데 왜 포기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생산이 중단된 기간 동안 연구개발에 매달리면서 다시 도전하자고 채근하더군요. 용기를 얻어 공장 복구와 신제품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초대형’ 화재가 폭발방지기술 개발한 계기
세계 최초의 폭발방지형 부탄가스 ‘맥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대륙제관의 대표상품으로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한 글로벌 히트상품. 박 사장은 이 제품으로 ‘대한민국 가스안전대상’에서 통탑훈장을 수여하는 개인적 영예도 안았다. 폭발사고 뒤 1년간 이를 악물고 맥스를 개발한 것이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사고 직후 대륙제관은 위기였다. 매출이 전년보다 25%나 급락했다. 휴지 한장이라도 아껴야 할 상황이지만 박 사장은 부탄가스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결심했다. 먼저 전소된 공장을 새로 짓고 분당 600개씩 연간 1억개의 부탄가스를 제조할 대규모 전자동 생산라인을 구축했다. 생산성과 안전성을 대폭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였다. 직원들은 독기를 품고 신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부탄가스의 폭발력을 실감한(?) 만큼 폭발가능성을 현저히 낮춘 안전기술이 목표였다.
개발은 쉽지 않았다. 우선 생산단가를 고려해야 했다. 저가 생필품이라는 특성 탓으로 안전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더라도 1000원대 이상이면 제품이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판가스의 밸브처럼 외부에 안전장치를 부착할 수도 없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꼭 맞게 삽입되려면 돌출부가 생겨서는 안 됐다. 최소의 변화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야 하는 어려운 과제였다.
2008년 밤샘 연구가 거듭된 지 2년 만에 폭발방지기술(CRV)이 적용된 부탄가스 시제품이 개발됐다. 바로 맥스다. 구조는 단순했다. 가스통 입구에 12개의 미세한 배출구를 뚫어놓은 것. 가스통이 가열로 팽창하면 가스가 고속으로 배출된다. 가스통이 폭발하기 전에 가스를 비워내는 방식이다. 별도로 부품을 설치할 필요 없이 구멍만 뚫어주면 되기 때문에 가격도 일반제품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맥스의 인기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폭발적이다. 지난해만 6000만개의 수출량을 기록, 수출량만 놓고 볼 때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1위다. 안전성이 확인되면서 일본·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판매가 급증했다. 그 사이 실적도 크게 향상됐다. 2008년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한 후 지난해 1530억원으로 연평균 25% 고속성장했다. 공장 폭발로 빚어진 600억원의 손실을 회복하고도 남았다.
맥스의 성공이 제품의 안전성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보다 해외시장에 주력한 마케팅 전략도 주효했다. 세계에서 부탄가스가 가장 많이 소비되는 곳은 한국이다. 세계 생산량의 40%인 2억개가 가정과 식당에서 소비된다. 그러나 국내시장은 태양산업의 ‘썬연료’가 시장의 70% 가량을 차지하며 독점하고 있다.
박 사장은 국내보다 해외에 영업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러시아 및 독립국가연합(CIS), 태국·베트남·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멕시코·브라질 등 중남미의 광범한 신흥시장에 주목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산층이 빠르게 늘고 있는 지역이다. 레저 수요도 늘면서 야외취사를 위한 휴대용 연료시장도 성장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부탄가스의 수출지역으로 제격인 셈이다. 이들 나라를 포함해 대륙제관은 지난 연말까지 50개국에 맥스를 수출했다.
“해외에서는 부탄가스가 좀처럼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인도나 미얀마, 베트남,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선 판매된 사례가 없죠. 주로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유통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외전시를 나가보면 반응이 뜨겁습니다. 부탄가스의 화력을 보여주고 직접 요리를 시연하면 ‘놀랍고 훌륭하다’는 반응이죠. 러시아의 경우만 해도 연간 100% 이상 수출량이 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부탄가스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에요. 이만한 블루오션이 없습니다.”

제관·에어로졸 사업도 ‘탄탄’
대륙제관은 국내기업에서도 장수한 케이스로 꼽힌다. 창업주는 박 사장의 부친인 박창호(88) 명예회장이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함경북도 함흥에서 피란 온 후 1958년 대륙제관을 설립했다. 당시는 국내에 ‘부탄가스’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이다. 초창기 사업은 미군부대에서 수거한 폐깡통으로 페인트통과 식용유통 등 금속포장재를 만드는 사업이었다. 회사명의 ‘제관(製管)’이라는 말도 금속을 오려내 속이 빈 관을 만든다는 뜻이다.
부탄가스가 핵심사업으로 자리잡은 지금도 제관은 대륙제관의 주력사업이다. 이 회사가 금속포장재로 벌어들이는 돈은 매출의 30%. 시장점유율로는 국내 1위로 노루표페인트, 오뚜기, GS칼텍스 등 액상형 제품을 유통하는 대기업들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에어로졸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보관재인 캔과 내용물을 함께 생산하는 것으로 살충제, 방향제, 분사형 화장품, 산업용 스프레이 등 종류만 200여개다. 살충제의 대명사 ‘에프킬라’가 주문자상표생산(OEM)으로 만들어지는 대표적 제품이다.
부탄가스는 대륙제관이 가장 늦게 손을 댄 사업이다. 현재 매출에서 40%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시작은 초라했다. 1984년 부탄가스 제조를 OEM으로 제조하면서다. 독자 브랜드를 내세운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 일방적으로 수주가 끊기면서다. “당시 ‘대륙 부탄’이라는 브랜드로 독립했지만 성적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인지도에서 썬연료·썬파워 등 경쟁제품에 한참 밀렸기 때문이죠. 대륙제관이 부탄가스로 위력을 발휘한 것은 2008년 맥스로 출시되면서 부터입니다.”
대륙제관의 능숙한 변신은 국내 제관업계에서도 이례적인 사례다. 대부분 영세한 하청업체들로 대륙제관은 이 중에서 드물게 사업 부문을 확장하며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경우다. 비결은 적극적인 연구개발이다. 전체 직원 300명에서 20% 가량이 연구개발 인력인 데다 매년 매출 4% 정도가 신제품 개발과 품질개선에 투입된다. 전통적인 제조업에선 상당히 높은 수치라는 평가다. 그 결과 맥스를 비롯해 다양한 히트작들이 속속 출시될 수 있었다.
‘다층적재캔(Necked-in Can)’이 대표적이다. 4~5단만 쌓아도 쉽게 무너지는 금속포장재를 10단 이상 쌓아도 끄떡없도록 만든 것. 포장재 상단을 윗단의 포장재 바닥과 맞물리도록 만든 게 비결이다. 단순한 구조지만 세계 최초의 시도로 지난해 해표식용유와 노루표페인트의 포장재로 채택되면서 일반 금속포장재들을 대체하는 추세다. 에어로졸 부문은 자체 연구소를 두고 내용물을 직접 개발한다. 지난해 신종플루가 기승을 부릴 무렵 국내 처음으로 항균 스프레이를 개발하며 ‘신종플루 테마주’로도 관심을 모았다.

세계 최대 시장 부상할 ‘중국’ 집중 공략
박 사장의 올해 목표는 우선 내수에만 의존하던 금속포장재를 수출하는 것이다. 다층적재캔을 앞세우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복안이다. 부탄가스의 수출량도 지난해보다 공격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특히 올해는 중국에 집중한다. 중국의 1인당 부탄가스 사용량이 한국의 10분의 1이지만 몇년 뒤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설명이다. 조리문화가 한국과 유사한 데다 한류로 한식당이 확산되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소득이 급증하는 지역이다.
“중국의 외식·레저 분야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5년 안에 연간 5억개의 거대한 시장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세계 시장과 맞먹는 수량이죠. 중국이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지만 부탄가스만큼은 아닙니다. 중국 업체들 중에서 한국에 필적할 안전한 제품을 만드는 곳은 아직 드뭅니다. 우리가 먼저 중국을 선점해 세계 최대 휴대용 연료업체로 성장한다는 계획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