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1
지난 5월 2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대회의실. 기재위 소속 의원들이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를 열고 있었다. 한나라당, 민주당 등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의원들은 박 후보자에게 감세 철회 등 MB노믹스 수정을 요구했다. 특히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박 후보자의 기획재정부 장관 내정과 관련, “실패한 MB노믹스를 밀어붙이겠다는 오기 인사”라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장면 #2
같은 날, 국회 의원회관 회의실. 한나라당 소장파·쇄신파들의 모임인 ‘새나라 한나라’가 모임을 가졌다. 정두언·김성식·김성태·권영진 의원 등 참석자들은 MB노믹스를 설계하고, ‘이명박 정부’의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한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지난 4·27 재·보궐 선거의 패배를 불러온 민심이반이 바로 강만수 회장이 고안한 고환율·감세 정책 등 재벌과 대기업을 위한 정책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2008년 2월 25일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핵심경제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MB노믹스’가 실패한 정책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가운데 구원투수로 등장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됐다. MB노믹스는 정부의 규제를 최소화하고 세금을 줄여 경제 주체들이 시장에서 경쟁하고 창의를 발휘하도록 시장에 맡겨, 시장에서 자연스레 저성장과 양극화 등 한국 경제의 문제가 풀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실천 과제 중 핵심이 7·4·7(7% 성장, 4만 달러 소득, 세계 7위 경제) 성장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 취임 후 3년간(2008~2010년) 평균 경제성장률은 7%에 훨씬 못 미치는 3~4% 수준에 그쳤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돼 서민들의 체감경기는 극도로 나빠졌다. 재벌과 대기업의 배만 불렸고, 서민은 물가인상과 생활고에 시달리게 됐다는 것이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판단이다.
또 그동안 성장을 중요시하면서 ‘우선 성장을 해야 파이가 커지면서 낙수효과(세금을 깎아주면 소비가 늘어나고 결국 경기가 활성화돼 다시 세입증대로 이어진다는 것)로 고용이 늘고 소득도 증대시킬 것’이라는 입장을 펴왔다. 하지만 MB노믹스가 시작된 이후 오히려 청년실업을 중심으로 고용문제는 더욱 악화됐다는 평가다. 지난 5월 25일, 한쪽에선 박재완 후보자가, 한쪽에선 강만수 회장이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면#1,2가 동시에 벌어진 것은 박재완 장관이 MB노믹스를 설계한 강 회장의 ‘아바타’로 보기 때문이다.
박 장관은 MB맨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고 있다.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인 강만수 회장이 MB노믹스를 설계한 사람이라면, 초대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인 박 장관은 정부부처를 통·폐합시키는 등 ‘이명박 정부’를 설계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와 이 대통령과의 인연은 다른 핵심측근보다는 그렇게 각별하지는 않은 편이다. 박 장관은 성균관대 교수를 하다가 열린우리당 돌풍이 불 때인 2004년 한나라당에 영입된 케이스로 비례대표 9번을 받고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대통령과 인연은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을 맡아 한나라당 대선 경선 규정을 다듬는 일을 하면서 불과 몇 번 마주친 정도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후 대통령직인수위를 꾸릴 때 정부혁신 규제개혁 태스크포스(TF) 팀장에 임명돼 이 대통령이 박 장관을 눈여겨봐왔음을 보여줬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때 정부부처 개편과 각종 규제개혁을 핵심 정책으로 내걸었는데, 이를 정권 내 지분이 거의 없는 박 장관에게 맡긴 것이다.
박 장관은 사실 기획재정부에도 지분이 거의 없다. 그는 행정고시 23회로 공직에 들어선 뒤 서기관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기획재정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2년 1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재무부 세제실 사무관으로 2년간 근무한 것이 유일하다. 그는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공무원을 그만두고 성균관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온 뒤에는 산업자원위원회(현 지식경제위원회)와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해 역시 기획재정부와는 인연이 없었다. 때문에 과연 그가 기획재정부를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을지 의문 어린 시선을 받고 있기도 하다. 당초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명단이 회자될 때 박 장관은 포함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이유 때문에 박 장관이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MB노믹스를 설계하고 정권 내 지분이 있는 강 회장이 상왕(上王) 노릇을 하고, 박 장관이 그의 아바타 역할을 충실하게 할 것이라는 것.
그동안 윤증현 전임 장관 시절에는 워낙 윤 전 장관이 기획재정부 내에서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간섭이 어려웠지만, 박 장관은 연배도 낮은 데다, 기획재정부 관료들을 장악하기 어려워 강 회장의 입김이 음으로 양으로 전달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 내 강 회장의 측근 중 한 인사는 박 장관이 부임하자, 상당히 반색했다. 벌써부터 윤증현 장관 시절에 다소 주춤했던 ‘강만수 라인’이 앞으로는 득세할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결국, MB노믹스를 강만수-박재완 라인이 사수한다는 얘기다.

여야 MB노믹스 공격에 한 발 물러서
기획재정부 내 통솔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권은 강만수 회장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 강 회장의 아바타로 낙인찍힐 경우 앞으로 MB노믹스를 지켜야 할 박 장관은 상당히 험난한 길을 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에 감세 철회를 저지하는 것이 그에 앞에 놓인 숙제다. MB노믹스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바로 감세다. ‘이명박 정부’는 감세를 추진하기 위해 2008년 9월 정기국회에서 야당의 거센 반대에 맞서 소득세·법인세 인하 감세법안을 통과시켰다. 연소득 1200만원(과세표준 기준) 이하 구간은 8%였던 세율이 6%로 낮아졌고, 1200만~4600만원 구간은 17%에서 15%로, 4600만~8800만원 구간은 26%에서 24%로 인하했다. 8800만원 초과 구간은 지난해부터 35%에서 33%로 낮추기로 했다가 야당의 반대로 2012년부터 적용키로 했다. 법인세의 경우 2009년에 세율을 25%에서 22%로 3%포인트 낮췄고, 2010년부터 22%에서 20%로 2%포인트 추가로 인하할 계획이었으나 역시 국회통과 과정에서 2012년으로 적용시기가 늦춰졌다. 내년부터 적용키로 한 소득세·법인세 세율인하를 아예 없던 것으로 하자는 것이 여야 정치권 주장의 골자다.
하지만 7·4·7성장 공약도 폐기된 상황에서 감세마저 철회된다면 MB노믹스는 ‘누더기’ 신세가 돼버린다. 감세를 통해 더 높은 성장을 이끌어내겠다는 MB노믹스에 대한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이는 레임덕을 더욱 가속화시킬 공산이 크다. 박 장관은 이를 사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지난 5월 25일 기획재정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감세 철회를 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감세 철회 주장에 대해 “MB정부의 상징적 정책으로 정부정책의 일관성과 대외신뢰도 유지를 고려할 때 예정대로 (법인세·소득세) 세율을 인하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것.
그러나 여야 정치권의 공세가 워낙 강해 감세 기조가 유지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박 장관은 지난 6월 1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는 MB노믹스 실정(失政)과 관련한 지적을 받고 “MB노믹스이기 때문에 꼭 그리로 간다는 그런 뜻은 없고, 잘못된 게 있으면 인정하고 바로잡겠다”고 한 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더욱이 한나라당은 지난 6월 16일 의원총회를 열었는데, 소득세·법인세 추가감세 철회를 당론으로 확정짓지는 않았지만 감세 철회라는 기조를 재확인했다. 한나라당은 이에 따라 향후 당정 협의와 여야 협상 등을 거쳐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예산부수법안에 포함시켜 감세를 철회키로 했다.
여당의 감세 철회 결정에 박 장관은 이날 언론사 경제부장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5월 12일 보고서에서 큰 폭의 재정건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고 조세 지출을 삭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기획재정부는 법인·소득세 감세와 세입기반 확충을 해야 한다는 권위 있는 기관들의 권고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지만, 강력하게 반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핵심 권력층 반대로 감세 철회 상당한 진통 따를 듯
비록 여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 감세 철회를 추진하고 있지만 ‘이명박 정부’ 핵심 권력층에서 감세 철회에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 감세 철회 세법 개정안 마련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한 발 물러서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박 장관이지만 ‘강만수 아바타’로서 MB노믹스 사수를 위해 적극적으로 뛸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기획재정부 내 ‘강만수 라인’도 이에 적극 동조할 것이어서 이들의 반격을 만만하게 볼 수는 없다.
게다가 지난 6월 16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선 나성린·유일호 의원 등이 “이명박 정부의 대표적인 약속인 감세를 철회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밝히는 등 한나라당에서도 반발이 꽤 있다.
특히 한나라당은 원내 지도부와 해당 상임위인 기재위에 감세 철회에 대한 최종안을 위임키로 했는데, 기재위에는 법인세 감세 철회에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는 박근혜 전 대표가 소속돼 있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여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박 전 대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회 기획재정위 관계자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감세 철회 기조를 확인했지만 당론으로 채택이 안 돼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다”면서 “추가 감세 철회를 골자로 한 소득세법·법인세법 개정안을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하는데, 정치지형이 바뀔 경우 향후 처리방향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또 “MB노믹스의 최후 보루가 감세인데, 이를 사수하라고 박 장관을 기획재정부 장관에 임명한 것이기에 정치권과 조율을 통해 법인세 세율만은 예정대로 인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갈 수도 있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총애하는 박 장관은 순장조(대통령 임기가 끝날 때까지 같이 하는 관료들)로 평가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임기가 불과 1년 반밖에 남지 않은 데다, 이 대통령의 부처 장관 임명 스타일로 봐서는 웬만한 흠결이 있어도 최소 1년은 두고 보기에 박 장관을 교체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내년에는 총선(4월)과 대선(12월)이 20년 만에 한꺼번에 열린다.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격랑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박 장관이 남은 ‘이명박 정부’의 기간 중 MB노믹스를 지키기 위해 ‘강만수 아바타’로서 험난한 길을 갈지, 아니면 독자노선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