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인구 20만8800명 중 일자리를 가진 사람은 7% 정도. 실업이라는 개념도 없다. 모두가 이웃처럼 잘 아는 까닭에 범죄도 거의 없다. 최근 5년간 자살도 없다. “부자가 되겠다”거나 “남보다 잘 살아야겠다”는 말은 들을 수가 없다. GDP로만 따지면 223개국 중 207위. 그런데 영국 신경제재단이 발표한 행복지수(HPI)에서 178개국 중 1위를 차지했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비누아투의 이야기다.



2009년 현재 금융자산 10억 이상의 부자는 13만2000명, 2005년 5만5000명에서 2배 이상 늘었다. 3억원 이상 정기예금 계좌 수는 2008년 8만2300개에서 2009년에는 9만4300개로 늘었다. 나라 전체로도 100달러를 밑돌던 1인당 국민소득이 불과 반세기가 지나기 전에 2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200배도 넘는 성취다. 그런데 행복지수에서는 102위에 머물렀다. 우리나라의 이야기다.



학자들은 “소득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1인당 소득이 1만2000달러를 넘어서면 소득이 늘어나는 만큼 삶의 만족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1971년부터 1991년까지 20년 동안 국민소득이 83% 증가했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국민의 비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 같은 현상을 경제학계에서는 “이스터린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처음 발견한 남가주대학의 경제학 교수 리처드 이스터린(Easterlin)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나타나는 이스터린의 역설은 여러 각도에서 그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소득의 절대규모와 행복 간의 연관성이 별로 없다. 이는 절대적인 소득규모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한 소득이 행복의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소위 소득 불균형에 대한 민감도가 다른 나라보다 매우 높다. 문제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 불균형 정도가 크게 증가했으며 앞으로도 이 같은 추세가 이어질 전망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상위 10% 계층의 소득은 하위 10% 소득의 4.7배로 OECD 평균인 4.2배를 크게 웃돈다.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 혜택을 가져온다.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 벤자민 프리드먼은 발전은 더 많은 기회, 다양성의 허용, 사회 이동, 공평함에 대한 약속,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등을 촉진한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경제적 침체는 비관주의와 불관용, 불신 등을 가져오고 이런 것은 국민 개개인에게는 불행과 같다고 본다. 사회공동의 행복을 위해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덕목들이나 개개인들이 자신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개별적으로 취해야 할 사항은 모두 경제성장이나 그 결과인 부(富)의 증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엔의 객관적인 삶의 질 지수를 보면 주관적 행복감과 상반된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호주의 인간개발지수는 세계 4위였지만 행복수준은 50위권에 머물렀다. 이를 ‘호주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반면에 최빈국 부탄의 2007년 인간개발지수는 세계 131위에 불과했지만 행복수준은 가장 높았다. 이처럼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사람들의 행복을 느끼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행복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각국의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앞다퉈 심포지엄과 강의를 벌이고 있다. 미국에서만 200개 넘는 대학이 행복을 주제로 한 강좌를 두고 있다.

또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지금까지 공공 무대에서는 홀대 받던 주제가 국제 트렌드의 주연으로 떠오르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프랑스 대통령은 성장을 측정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며 GDP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GDP는 앞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새 경제지표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보수당의 젊은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Cameron)은 “이제 돈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클리츠 교수와 아마르티아 센 하버드 대학 교수는 정부의 공공정책이 경제 생산보다 사람의 안녕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성장과 행복에 대한 관심은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높다. 이명박 대통령도 “개인의 행복이나 삶의 질을 사회발전의 척도로 삼아야 한다”고 국제포럼에서 얘기했다.



삶의 질 향상과 이에 따른 행복 추구가 경제발전의 궁극적 목표이기는 하다. 태풍으로 건물이 파괴되고 새로 건설하면 GDP가 올라가는 모순도 극복해야 한다. 미국에서 지난 50년 동안 감옥에 대한 재정지출이 대학관련 지출보다 많았지만 모두 공공분야 생산량으로 잡히는 맹점도 있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믿음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상가인 토머스 칼라일은 끊임없이 행복에 집착하면 돌아오는 것은 끊임없는 실망뿐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행복을 유도하는 방안으로 다양한 가치관의 존중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경우 대중음악가수에서 요리사까지 명예의 전당만 3000개가 넘는다고 했다. 또 자신을 환경근로자로 자부하는 미국 신시내티의 벌목공을 소개했다. 자기 만족과 긍정적 사고를 통해 충분히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하나 나왔다. 유럽16개국 1만500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행복은 부유함보다 혈압 수치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도를 혈압으로 재보면? 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의 자살률이니 긴 설명이 필요없다. 그뿐인가 맵고 짠 음식에 세계 2위 술 소비국인 데다 확대되는 양극화, 무한경쟁 등 사회적 고혈압이 일상화돼 있다. 다른 통계를 보면 인간의 행복감은 10대를 정점으로 내려가기 시작해 40대에 바닥을 치고 50대부터 다시 올라가는 U자형이라고 한다. 늙을수록 포기하는 게 많아지는 것이 행복감의 비결이라고 한다. 올림픽 동메달리스트가 은메달리스트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행복은 절대적이지 않다. 영국엔 ‘행복이란 매형보다 10달러를 더 버는 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또 경제학자 앤드루 클라크는 직장인의 만족도가 동료의 월급수준에 반비례한다고도 했다.



국민성의 차이도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남미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꺼리는 반면 한국 등 동아시아 사람들은 슬픔이나 불행을 과도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현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미래에는 경제적 혜택이 커질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행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한국인의 행복에 대한 충만한 기대를 미래를 개척해가는 동력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성장과 행복에 대한 기존 경제학계의 역설을 깨는 좋은 사례로 만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