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은 한 직종에 20년 이상 종사하면서 기술 발전에 공헌한 기능인을 말한다. 기능인으로서는 최고 영예다. 고용노동부는 매년 금속·도자기·목공예 등 공예분야와 기계·조선·건축 등 산업분야, 제과·미용·세탁 등 서비스 분야 267개 직종에서 명장을 선정한다. 현재 등록된 명장은 496명. 대부분의 명장들은 한 분야에서 40~50년 이상 일했다. 이들이 만든 작품에는 땀과 기술, 그리고 열정이 배어 있다. 이렇게 자신의 ‘혼’을 담았기 때문에 명장이 만든 작품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이코노미플러스>는 대한민국명장회와 공동으로 명장들의 삶을 조명, 혼탁한 우리 사회에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는 세 번째로 정명채(60) 나전칠기 명장을 만났다.

정명채 명장은 긴 세월 동안 오로지 나전칠기라는 한 길만을 걸어왔다. 40여 년이 흘렀다. 그는 나전칠기 명장이면서 서울시 무형문화재(제14호)이기도 하다.



나전칠기는 얇게 간 조개껍질을 다양한 형태로 오려내 옻칠한 기물의 표면에 붙여 장식한 것이다. 나전(螺鈿)은 조개껍질을 일컫는 나(螺)와 장식을 의미하는 전(鈿)이 합쳐진 말이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는 역시 나전(자개)과 칠이다. 자개는 우리나라 한려수도의 전복 껍질이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낸다. 정 명장은 가장 좋은 자개를 골라 모아두었다가 작품에 쓴다고 한다.



칠은 옻나무 수액을 말한다. 내구성, 내산성, 내습성, 내열성이 뛰어나고 접착력이 가장 좋은 고급 천연재료다. 고려시대의 나전칠기가 아직까지 그대로 있는 것도 옻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광택이 더 나는 옻칠을 ‘신비의 칠’이라고 했다.



나전칠기는 다른 공예품보다 몇 배의 공정이 더 필요하다. 나전칠기는 적당한 나무를 고르고 필요한 용도의 백골을 만드는 목공 작업부터 시작된다. 백골 위에 삼베천 혹은 한지를 바르고 조개 가루와 칠을 반죽해 바른다. 그 위에 밑칠을 단단히 한 후 마르면 닦아내고 다시 칠해 마르면 닦아내는 과정을 10여 차례 되풀이한다. 매번 옻칠한 다음에는 하루 정도 건조시켜야 한다.



정 명장은 옻칠 작업을 할 때 수영복을 입는다고 한다. 정전기가 발생하거나 미세한 먼지라도 옻칠 과정에 들러붙으면 기포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성을 다해야 하는 작업이다. “반도체를 만들 때 방진복을 입는 것은 미세한 먼지가 반도체 소자에 들러붙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옻칠도 그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세심한 작업이죠.”



옻칠이 마르면 종이본으로 그린 밑그림 위에 나전을 입히는 작업을 하게 된다. 자개를 만들기 위해서도 전복패를 고르고 갈아낸 뒤, 줄로 썰고, 자르고, 끊어내는 등의 정성어린 준비 작업이 필요하다. 자개를 칠 위의 종이본에 놓고 인두로 눌러 붙이고 다시 옻칠하고 칠을 긁어내고 마름질한 후에 광을 내는 등 매우 어려운 작업을 거쳐 완성된다. 한 작품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최소 6개월. 큰 작품은 3년 정도 소요된다.



정 명장은 전통기법에다 최근의 새로운 디자인 트렌드를 반영해 작품을 만들어낸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후얀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 등이 그가 만든 나전칠기를 선물로 받았다.

- 나전칠기는 다른 공예품보다 몇 배의 공정이 더 필요하다.
- 나전칠기는 다른 공예품보다 몇 배의 공정이 더 필요하다.

먹고 살기 위해 나가는 후배 잡지 못해

하지만 그는 아직 나전칠기와 같은 전통공예가 ‘배고픈 직업’이라는 현실이 아쉽다고 말한다. 있는 고생이란 다 하는데도, 오랜 작업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만큼의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한다는 얘기다. 장인의 감성과 혼이 배어 있는 작품은 그만한 정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방에서 배우던 후배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일을 찾아 나갈 땐 잡을 수가 없어요. 장인들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며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합니다.”



문화는 예술인이 아니라 소비자가 만든다. 소비자가 모르는 문화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이 전통문화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며 특히 나전칠기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정책적인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국의 국빈에게 나전칠기를 선물하면서 제대로 된 지원은 하나도 없어 아쉬워요. 나전칠기를 소개하는 책자나 리플릿 한 장 없으니까요.”



그는 세계에서 통하는 나전칠기를 개발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우리 것을 상대국에 맞게끔 디자인을 개발한다면 전통공예도 알리고 외화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큰 마당에서 뛰어놀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는 과거의 유산에 머물러선 명품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명품은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작품에 혼과 감성을 담아야 한다는 얘기다. 정교함은 기계가 한 수 위겠지만 감성을 기계가 표현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자개는 보는 위치에 따라 여러 빛을 발하죠. 보석 같아요. 나전칠기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어요.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워도 쓰임새가 불편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전통기법에다 현대의 감각적인 디자인과 각 문화권의 특성을 잘만 접목하면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품뿐 아니라 세계적인 명품대열에도 합류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는 최근 프랑스에서 열린 전통작가 초대전에서의 일화를 소개했다. 초대전에 참석한 미테랑 프랑스 문화부장관은 나전칠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너무 아름답다”고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얼마냐고 묻더군요. 4500만원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신의 월급으론 못 사겠다고 했어요. 가다가 다시 돌아온 장관이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다시 물었어요. 2년7개월 걸렸다고 하니까 그럼 훨씬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 정명채 명장은 전통적 기법에 현대적 트렌드를 가미해 작품을 만든다.
- 정명채 명장은 전통적 기법에 현대적 트렌드를 가미해 작품을 만든다.

고교 중퇴하고 공방에서 배워

그는 어릴 때부터 서예나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는 각종 대회에 나가 여러 차례 상도 탔다. 그래서 나전칠기에 빠졌는지 모른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그의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큰형의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채권자들이 들이닥쳤다. 겨우 집만 건질 수 있었다. 그는 고교 1년으로 중퇴를 해야 했다.



나전칠기를 만난 것은 1968년, 그의 나이 17살 때였다. 서울 정릉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나전칠기 공방에서 우연히 자개함의 빛깔에 그만 반해버렸다. “시꺼먼 옻칠 위에 자개가 무지개 색으로 빛나는데, 너무 아름다웠어요. 저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정릉 산꼭대기에 있던 공방에 제자로 들어갔다. 3명이 일하는 작은 공방이었다. “옻칠하는 것부터 배웠어요. 자개를 만지고 싶었는데 좀 실망했죠. 입문과정은 옻오르는 겁니다. 반복하다 보니 면역이 생기더군요. 열심히 했어요. 2달 지나니까 눈썰미가 있다면서 드디어 나전을 배우게 하더군요. 알고 보니 나전이 너무 비싸 초짜는 만지지 못하게 한 거였어요. 조각하고 남은 부스러기로 배웠죠.”



체계적인 교육과정은커녕 교재도 없었다. 오로지 실패를 반복하며 스스로 깨우쳐야 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한 번 해봐”라는 선문답이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배우려는 욕구가 더 생겼다.



“나전은 굉장히 딱딱합니다. 그런데 스승님이 조각도로 패각을 하면 ‘슥슥’ 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나는데, 제가 하면 ‘끽끽’ 하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는 스승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조각도를 살펴봤다. 스승의 도구는 절대로 만져서는 안되는 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의 조각도와 칼날의 생김이 달랐다.



“어떻게 하면 칼날이 저런 모양으로 닳을까 하며 이리도 해보고, 저리도 해봤어요. 결국 스승이 조각할 때 낸 소리를 찾았죠. 그렇게 조각을 하니까 스승님이 뒤돌아보시면서 조각칼을 보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묻더군요. 그냥 웃었죠.”



공방의 환경은 열악했다. 냉난방이 안 되니 겨울이면 손이 얼어 제대로 조각을 할 수 없었고, 여름이면 더위에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3년을 숙식하며 칠과 나전을 배운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다른 공방으로 옮겼다.



“요즘 PC방처럼 그 당시엔 칠기공방이 수두룩했어요.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서로 데려가려고 했죠. 절 찾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친구들보다 좋은 대우를 받으며 옮겼어요.”



그곳에서 그의 실력은 최고로 통했다. 나전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그의 월급이 6000원일 때, 나전칠기 좌경(앉은뱅이 화장대)은 150만원이었다. 그래도 일감이 몰렸다.



그가 나전칠기의 매력에 다시 한 번 빠진 것은 1971년. 한 나전칠기 명인의 전시회에서 그는 충격에 빠졌다. “새로운 눈을 떴다고 할까요. 너무 아름다웠어요. 나도 이런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3년 뒤 독립했다. “돈을 벌기보다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잘한다는 소린 많이 들었지만, 평가를 받은 적은 없었죠. 솜씨를 평가받고 싶었어요. 신문에 공예대전 공고가 난 것을 보고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그는 첫 도전에서부터 수상을 하기 시작, 지금까지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밤낮없이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다 보니 그가 만든 나전칠기는 국빈 선물용으로 애용되고, 청와대 영빈관에 비치되는 등 주위로부터 인정받게 됐다. 창작활동과 국내외 전시 등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그렇게 한 길을 걸었다. 그는 1993년 나전칠기 부문의 명장으로 선정됐다.

- 운학국화당초문구절함(위), 모란당초거북문보석함(아래).
- 운학국화당초문구절함(위), 모란당초거북문보석함(아래).

생활가구에 나전칠기 접목

그는 아직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못했다. 생활 때문에 작품을 팔아버려 전시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상설전시관을 갖는 것이다. 그는 “좋은 재료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시간이 지나도 유물로 남을 수 있는 나전칠기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바람을 밝혔다.



“주거문화가 급변하고 입식 생활이 보편화되면서 전통 나전칠기 가구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우리 주거에는 나전칠기 같은 전통 가구들이 들어갈 틈이 없고요. 나전칠기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전통기법은 이어가되, 시대에 맞는 공예품, 조형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죠. 나전칠기에 현대 인테리어를 접목하면 굉장히 창의적이고 가능성이 있을 거예요. 내년에는 생활가구에 나전칠기를 적용해 국내외 시장에 노크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