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케네디, 린드버그(최초 대서양 횡단 비행자), 마거릿 미첼(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저자), 이사도라 던컨(현대무용의 어머니).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은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인류 역사에 한 획을 쓴 위인들을 기업광고 모델로 사용하고 있다. 왜일까. 그건 바로 도전정신이야말로 오늘날 한세실업을 세계적인 OEM의류업체로 만든 비결이자 지금까지 김 회장이 걸어온 길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전하지 않고 성공을 말할 수 없다’는 격언처럼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한세실업이 미국에 내다판 옷은 2억300만 장. 2010년 미국 전체 인구가 3억870만명인 것을 감안할 때, 미국 인구 1.5명당 1벌씩 한세실업 옷을 산 셈이다. 한세실업은 한물갔다는 의류산업도 글로벌 ‘넘버원’ 산업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하고 있다. 지난 2003년 온라인서점 예스24를 인수한 뒤 IT콘텐츠라는 신 영역에 도전하고 있는 데는 김 회장의 스피드, 신뢰, 소통 경영이 자리 잡고 있다.

자체 브랜드 개발 중국시장 공략 나서…예스24 인수, 신사업 도전



'미국인 3명 중 1명은 한세실업의 옷을 입습니다.' 

지난해 한세실업의 광고 문구다. 지난 2002년 ‘9명 중 1명’에서 출발한 광고문구는 7명(2003년), 6명(2004년), 5명(2005년)으로 감소하더니 작년에는 3명으로까지 줄었다. 지난해 한세실업의 수출량을 통계 내보면 이미 2명 선이 깨졌기 때문에 올해부터는 2명으로 낮춰도 된다. 이 추세라면 앞으로 거의 모든 미국인들이 매년 한 벌씩 한세실업의 옷을 사는 날도 머지 않았다.



한세실업이 생산하는 옷은 미국 대형 할인매장 월마트, 타깃을 비롯해 나이키, 갭, 아메리칸이글, 애버크롬비&비치, 리미티트 등에 납품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제품을 생산하면 발주자와 생산자는 갑(甲), 을(乙)의 관계다. 디자인부터 원단까지 제품개발 재량권은 오로지 갑인 발주자의 권한일 뿐 을의 역할은 단순 생산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글로벌 의류업체들에게 한세실업은 여느 ‘을’기업이 아니다. ‘슈퍼 을’기업이라고 할까. 월마트, 타깃은 아예 한세실업에게 디자인부터 원단선택, 제작까지를 모두 맡긴다. 전문용어로 제조자디자인생산방식(ODM)인데 이 모든 것을 일임한다는 것은 품질 하나만큼은 믿는다는 오랜 신뢰가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의류 OEM시장에서 이 같은 ‘슈퍼 을’기업은 한세실업을 포함해 10곳이 채 넘지 않는다.



2년 만에 김동녕 회장을 다시 찾아갔다. 인터뷰를 위해 방문을 노크하자 2년 전과 똑같은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고 김 회장이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입고 있었던 옷은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마크가 선명한 미국프로축구(MLS) 공식 유니폼. 2년 전 만남에서 김 회장은 “나이키는 우리 고객이다. 재고가 하나 있어 즐겨 입는데 어떠냐”며 방긋 웃었는데 2년이 지난 지금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우리 제품을 내가 아니면 누가 알아주냐”는 것이다. 



좀처럼 미국 소비 시장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한세실업과 같은 의류업체들에게는 소비 위축의 피해가 심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김 회장에게 경기 불황의 여파를 물으니 빙그레 웃으며 “심각할 것 같죠?”라고 되물었다. 



“소비심리는 위축된 게 맞아요. 당장 의류 판매량이 예전만 못 하죠. 그런데 우리와 같은 ODM업체들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소비시장이 위축되면서 주요 발주기업들이 생산자 수는 축소하는 대신 우수 업체와의 거래는 늘리는 ‘딥 앤드 내로’(Deep & Narrow) 전략을 쓰고 있기 때문이죠. 잘하는 기업에게 (물량을) 몰아주는 식이라고 할까요. 기술력이 뒷받침되니 중국, 동남아 업체들과 격차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갑이 얇아지면 사람들의 씀씀이가 ‘적은 돈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예요. 한 벌을 사더라도 품질이 좋은 옷, 그게 바로 우리의 강점이에요.”

매출 1조원대이지만 사옥없어

김 회장의 좌우명은 ‘한 발짝 천천히 가자’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듯 김 회장의 리더십은 ‘신중함’으로 요약된다.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도 보수적이다. 연 매출 1조원을 앞두고 있지만 회사이름으로 된 사옥 하나 없다. 사옥을 살 형편이 못 돼서가 아니다.



“부동산 투자요? 해외에 공장을 지었으니 그게 부동산에 투자한 게 아닌가요. 한국에 생산시설 하나 없는데 무엇 하러 부동산을 사나요? 임대로 살면 되지.”



대신 결정은 신속하다. 한세실업이 창립 30년 만에 세계 톱클래스의 ODM업체로 성장하게 된 것은 ‘스피드’경영에서 비롯됐다. 이 회사의 강점은 의사결정이 빠르다는 데 있다. 유행에 민감한 의류산업의 특성상 신속한 의사결정은 사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 변수다. 김 회장은 회사 초창기부터 분권화된 조직관리를 실천해 왔다. 수십억원에 달하는 수입원단 결정권이 이 회사에서는 김 회장이나 임원이 아닌 실무자(팀장)에게 있다. 김 회장은 늘 “내일의 최선책보다 오늘의 차선책이 낫다”고 말한다.



동시에 한세실업은 철저한 팀 중심 문화다. 5~10명으로 구성된 팀이 영업망 관리부터 원자재 조달까지를 모두 책임진다. 6개 본부에 35개의 팀으로 구성된 한세실업의 조직은 철저한 경쟁체제다. ‘무조건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목표 아래 각 팀은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  때문에 한세실업의 품질은 해외에서 먼저 알아준다. 지난해 할인매장 타깃에서 판매된 최고의 히트 상품 ‘아티스트 T’는 한세실업이 상품 전체를 기획해 만든 제품이다. 현재 한세실업은 서울과 뉴욕에 40명에 달하는 테크니션 디자이너를 양성해 디자인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데 순수 OEM만 주던 몇몇 업체들도 “디자인을 보여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 2003년 온라인서점 예스24를 인수할 때도 김 회장의 스피드 경영은 빛을 발했다. 검토부터 인수·합병(M&A)까지 1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당시 그가 예스24의 성장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온라인비즈니스 성장 가능성 △지배구조, 회계 투명성 등으로 요약된다. 출혈 경쟁으로 영업이익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지만 김 회장은 그보다 성장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그전까지는 의류업체 M&A만 생각하고 있었는데(한세실업은 지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쌍방울, 신성, 세계물산 등 국내 의류업체 인수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막판에 고배를 마셨다), 갑자기 B2C(기업과 소비자 사이 거래)비즈니스가 하고 싶어졌어요. 우리처럼 B2B(기업과 기업 사이 거래)만 하는 업체들은 최종 소비자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데, 아무래도 고객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체득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늘 최첨단 B2C사업이 뭘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스24가 눈에 들어왔어요. 일단 대주주의 지분이 많지 않아 경영진이 전횡할 소지가 적어 보였어요. 물론 조카의 강력한 추천도 있었지만요.(그의 조카는 예스24의 경쟁자인 ‘알라딘’의 조유식 대표다) 인수하고 나서 보니 제 생각이 맞았어요.”



인수 직후 경기도 파주에  창고관리시스템(WMS), 디지털 분류시스템(DAS) 등을 적용한 첨단물류공장을 2만9422㎡(8900평) 규모로 세워 ‘당일 총알배송’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도 ‘최고의 제품을 가장 신속하게 고객에게 공급해야 한다’는 그의 스피드경영에서 비롯됐다. 물론 첨단 물류시스템 도입으로 물류비도 11%에서 8%대로 낮아졌다. 



이 같은 스피드경영이 가능했던 것은 직원들에 대한 김 회장의 신뢰경영이 큰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그는 직원들과 격의 없는 소통과 대화로 신뢰를 쌓고 있다. 한세실업은 매주 화, 수, 목요일마다 아침 7시 본사 앞 여의도공원에서 임원이 참석한 가운데 팀별 아침 ‘조깅미팅’이 열린다.

대미수출의 전진기지로 성장한 한세실업 베트남 공장(왼쪽)과 김동녕 회장이 직원들과 힘차게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대미수출의 전진기지로 성장한 한세실업 베트남 공장(왼쪽)과 김동녕 회장이 직원들과 힘차게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모습.



조깅미팅으로 직원들과 벽 허물어

4월 셋째 주는 김 회장이 담당이라서 인터뷰가 있었던 지난 4월 13일 아침 그는 직원들과 여의도공원을 달렸다. ‘달리다 걷다’를 반복하며 여의도공원을 두 바퀴 정도 돌다 보면 회장, 직원이라는 직책은 사라지고 ‘우리’ ‘동료’만이 남는다. 조깅 후 아침 식사 겸 티타임 장소는 늘 그렇듯 회사 근처 커피전문점이다. 이날 주제는 “앞으로 한세실업이 세계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야 하느냐”였는데 아프리카, 남미는 물론 방글라데시, 라오스 등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저개발국가 이름이 죄다 나왔다. 심지어 어떤 직원은 “왜 굳이 다른 나라에 공장을 짓느냐, 그럴 바에 차라리 지금 공장이 들어선 베트남, 인도네시아에 증설하자”고 대답했다. 직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한세실업의 성공요인을 꼽으라면 단연 발 빠른 세계진출일 것이다. 1988년 사이판에 첫 공장을 세운 한세실업은 현재 니카라과(1998년), 베트남(2001년), 인도네시아(2005년), 과테말라(2006년) 등지에 해외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현지화를 통한 원가 절감만으로 한세실업과 김 회장의 성공을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수많은 기업들이 해외로 나갔지만 한세실업처럼 회사가 커진 기업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현지화 비결은 무엇일까. 김 회장은 이를 ‘신뢰’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애초부터 그는 사이판이 대미 수출로는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은 자국에 수출하는 국가들에게 쿼터(quota·배당량)라는 가이드라인을 두었다. 하지만 미국령인 사이판은 쿼터 제한이 없는 데다 무관세 지역이었다. 남은 문제는 봉제산업에 대한 현지인들의 불신이었다. 봉제회사가 들어오면 환경이 오염돼 주 수입원인 관광산업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한 지역민들에게 정부로부터 받은 인허가 서류를 내보여도 소용이 없었다. 철골재인 ‘H빔’이 다 녹슬 정도로 시간은 흘러갔다. 김 회장은 지역민들과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걸 여기서 배웠다고 한다. 2㎞에 달하는 하수도관을 매설해 주고 인근 각급 학교 편의시설을 교체해 주면서 지역민들과 신뢰를 쌓았다. 2001년 베트남에 진출할 때도 똑같은 전략을 썼다. 한세실업은 지금도 매년 호치민시 외곽 구치 내 7개 고등학교마다 30명씩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있다.



“구치가 어떤 곳인 줄 아세요? 베트남전 때 베트콩 세력이 가장 강했던 곳이 바로 구치였어요. 제가 거기에 공장을 짓는다고 하니 다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립디다. 드센 사람들이라고요.”



“베트남은 시급제로 돈을 줘야 해요. 공장은 지었는데 일감은 없고, 답답했죠. 본사에 보고했더니 회장님께서 “그냥 쉬지 말고 직원들 공장 나오게 해서 그냥 놀아라”라고 지시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직원들하고 진짜 배구시합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베트남 노동법을 교육시켰어요. “당신들 나라 노동법이 이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우리가 잘못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따지라”고 말이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사의 사정을 설명했는데 한번은 2500명 전 직원에게 편지를 쓴 적도 있었습니다.”



초기 베트남 공장에서 근무했던 김상률 한세예스24홀딩스 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의류 아닌 패션을 만드는 회사”

당시 김 회장의 주문사항은 “우리보다 못산다고 우습게 보지 마라. 무조건 섬겨라. 경조사는 무조건 참석하라, 봉제는 체력싸움이니 밥은 꼭 먹여라”는 것뿐이었다. 급여도 최고수준으로 지급할 것을 지시했다. 그 결과 지금 한세실업의 베트남공장은 49만5867㎡(15만 평) 부지에 172개 라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직원 수만 1만2500명에 이르는 최대 수출기지로 성장했다. 지난해 이곳에서 생산된 의류수만 8400만 장이다. 한국에서 베트남에 투자한 기업 중 최대 규모다. 이 때문에 현지에서는 한세실업을 가리켜 ‘베트남의 삼성’이라고 말한다. 퇴직률은 ‘제로’에 가깝다. 되레 못 들어와서 안달이다. 한세실업은 올해 제3법인(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예스24를 인수한 뒤 별다른 잡음 한번 내지 않은 것도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신뢰 때문이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인재론 ‘믿지 못하면 맡기지 않고, 일단 맡겼으면 끝까지 믿는다’(疑人不用 用人勿疑)는 것과 같다. 2003년 예스24를 인수해서 그가 제시한 것은 “무조건 매출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인수 직후 100% 유상증자를 실시한 후로는 “더 이상의 자금투자는 없다”고 공언한 김 회장은 ‘3년 뒤 거래액 3000억원, 수익 100억원’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러고는 비전과 목표를 공유했다. 회사경영의 주안점을 시장점유율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영업이익에서 찾았다. 점령군 행색도 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한세실업에서 데리고 오지 않고 김 회장 혼자 매일 오전에 한세실업에서 근무하고는 오후 3시 예스24로 출근했다. 그 결과 1년 만에 예스24는 기적처럼 흑자 전환했다. 그리고 그는 2008년 지주회사 한세예스24홀딩스를 출범시켰다.



김 회장은 쓰디쓴 실패도 경험한 경영자다. 1972년 ‘한국과 세계를 잇는다’는 뜻으로 한세통상(한세실업 전신)을 설립했지만 7년 만인 1979년 2차 오일 쇼크를 만나 결국 회사가 부도났다. 하지만 탄탄한 신용 탓에 그는 3년 만에 부도를 털고 한세실업을 세웠다. 그가 ‘현실 가능한 목표를 세우되 무조건 천천히 가자’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은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로부터는 줄곧 성장세다. 단 한 해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오히려 매출 성장폭이 더 커졌다. 일찍부터 해외에 생산기지를 지은 데다 2차 제조업(한세실업)과 3차 서비스업(예스24)이 서로 안정적으로 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카이자 경쟁업체 대표인 조유식 알라딘 대표는 김 회장을 “정말 부지런하고 도전정신이 강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의 기상시간은 언제나 5시30분. 인터뷰 도중 아이패드를 검색해 가며 관련 정보를 확인할 정도로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관심도 많다. 온라인서점 대표답게 회장실 한 면 전체가 책들로 가득 꽂혀 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라고 할까. 투명경영을 몸소 실천해 자신의 해외출장 비용도 손수 영수증을 첨부해 담당직원에게 결제를 받는다.



“의류는 사양산업이지만 패션은 최첨단 산업입니다. 그리고 패션에는 국경이 없어요. 월드 와이드(World-Wide) 산업이죠.” 김 회장이 대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지난해 자체브랜드 NYbH(New York by Hansae)를 만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는’(虎視牛步) 스타일의 경영자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남의 말을 잘 듣고 신뢰하는 경청(傾聽)의 대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김동녕 회장은… 

1945년 서울 출생, 54년 경기고(60회), 68년 서울대 경제학과(64학번)를 졸업한 뒤 72년 미국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를 취득했다. 82년 한세실업을 세운 뒤 2003년 예스24를 인수했다. 2008년에는 지주회사인 한세예스24홀딩스를 출범시켰다. 현재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