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부 재벌그룹과 대기업들이 ‘땅굴파기(Tunneling)’에 여념이 없다. 갑자기 웬 땅굴파기인가? 기업 프렌들리 정부가 끝나기 전에 땅굴을 완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터널링의 사전적 의미는 ‘땅굴을 뚫어 길 만들기’다. 경제학에서는 ‘대기업이 기업그룹의 이익을 특정기업에 몰아주어 재산과 기업을 편법으로 상속(지배주주의 지분이 낮은 기업에서 높은 기업으로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기업 오너가 자녀나 친인척에게 지분 100%인 회사를 하나 차려 준다. 그 다음에는 그룹 내 계열사를 총동원하여 일감을 몰아주고 더 나아가 높은 이익까지 안겨 줌으로써 합법을 가장하여 비밀리에 부를 넘기는 지하상속 수법이다. 피상속인은 초우량 기업으로 둔갑한 자신의 기업을 증권시장에 상장해 엄청난 재산으로 뻥튀기하는 수순을 밟는다.



일부 대기업의 탈세, 편법상속 수법은 갈수록 고도화·지능화되고 있다. 70년대에는 주식을 싸게 넘겨주는 방식을 썼다. 그러나 주식을 바로 넘기는 것이 쉽게 노출되자 단점을 보완,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 권리를 보장하는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이용했다. 요즘 편법상속의 대표주자가 ‘일감 몰아주기’다. 이와 더불어 ‘뭉칫돈 배당’이 유행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지금까지 상장사의 배당성향이 20%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순이익보다 많은 135%를 배당한 재벌 계열사도 여럿이며 심지어 1000% 이상을 배당하는 기업도 있다. 주주는 단 몇 사람, 오너의 자녀와 친인척뿐이다. 염치도 없고 눈치도 볼 것 없다는 세태다. 



조선일보 3월 15일자 보도에 따르면, 대기업 오너의 자녀나 친인척이 대주주로 있는 비상장회사들이 계열사와의 거래를 통해 매출을 일으키는 내부거래 비율이 평균 46%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에 포착된 것만 이 정도인데 위장계열사 등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것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10대 그룹에 속한 계열사는 4월 1일 현재 649개다. 노무현 정권이 끝난 2008년 3월 말(434개)에 비해 50%나 늘어났다. 이대로 가면 이 정부가 끝나는 2013년 3월이면 두 배가 넘을 것이란 전망이다. 

‘재벌공화국의 시대’ 재개 조짐 

편법상속과 문어발 확장이 방치되면서 대기업들이 국민경제에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높아졌다. 2008년 우리나라 10대 그룹의 총자산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55%였지만 2010년 말에는 76%로 뛰었다. 지난 3년 동안 10대 그룹의 자산은 565조원에서 887조원으로 60%나 늘었지만 GDP는 1026조원에서 1172조원으로 12% 증가에 그쳤다. 중소기업의 실상은 더 참담하다. 한국거래소의 자료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중견기업 이상 대기업의 지난해 순이익은 70% 이상 급증했다. 반면에 중소기업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코스닥 상장기업 전체의 지난해 순이익증가율은 0.07%라고 한다. 양극화의 현주소다.



외환위기 이후 잠시 주춤했던 ‘재벌공화국의 시대’가 다시 만개하고 있다. 1986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기 위해 대기업의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도입했지만 2009년 대기업의 투자와 시장경쟁을 촉진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 제도가 폐지되면서 브레이크 없는 열차가 되었다. 대기업의 계열사가 늘어난 것은 투자 확대에 따른 결과라고 변명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르다.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10대 기업들의 자금유보율은 무려 1210%다. 2004년의 600%에 비해 두 배나 높아졌다. 대기업의 곳간은 돈더미가 쌓여 터질 지경이다. 자금유보율은 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비율로 기업이 영업이나 자본거래를 통해 번 자금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알려 주는 지표다. 통상적으로 이 비율이 높으면 재무구조가 좋다는 의미지만, 달리 보면 기업이 연구개발, 신규투자 등 생산적인 부분으로 자금을 투입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의 재벌은 극단적인 평판을 가진 두 얼굴의 아이콘으로 상징화되었다. 하나는 “경제발전 견인차로서 큰 몫을 담당했다”는 긍정적 평가다. 다른 하나는 “부의 독점과 탈세 등 부정부패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다. 최근 들어 후자의 행태가 곳곳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암울한 전조다. 한국의 재벌과 대기업의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사회공동체에 대한 기업과 기업인의 책임을 생각하는 큰 성찰이 필요하다. 사회구성원으로서 공동체와의 조화로운 생존을 위해서다. 기업이 창업 2세, 3세로 넘어가면서 창업의 정신을 계승하는 오너십(주인정신)은 성장과 발전에 있어 중요하다. 그렇지만 기업이 내 것이라는 생각은 바뀌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아직 변화의 조짐은 없어 보인다.  



우리 기업의 기부실태를 보면 명료하게 드러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해 5월 발표한 ‘지표로 본 한국의 선진화 수준’ 조사에 따르면 한국 지도층의 경제정의 실천에 대한 기여도를 측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OECD 30개 국가 중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고 있는 1억원 이상의 개인 기부자도 60여명에 불과하다.

지난 3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개인 재산 1300억원을 기부한 재일동포 사업가 손정의,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투자가 워런 버핏처럼 천문학적인 개인 재산을 순수한 뜻으로 사회에 내놓는 재벌총수나 기업인은 없다.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미국의 ‘애국적 백만장자 클럽’을 보라

지난해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세계 3대 부자 워런 버핏의 미국 ABC 방송 인터뷰가 생각난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부시 행정부의 부자감세정책을 끝내달라는 내용이다. “세금감면 혜택은 저소득층과 중산층, 또는 상위 중산층에게 추가로 주어야 한다. 나 같은 최상위 소득자들은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세금을 더 내더라도 부자들은 전보다 형편이 더 낫다.” 이와 함께 연간 소득 100만 달러가 넘는 미국의 ‘애국적 백만장자 클럽’ 회원 45명이 백악관에 부자감세정책을 끝내라는 공개서한을 보냈다는 보도였다. 지하 땅굴을 파서 몰래 재산을 상속하는 우리 기업인의 모습과 비교된다.



터널링 왕국 대한민국, 이제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로 진행되는 머니게임의 장으로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기업인은 기업의 성장이 국민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공존의 사회 패러다임을 찾아야 할 때다. 정부도 기업들의 터널링 왕국 건설을 이런 식으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국민을 그들만의 리그에 값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는 배고픈 관객으로 남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