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선업계의 ‘에디슨’ 넘버원 코리아의 초석을 다지다
조선·해양·항공공학 두루 섭렵한 ‘백발의 마라토너 CEO’
불굴의 기술개발 집념으로 숱한 세계일류상품 만들어내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대학교수 2명과 함께 이례적으로 현직 기업 최고경영자 1명에게 수여했다. 그 CEO는 바로 민계식 현대중공업 회장(당시 부회장)이었다. 최고과학기술인상은 세계적인 연구개발 업적 및 기술혁신으로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과학기술인에게 나라가 부여하는 최고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1968년 제정된 ‘대한민국 과학기술상’이 2003년 명칭을 바꾼 것으로 매년 과학의 날(4월21일)에 시상식이 열린다.
당시 교과부는 민 회장의 공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나라 조선공업 초기 열악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설계업무를 수행하고 기술개발을 주도함으로써 조선해양기술의 자립화 및 일류화를 달성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의 조선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함. 탁월한 전문지식과 풍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조선해양분야 외에 중공업분야의 기술선진화에도 크게 기여함. 세계일류상품을 비롯한 신제품 개발을 통하여 수출증대는 물론 기술선진화 및 차세대 수종사업 발굴에 크게 기여함.’
나라에서 그의 공적을 상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민계식 회장은 탁월한 업적을 쌓은 과학기술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캠퍼스)에서 우주항공학과 조선공학 석사학위를 잇달아 따고 MIT에서는 해양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공학자다. 한국으로 돌아와 기업에 몸 담은 후에도 주로 연구개발 분야에서 오랫동안 헌신했다. 현대중공업에서는 CEO와 CTO(최고기술책임자) 역할을 함께 맡아왔다. 조선해양 분야에서는 한국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 바로 민 회장이다.
그는 회사경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연구개발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신기술이나 신제품, 신사업을 구상하고 가다듬는 시간은 주로 직원들이 퇴근한 이후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일에 열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서부터 먼저 퇴근시킨 후 집무실에서 새벽 2시까지 연구에 몰두한다. 거의 20년 이상 어김없이 지켜온 생활습관이라고 한다. 이런 ‘주경야독’의 결실은 놀라울 정도다. 기술보고서 90여종, 학술논문 240여편, 보유특허 300여건. 민 회장이 지금까지 쌓아온 집념의 연구실적이다. 학문연구를 업으로 삼는 대학교수들도 엄두를 못 낼 정도다.
이성호 한국태양광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의 말이다(민계식 회장은 이 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민 회장은) 천생 전형적인 과학기술자죠. 그 연세에도 항상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계세요. 태양광 분야만 해도 그래요. 민 회장은 태양광발전시스템 수직화 기술을 특허로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비좁아 태양광발전을 위한 부지 확보에 핸디캡이 있어요. 그걸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인 셈이죠. 민 회장이 자신의 가치를 높여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앞서가는 생각과 적극적 태도 덕분일 겁니다.”

발명왕 에디슨을 인생의 모델로 삼아
다섯 살짜리 꼬마가 있었다. 꼬마는 어느 날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전기를 읽게 됐다. 그때부터 꼬마는 에디슨의 삶에 흠뻑 빠져버렸다. 꼬마는 자라면서 에디슨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평생 동안 그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
민계식 회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러니까 나는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이론적 과학자보다는 에디슨 같은 실용적 발명가가 되기를 꿈꿔온 것이다. 이런 내 결심은 평생 변한 적이 없으며,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공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여느 소년들이 한때 에디슨을 영웅으로 받들다가 어느새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민 회장은 한평생 그를 인생의 지침이자 벤치마킹 모델로 삼았던 셈이다.
그가 여러 공학 분야 중에서도 조선공학을 택한 것은 나름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국토가 좁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대양으로 진출해야만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것도 고등학교 1학년 때의 기특한 결심이다. 그는 서울대에 들어가 조선공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오로지 조선해양공학자의 외길을 걸어왔다. 민 회장은 “내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최고 권위자가 되고자 노력했다”고 말한다.
대학 졸업 후 ROTC 장교로 군에 다녀온 청년 공학도 민계식은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직전 몇 달간 당시 국영 조선소였던 대한조선공사에서 한국 조선공업의 현실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금 시각으로 보자면 ‘손바닥만한 배’나 겨우 건조하던 시절이다. 그때 청년 민계식은 아마도 한편으로 오기가 발동하고 또 한편으로는 웅지를 품게 되지 않았을까? 훗날 자신이 한국 조선공업을 반석에 올려놓고야 말겠다고 되뇌면서 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B)에서 그는 ‘20세기 3대 유체역학자’로 꼽히는 위하우젠 교수를 은사로 모시는 행운을 얻었다. 위하우젠 교수는 한국에서 건너온 제자에게 한 가지 권유를 했다. “조선공학과 항공공학의 유체역학이 비슷하니 세상 살아가면서 필요한 융통성을 위해 두 가지 모두 공부하는 게 어떻겠는가?”
민계식은 은사의 조언대로 우주항공학과 조선공학을 함께 공부해 둘 다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후 박사학위 과정을 밟기 전에 수 년간 미국의 대표적 조선회사인 ‘리튼십 시스템즈(항공모함, 구축함 설계건조 전문)’와 ‘제너럴 다이내믹스(원자력잠수함 설계건조 전문)’에서 일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1978년 MIT에서 해양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은 한국선박해양연구소. 하지만 얼마 뒤 대우조선공업(현 대우조선해양)에 본격적인 둥지를 튼다. 그는 대우조선에서 11년간 다방면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 직접 설계부 조직을 설립하고 키운 것은 물론 영업, 연구개발, 심지어 생산분야 업무도 관여했을 만큼 마당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우조선과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너인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과 의견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독자기술 개발을 수시로 건의했지만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오너의 생각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단념했다. 마음도 대우조선을 떠나고 있었다.

‘왕회장’의 러브콜로 날개를 달다
그는 1990년 대우조선 연구개발 및 설계총괄 전무직을 끝으로 대우조선과 결별했다. 하지만 조선 분야의 최고 엘리트를 주변에서 그냥 둘 리는 만무하다. 그때 민계식 전무의 손을 잡은 이가 바로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아들인 정몽준 당시 현대중공업 회장(현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함께 그를 찾아갔다. 민계식, 정몽준 두 사람은 나이가 열살 가까이 차이 나지만 MIT에서 수학한 동문이라는 인연도 있다. 정몽준 의원은 MIT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담당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비로소 ‘기술이 미래를 지배한다’는 평소 철학과 소신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됐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독자기술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에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민 회장은 “내 개인적인 삶에 큰 획을 그은 것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님과 그 아들인 정몽준 의원의 권유로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면서부터다”라고 술회한다.
현대중공업은 1995년 기술개발본부를 출범시킨다. 세계적 추세에 맞춰 기술개발 업무를 좀 더 체계적·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3개 연구소를 통합한 것이다. 당시 세계 조선업계는 변화의 시대에 접어드는 추세였다. 특히 범용 선박보다 첨단 고부가가치 선박 개발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고 있었다. 앞선 기술력을 갖춰야만 살아남는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초대 기술개발본부장에는 민계식 부사장이 발탁됐다. 대다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인사였다. 그 자리는 조선업계의 ‘기술개발 전도사’라 할 만한 그에게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었다. 민계식 본부장은 수많은 연구개발 과제를 풀어나가는 선봉장이자 사령탑이었다. 자신이 직접 과제를 맡아 해결하는 일도 허다했다. 세계 조선시장 1위를 구가하던 현대중공업은 기술개발본부를 앞세워 새롭고 강력한 성장엔진을 탑재해나갔다.
정재영 전 현대중공업 상무의 회고다. “90년대 후반 현대중공업은 연구개발 분야가 크게 확대되고 있었어요. 특히 선박해양연구소의 기능이 빠르게 커지던 시기였지요. 여러 종류의 배가 지어질 때라 설계, 구조해석 등 일이 아주 많았어요. 업무가 달라 잘은 모르지만 그 무렵 민계식 부사장은 연구소에 틀어박혀 기술개발에만 엄청 몰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가 있었다지만 그의 주장과 제안이 늘 일사천리로 통과된 것은 물론 아니다. 현대중공업의 고유 디젤엔진 모델을 개발하려고 했을 때는 상사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인적으로 연구한 끝에 마침내 디젤엔진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디젤엔진은 현재 세계 시장 1위의 명성을 얻고 있다.
민계식 회장은 ‘물량의 현대중공업’을 ‘기술의 현대중공업’으로 탈바꿈시킨 주역이다. 2001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한 후로는 주력제품 일류화, 핵심기술 고도화, 생산기술 일류화, 신제품·신기술 개발, 신규사업 창출 등 ‘기술개발 5대 중점 과제’를 정하고 기술중심 경영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임직원들은 “일등상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쿠바 국민들의 전력난 해소한 숨은 영웅
지난해 지식경제부가 발표한 ‘2010 세계일류상품’ 신규 선정 결과에 따르면, 현대중공업은 국내 기업 중에서 가장 많은 31개의 세계일류상품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선박, 디젤엔진, FPSO(부유식 원유생산저장하역설비) 등 15개 제품은 당당히 세계 시장 1위다.
세계일류상품 보유 개수에서 현대중공업은 단연 발군이다. 2, 3위 업체들의 개수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다. 현재 국내에서 10개 이상의 세계일류상품을 보유한 기업은 현대중공업을 포함해 3개사뿐이다. 현대중공업은 세계일류상품 선정 제도가 처음 시행된 2001년부터 10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세계일류상품을 배출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이 기간은 민 회장이 대표이사로 재직한 기간과 그대로 겹친다. 그렇다면 세계일류상품을 대거 배출할 수 있었던 데는 CEO이자 CTO인 민 회장의 역할이 컸지 않을까? 현대중공업의 한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31개의 세계일류상품을 개발하는 데 민 회장이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하겠죠. 회사경영은 물론 연구개발을 총괄해왔으니까요. 현대중공업의 세계일류상품들은 민 회장의 대표이사 재임기간 동안 이룩해낸 빛나는 성과물입니다.”
세계일류상품 가운데 ‘이동식발전시스템(PPS·Packaged Power Station)’은 재미있는 일화를 갖고 있는 제품이다. PPS는 현대중공업이 자체 개발한 디젤엔진(상표명 ‘힘센엔진’)을 주기관으로 삼고 중유·경유를 연료로 사용해 발전기를 구동시키는 발전설비다. 특히 40피트 컨테이너 안에 설비를 갖추는 방식이어서 어디든 이동할 수 있고 설치하기도 용이한 ‘패키지 발전소’다. 이 PPS 제품은 바로 민 회장의 아이디어에서 만들어졌다. 또한 그 안에 탑재되는 ‘힘센엔진’ 역시 민 회장이 주도해 개발한 독자 엔진 모델이다.
PPS는 쿠바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쿠바는 만성적인 전력난을 겪어온 나라다. 강력한 허리케인이 내습해 송배전시설을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06년 쿠바 정부는 ‘전기혁명의 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현대중공업 PPS를 전력난의 ‘해결사’로 선택했다. 중단 없는 전기공급을 위해서는 허리케인 피해지역에 신속하게 설치할 수 있는 PPS가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PPS는 2007년 쿠바 수도 아바나 인근 발전소에 처음 설치됐는데, 현재 쿠바 전력수요의 30% 이상을 충당할 만큼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쿠바 정부는 현대중공업과 PPS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2007년 가장 많이 통용되는 10페소 지폐의 신권을 발행하면서 그 안에 ‘에너지 혁명(Revolucion Energetica)’이라는 글귀와 함께 PPS 세트의 도안을 새겨 넣어 은공을 기렸다. 또 피델 카스트로 당시 국가평의회 의장은 “쿠바도 빨리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민계식 회장의 기술에 대한 집념과 창조적인 발상 하나가 지구 반대편 사회주의 나라에까지 우리의 국위를 선양했던 셈이다.

인생살이도, 경영도 마라톤과 같아
민 회장은 마라톤 마니아다. 달리기를 잘하는 것은 집안 내력이라고 한다. 그는 꼬마 시절부터 두세 살 많은 동네 형들을 따돌릴 정도로 타고난 주력(走力)을 뽐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교내 달리기 대회를 주름잡았고 대학교 1학년 때(1961년)에는 ‘9·28 서울수복기념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맨발의 마라토너’로 유명했던 아베베 비킬라와 함께 달려 2시간23분대 기록으로 7위를 차지하는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로선 워낙 출중한 실력이었던지 마라톤 국가대표선수 제의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마라톤선수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마라톤과 평생을 함께했다. 지금까지 완주만 300회 이상 했다. 우리 나이로 칠순인 지금도 3시간30분대에 결승선을 통과할 정도란다. 울산 본사에서는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을 이용해 조선소 앞 방파제를 수시로 뛴다. 10~15km 정도는 기본이다. 종종 직원들과 함께 뛰며 현장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민 회장은 어느 칼럼에서 달리기의 장점을 3가지로 꼽은 적이 있다. 첫째는 경제적이고 서민적인 운동이라는 점이다. 신발과 팬츠만 있으면 준비 완료다. 둘째는 모든 운동의 기초이자 공정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복잡한 규칙이 필요 없거니와 그저 잘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가장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의 말이다. “마라톤과 경영, 나아가 인생살이는 비슷한 점이 많다. 도중에 많은 역경을 겪지만, 인내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민계식 회장은 조만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지난 2월15일 현대중공업 이사회에서 내린 결정이다. 꼭 10년의 임기를 채운 셈이다. 민 회장은 대표이사에서 퇴진하지만 회장직을 유지하면서 현대중공업의 미래지향적인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현대중공업의 한 간부는 “민 회장님이 대표이사로 재임한 지난 10년 동안 회사가 눈부시게 성장해왔는데, 이제 물러나신다니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서류결재 등 자질구레한 업무에서 벗어나면 회사를 위한 더 큰 비전을 제시해주실 수 있다는 기대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민계식 회장이 CEO 직함을 떼낸다 하더라도 그가 기틀을 세운 기술중시의 사풍(社風)은 온전히 남지 않을까 싶다. 이미 기술개발과 혁신은 세계 1등 조선업체 현대중공업의 버팀목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즐겨쓰던 격언 한 줄을 옮겨 놓는다.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참고 : <과학기술인! 우리의 자랑>
(한국과학문화재단 편저)
■ 민계식 현대중공업 회장
1942 서울생
1965 서울대 조선공학과
1969 미국 캘리포니아대 우주항공학 석사
1970 미국 캘리포니아대 조선공학 석사
1978 미국 MIT 해양공학 박사
1979~1990 대우조선공업 연구개발 및 설계총괄 전무
1990~2001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담당 부사장
2001~2003 현대중공업 CTO, 공동대표이사 사장
2004 현대중공업 부회장
2010 현대중공업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