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화는 팬택의 스마트폰 베가로, 신문은 삼성전자 갤럭시탭으로 읽는다. 회식은 원할머니보쌈에서 개최하고 연인과는 카페베네에서 만난다. 이동할 때는 기아차 K7을 이용하고 누군가를 추적할 때는 현대모비스의 GPS와 블랙박스에 의존한다…. 현재 PPL(Product in Placement)이 거의 모든 드라마에 등장하는 국내 드라마 속 풍경이다.
PPL은 방송·영화업계의 제작사가 제작비를 마련하려기 위해 도입한 광고기법이다. 기업의 제품을 드라마·영화에 등장시키고 광고비를 받는 형태다. 국내 방송 콘텐츠가 한류열풍의 중심이 될 만큼 인기가 치솟고, PPL로 대박을 터뜨린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시장은 확대일로다. 정부가 지난해 1월 방송에서 브랜드를 노출할 수 있도록 규제마저 완화하면서 파급력은 더 커졌다.
최근엔 공공기관들도 PPL을 애용하는 추세다. 지난 3월 종영된 SBS 인기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주인공 오스카(윤상현 분)는 무대에서 금연가를 불렀다. 보건복지부가 금연홍보를 조건으로 제작비에 1억5000만원을 보탰기 때문이다. 지자체들도 영화·드라마 제작진에게 관할지역을 촬영지로 지원하는 데 적극적인 분위기다. PPL전문업체인 어치브그룹디엔의 정인영 팀장은 “PPL은 제작비가 필요한 외주제작사들과 제품·서비스의 홍보가 필요한 기업·기관들이 윈윈하는 광고기법”이라고 강조했다.
PPL의 주무대는 드라마다. 고정적으로 시청자층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른 콘텐츠로도 확산되는 추세다. 기아차는 MBC의 신인가수 선발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우승자 경품으로 주력모델인 K7을 협찬했다. 상조업체 예다함은 지난 3월 개봉한 영화 <로맨틱 헤븐>에 초상화, 차량, 상복 등 장례용품을 지원했다. 홍헌표 한국광고주협회 조사본부장은 “드라마에 등장할 수 있는 소품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고 강조하며 “규모를 가늠하기 힘든 큰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PPL이 대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시청자들이 드라마나 영화 속 제품을 외면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렇다고 스토리의 전개는 무시한 채 제품만 조명하면 비난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시청자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려는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는 이유다.
유형#1 제품 노출형
방송물 인기 타면 카메라만 비춰도 ‘이미지 업’
MBC 일일시트콤 <몽땅 내 사랑>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박미선이 김 집사(정호빈 분)에게 애경의 세탁제 ‘리큐’를 내밀며 사용법을 일러준다. “앞으로는 이것만 써요”라고 주의까지 덧붙인다. 마치 CF를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애경은 이런 공격적인 PPL 덕분에 리큐의 국내 세제 시장점유율을 지난 4월 20%까지 끌어올렸다. 출시 9개월만이다.
드라마에서 제품이 노출되는 것은 가장 흔한 PPL 방식이다. 그러나 인기 프로그램에 등장하면 카메라로 제품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발생한다. 케이블의 인기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가 대표적이다. 신인가수를 선발하는 이 프로그램의 심사단 책상은 항상 ‘코카콜라 제로’가 음료로 준비된다. <슈퍼스타K>는 시청률 3%를 넘기기 어려운 케이블 방송에서 18%의 이례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 한국코카콜라 관계자는 “자체조사 결과 지난해 7월 첫 방송 한 달 만에 인지도가 70% 이상 상승했다”고 말했다.
PPL은 트렌드도 반영한다. 최근 들어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스마트폰이 대표적이다. 모바일기기들이 생활 필수품이 된 것처럼 드라마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지난 2월 종영된 SBS 첩보 드라마 <아테나: 전쟁의 여신>에서는 주인공인 정보기관 요원들이 암호를 해독하고 기밀정보를 공유할 때마다 스마트폰이 등장한다. 팬택의 베가와 미라크다. 첨단제품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적당한 설정이라는 지적이다.
SK텔레콤은 블랙베리를 지난 3월 종영된 SBS 범죄수사물 <싸인>에 등장시켰다. 이 스마트폰은 국과수 법의학자들과 경찰들의 긴박한 통화 장면마다 등장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건현장에서 증거물로 발견되는 휴대전화도 모두 블랙베리다. 삼성전자의 갤럭시탭도 PPL의 단골품목이다. <욕망의 불꽃>, <메리는 외박 중>, <괜찮아 아빠 딸> 등 드라마뿐 아니라 지난해

유형#2 장소 제공형
약속 장소·일터…지속적인 매장·브랜드 노출에 ‘주효’
촬영지를 선택하는 것은 드라마 제작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주인공이 이동하면 촬영지가 바뀌기 때문이다. 인파가 가득한 쇼핑몰과 백화점, 약속한 만남이 이뤄지는 커피전문점과 레스토랑, 사극이 촬영되는 지방 명승지 등도 중요한 PPL 대상이다.
국내 최대 커피전문점 카페베네는 PPL로 성장한 대표적 사례다. 이 업체는 2008년 론칭한 커피전문점 후발주자였다. 그러나 업계 최초로 매장을 드라마 촬영지로 지원하면서 인지도를 급속히 끌어올렸다. 드라마 애청자들 사이에서 “왜 스타들은 카페베네만 가느냐”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PPL에 적극적이었다.
본격적인 성장세는 2009년 SBS 인기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 협찬하면서부터다. 매장에서 촬영이 진행되면서 제품과 브랜드가 지속적으로 노출됐다. 김동한 카페베네 마케팅팀장은 “등장인물들이 매회마다 카페베네에서 만나면서 시청자들의 눈에 띌 일이 많아졌다”며 “가맹점을 개설하려는 문의가 급증한 것도 이때부터”라고 말했다.
PPL 장소들은 등장인물의 일터로도 등장한다. 주인공의 모습과 함께 계속해서 매장이 드라마에 등장하기 때문에 유용한 설정이다. KBS2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에서 김현찰(오대규 분)이 운영하는 ‘모녀보쌈’이 대표적이다. 보쌈 프랜차이즈인 원할머니보쌈이 협찬했다. 촬영지를 제공한 것뿐 아니라 배달용 오토바이, 유니폼, 메뉴판 등 다양한 소품들도 지원했다.
식품업체 아워홈의 식품브랜드 손수는 SBS 드라마 <호박꽃순정>에 PPL로 참여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회사가 ‘손수’로 같은 이름을 쓰도록 한 데다 식품들도 드라마에 등장시킨다. 회사 관계자는 “드라마에 등장한 고등어무조림, 돼지고기장조림이 전년보다 140% 이상 매출이 늘었다”고 밝혔다.

유형#3 스토리텔링형
자연스러운 PPL 등장으로 시청자 공감 유도
<시크릿가든>은 신드롬을 일으켰다. 30%대의 높은 시청률도 화제였지만 짜임새 있는 PPL도 업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PPL 협찬자들을 모집, 제품과 서비스의 특징들을 등장인물의 성격과 스토리에 치밀하게 반영했다. 제품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스토리를 구성하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여주인공 길라임(하지원 분)은 스턴트우먼이다. 직업상 아웃도어 의류를 즐겨 입는다. 아웃도어 의류업체 몽벨이 전담한 길라임의 의상은 매회 등장할 때마다 대부분 ‘완판’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등산이나 암벽타기 등 아웃도어 의류가 필요한 상황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몽벨 제품의 완판 행진이 유지된 이유다.
남주인공 김주원(현빈 분)도 마찬가지다. 재벌2세 경영자답게 고급스포츠카 BMW Z4를 타고 다닌다. 제작사측은 김주원이 폐쇄공포증이 있다는 설정에 맞춰 BMW 모델에서도 지붕이 없는 컨버터블을 선택했다. 이기현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은 “PPL에 직업, 성격, 취향 등 극중 인물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추세”며 “시청자들이 자연스럽게 제품에 몰입할 수 있어서 효과가 높은 기법”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