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문 없어지도록 빚고 또 빚어…
전통 장작가마 방식으로 백자 재현

허연 수염의 서 명장이 물레를 발로 차며 묵묵히 도자기를 빚고 있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도자기 하나가 금세 만들어졌다. 얼마나 많은 도자기를 빚었는지, 그의 손에는 지문이 없었다. 가마는 비탈진 언덕에 산봉우리 모양으로 6칸이 연이어져 있었다.
가마 옆 그의 작업장은 작은 갤러리를 방불케 했다. 전통 달항아리에서부터 진사와 청자 등 크고 작은 200여 점의 도자기들이 자신만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굳이 돈으로 따진다면 3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직접 흙을 고르고 수백 번을 다듬어 빚어내고 유약을 바르며, 또 며칠을 불과 씨름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야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과정들 중 쉬운 게 하나도 없지요. 혼을 다 쏟아 부어야 가능합니다.”

그릇공장에 취직하며 도자기와 인연
이천 도자기는 16세기 초부터 지역 특산물로 기록될 정도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조선 후기를 지나며 한동안 맥이 끊겼지만 1950년대 후반 당대의 내로라하는 도자 장인들이 이천 일대에 도요를 열면서 그 명성을 되찾았다.
도자기의 고장 이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 명장이 흙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61년, 초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였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14살이라는 어린나이에 동네 그릇공장에 취직했다. 간장이나 고추장을 담는 칠기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장 한쪽에 도자기를 만드는 물레가 있었어요. 주로 차 그릇을 만들었는데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죠. 저걸 해야겠다 싶었어요. 밤에 호롱불을 켜놓고 틈틈이 도자기 만드는 연습을 했어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혼자서 배웠어요.”
집이 멀어서 공장에서 잠을 자기 일쑤였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3년간 일하며 도예의 기본을 익힌 서 명장은 1963년 당시 한국 최고의 도예 명인인 도암 지순탁(1912∼1993) 선생의 눈에 띄게 돼 본격적인 도예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지 선생을 만난 것이 도예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그는 “사실 그 전까지는 도자기를 만든 게 아니었다”며 “지 선생으로부터 태토, 성형, 유약, 소성 등 도자기 제작의 전 과정을 배웠다”고 말했다.
지순탁 선생이 운영하던 고려도요에서 밤낮으로 흙과 불을 다루며 착실히 실력을 쌓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성형실장, 불을 지피는 소성실장을 거쳤다. 당시 군수 월급이 5만원 정도였는데, 그는 8만원을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일본에서 그가 만든 도자기를 사기 위해 단체 관광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일본으로 팔려 나간 도자기 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밤을 새는 날이 수두룩했다.
서 명장은 1976년 도자기 애호가로 고려도요를 즐겨 찾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눈에 들게 되어 이씨가 설립한 도평요의 공장장으로 스카우트됐다. 그가 도평요에서 10년간 만든 도자기만 3000점에 달한다. 1986년 경기도 이천시 남정리 깊은 산속에 자신의 호를 딴 ‘한도요’를 설립했다. 연기가 인가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도자기를 만들던 넷째 동생인 광봉(54)씨와 다섯째 동생인 광영(51)씨도 불렀다. 광영씨는 조각과 그림을, 광봉씨는 도요의 전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다.
그해 동료 도예가 6명과 함께 ‘이천 도자기 축제’를 열었다. 소박하게 시작한 이 축제는 2001년 세계 도자기 엑스포로 발전하면서 이천 도자기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그가 국내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1993년 유백색의 맑고 깊이 있는 빛깔을 빚어낼 수 있는 유약을 개발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매년 일본에 초청돼 30여 회의 전시회를 갖게 됐으며, 프랑스, 중국, 미국 등에서 한국 전통자기의 진면목을 보여주게 됐다. 그는 2003년 대한민국 명장 제14호에 선정됐고, 2005년에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됐다.

전통 장작가마 방식 고수
한도요는 전국적으로도 전통 방식만을 고집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에서 장작가마를 고수하는 곳도 그의 도요가 유일하다. 서 명장은 흙 만드는 것에서부터 발 물레를 차고 돌려 도자기를 빚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유약을 만들며, 전통 가마로 굽는다. 흙은 서산, 하동, 양구 등 7개 지역의 백토를 섞어 사용한다. 손과 발을 이용해 반죽하는 데 한나절이 걸린다. 이렇게 반죽한 흙을 발을 이용해 돌리는 물레 위에 올려 도자기 성형작업을 한다. 달항아리의 경우 크든 작든 두 개의 둥근 바가지 형태로 만들어 이를 맞붙인다. 크기를 맞추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둥근 테와 곡선이 제각각이면서 투박해 보이는 그의 자기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약과 안료도 대리석, 석회석 등을 자연에서 채취해 직접 만들어 쓴다. 가마 역시 전통 방식으로 소나무 장작을 사용해 36시간 꼬박 불을 지핀다. 이때 필요한 장작만 약 10톤에 달한다. 가마에 불을 지피고 800도에서 900도, 1200도에서 1300도까지 열을 내주어야 제대로 된 작품을 얻을 수 있다.
불의 세기와 불을 받는 위치에 따라서도 천태만상의 자기들이 탄생한다. 강한 불길에 쭈그러지기도 하고, 내려앉으면서 옆의 작은 도자기들과 붙어버리기도 한다. “가끔 생각지도 않았던 작품이 구워져 나오는 것도 장작가마의 맛입니다. 6`~7개의 도자기가 붙어 나오기도 하고, 가마 안에 있었던 위치에 따라 생각지도 못했던 색으로 구워지기도 하죠. 유약이 불길 속에서 흘러내리면서 오묘한 문양을 만들기도 하고요.”
아무리 성형과 조각을 잘하고, 유약을 잘 발라도 온도 조절을 잘못하면 폐기물이 된다. 불의 움직임과 온도에 따른 변화, 장작의 상태 등에 민감하게 대처해야 명작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시시각각 변하는 불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불을 지필 때마다 밤을 지새운다. 두세 달에 한 번 가마에 불을 지피는 날에는 서 명장의 후원회원들을 비롯해 전국의 도자기 애호가 200여명이 모여든다. 한 번에 대략 150점의 도자기를 구워 그중 30여 점만이 선택된다. 달항아리의 경우 10개 중 하나 정도 건진다.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가차없이 서씨의 망치에 박살이 난다.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이 “아깝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그는 눈 한번 꿈쩍하지 않는다.
그가 전통 가마를 고집하는 것은 가스가마를 쓰면 불 조절이 쉽고, 편하게 많은 양을 구워낼 수 있어 생활 도자기를 만드는 데는 제격이지만 획일적인 색감과 똑같은 모양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스를 사용하는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의 빛은 천편일률적입니다. 불의 온도가 일정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장작가마를 열면 같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색깔이 모두 달라요. 똑같은 흙과 유약을 사용했는데도 전혀 예측할 수 없어요. 그 오묘한 아름다움을 가스가마로는 절대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그는 “당장 돈을 벌자고 했다면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가스가마에서 쏟아내는 것은 도자기 ‘작품’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 도예가들이 너무 쉽게 작품을 만들려고 해 안타까워요.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 짧은 시간에 마구 만들어내 싼값에 판매하다 보면 진정한 작품은 만들 수 없습니다.”

도예박물관 건립 꿈
서 명장은 백자, 청자, 분청, 진사 등 모든 종류의 도자기를 만들지만 가장 아끼고 즐겨 만드는 도자기는 아무 문양이 없는 은은한 유백색의 무지백자 달항아리다. 무지백자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유백색을 내기 위해서는 불의 온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 온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는 무지백자 달항아리로 경기 무형문화재 41호가 됐다.
“백자는 자연의 기법을 완벽히 살린 우리 도자기의 자랑입니다. 특히 무지백자 달항아리는 은은한 유백색이 나와야 제대로 된 작품입니다. 그 유백색은 보면 볼수록 심취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서 명장은 요즘 11월에 있을 도예 입문 50주년 회고전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150여 점을 전시할 예정이다. 반세기 동안 매일 도자기를 만들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은 팔지 않고 모았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도예박물관을 짓는 것이다. 도요 뒤편 500평 부지에 박물관을 지어 그가 그동안 만들고 수집한 도자기와 그림 등 1000여 점을 전시할 계획이다.
“전통 도자기의 가치를 전 세계가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자신은 우리 것에 대해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지요. 도예박물관이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홀대받고 있는 우리 전통의 도자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