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와인은 ‘돈’이 아니라 ‘정신’
철학맞는 와이너리와 정보 공유

우리나라의 현대, 일본의 토요타, 미국의 제너럴모터스, 독일의 다임러, 프랑스의 푸조, 이탈리아의 피아트가 서로 협력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별도 모임을 만든다면 어떨까. 경쟁관계인 이들 회사가 모임을 결성한다면 마케팅 비용을 절약할 수 있을뿐더러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모임에 가입하지 않은 자동차 메이커들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와인업계에는 이 같은 모임이 벌써 결성돼 있다. 세계 최고 와인 명가들의 모임인 프리멈 파밀리에 비니(Primum Familiae Vini)가 바로 그것이다. 라틴어로 ‘최초의 가족와인(First families of wine)’이라는 뜻의 이 모임은 세계 와인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그야말로 와인업계의 최고 이익단체다. 물론 자동차와 와인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PFV가 다른 산업분야에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가족 경영 와이너리만 가입 가능
PFV의 역사는 지난 1990년 스페인의 와이너리 미구엘 토레스의 오너 미구엘 토레스와 프랑스 부르고뉴에 있는 메종 요제프 드루앙의 오너 로베르 드루앙이 만나 새로운 형식의 와인공동체를 구상하면서 출발했다. 가족 경영 와이너리의 대표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와인에 있어서 동일한 철학을 추구하고 있으며 가족 경영에 관련된 동일한 문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돼 비슷한 와이너리들의 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싹트게 됐다.
이듬해 미국 캘리포니아의 와인대부 로버트 몬다비, 포르투갈의 시밍톤 패밀리, 이탈리아의 안티노리가 모임에 동참하게 되면서 규모가 커졌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 자주 만남을 가진 끝에 1993년 공식 단체를 발족하고 당시 협회는 회원수를 12개의 와이너리로 제한했다.
PFV는 1994년 프랑스의 알자스에 있는 와이너리 위겔 피스에서의 첫 모임을 시작했다. 창단 멤버에는 위에서 언급한 미구엘 토레스, 메종 요제프 드루앙, 로버트 몬다비, 시밍톤 패밀리, 안티노리, 위겔 피스 이외에 독일의 에곤 뮐러-샤르츠호프, 프랑스 론 지방의 폴 자불레 에네, 프랑스 샴페인 지방의 폴 로제, 프랑스 보르도의 샤토 무통 로칠드, 샤토 코스-데스투르넬, 스페인의 베가 시실리아다.
이 모임은 단일 가족이 운영하는 와이너리만 가입할 수 있다. 때문에 1998년 타일란그룹에 매각된 샤토 코스-데스투르넬, 2004년 컨스텔레이션 브랜즈에 매각된 로버트 몬다비, 2006년에 장-자크 프레이에 매각된 폴 자불레 에네는 PFV에서 강제 탈퇴됐다. 이를 대신해 2004년 사시카이아를 생산하는 이탈리아의 데누타 산 귀이도, 2006년 프랑스 론 지방의 유명 와이너리 샤토 드 보카스텔이 이 모임에 가입했다. 현재 PFV에서 활동하고 있는 와이너리는 총 11곳이다. 로버트 몬다비가 빠지면서 지금은 모든 회원이 유럽 와이너리 일색인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국가별로는 프랑스의 와이너리가 5개로 가장 많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와이너리가 각각 2개 그 외 독일과 포르투갈의 와이너리가 1개씩 포함돼 있다.
대기업에 인수되면 바로 탈퇴해야
PFV 정식회원의 자격조건은 까다롭다. 기본적으로 자체 포도밭을 소유하고, 지역에서 와인 생산자로 명망이 있어야 한다. 세계 최고 명성의 와인을 생산해야 하고, 가족 단일경영 체제를 갖추어야 하며, 기존 멤버의 만장일치 찬성이 있어야만 한다. 회장은 매년 돌아가면서 맡는데 현재는 베가 시실리아의 파블로 알바레즈가 활동중이다. 수많은 유명 와이너리들이 이 모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철학이 다른 와이너리와 함께할 수 없다는 원칙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다.
PFV가 이토록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은 제품 생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품질’이기 때문이다. 가족경영 형태로 운영되는 와이너리들을 한데 묶어 와인주조의 도덕적 가치는 물론 포도재배, 양조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자 하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 이 모임에서는 각자가 생산한 와인의 품질과 토양, 기후 등 재배조건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지켜온 각자 가문의 와인주조 방식도 공개한다. 이를 통해 PFV는 건전한 와인문화 창달에도 기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최근 PFV가 2~3세 후손간 만남을 자주 갖는 이유도 이 같은 선대의 와인 철학이 후대에 자연스럽게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일부에서는 PFV를 가리켜 와인 큰손들의 사교모임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같은 와인 명가의 모임을 배타적이며 이기적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오히려 각 와이너리의 정보, 와인 생산철학을 공유하고 후대에 전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PFV에 속한 와이너리들은 전통과 장인정신으로 좋은 와인을 생산해 해당 지역·국가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훌륭한 수출역군이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다른 와이너리와 구별된다. 와인 마케팅은 보통 개별 생산자, 와인산지, 와인 생산국 혹은 와인 수입업자 별로 이루어지는데 PFV는 예외다. 직접 판매가 원칙이다. 그러면서 서로 경쟁해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낸다. PFV에 가입돼 있다는 것 자체가 명품 와인이라는 뜻이다.
* 박찬준 와인칼럼니스트는...
연세대(법학)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쾰른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독일 쾰른대 부설 범죄학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와인의 매력에 빠지면서 지금은 와인 용품을 제작, 해외로 수출하는 디렉스인터내셔날 대표를 맡고 있다. 독일와인협회 공인 와인 저널리스트로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