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대받던 도장 예술 경지로 승화…
“고유 인장 글로벌 브랜드로 키워야”

도장 파는 것을 보여달라는 기자의 부탁에 최병훈 명장이 꺼내든 건 나무와 칼이 아닌 종이와 붓이었다. 기자 이름의 한자를 자세히 묻더니, 하얀 화선지에 동그라미부터 그린다. 그리고는 원 안을 이름 석 자와 믿을 신(信)자로 천천히 채워나갔다. 글씨를 쓴다기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 보였다. 그만큼 한획 한획 정성을 다했다.
“인장은 그 사람 고유의 표식입니다. 그런데 이 표식이 따로따로 놀아버리면 안되죠. 도장을 파려면 네 글자를 하나의 그림으로 만드는 작업이 우선입니다. 각각의 글자를 하나의 문양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마치 집짓기 전 건축설계 도면을 그리는 것처럼 중요합니다.”
최 명장은 이 작업을 인장의 원고를 그리는 ‘인고’라고 설명했다. 그는 초안을 복사한 후 복사지에 붉은 매직으로 선을 그은 뒤 비뚤어지거나 삐친 글자를 다듬는 인고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좋은 문양이 나올 때까지 인고 작업은 열 번, 스무 번 계속된다. 이 때문에 하루에 도장 1개도 완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명색이 명장인데 제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어찌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웃음) 도장은 10년, 20년 찍어야 하는데 오랜 기간 싫증 안 나려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어야죠.”

굴곡 많았던 도장 인생 42년
그의 도장 인생은 올해로 42년째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지만 이제는 그의 인생 과업이 됐다. 이른 나이에 시작한 한자 공부는 평생 도장업의 밑거름이 됐다.
“전북 장수군의 산골마을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노쇠하셨던 아버지께서 미리 한학을 배워야 한다며 6살 무렵부터 저를 서당에 보내셨어요.”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인생의 시련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면서 그의 학업도 중지됐다.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그는 한 서예학원의 급사로 취업했다. 그곳에서 도둑공부를 하며 붓글씨를 연습했다. 이후 고등학교에서 필경사로 근무하며 전각(篆刻 : 나무, 돌, 금옥 따위에 인장을 새김)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 시절, 필경사는 각종 문서나 시험지 등의 등사용 원판에 글씨를 새기는 작업을 담당했다. 그런데 그가 군대 다녀온 사이 윤전기와 복사기가 일반화되면서 필경사라는 직업이 사라졌고 그의 일자리도 없어졌다.
필경사 시절 어깨너머로 도장 일을 배운 터라 도장업을 시작했다. 돈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도장 파는 일밖에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 수백개의 도장을 팠다. 싸구려 막도장만 새기다보니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기회가 찾아왔다. 1976년 한국인장업연합회에서 후배양성을 위한 기술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최병훈 명장은 3개월의 교육기간 동안 15명의 인장인들에게 특별 교육을 받고, 인장공예기능사 1급 자격증을 땄다. 그는 인장 작품을 만들면서 단순 기능인이 아닌 인장 문양사로의 책임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옛 인장 연구 통해 새로운 문양 창조
그가 도장가게를 연 것은 1977년. 수중에 있던 단돈 10만원으로 시작했다. 낮에는 생업을 위해 도장을 팠지만 밤에는 인장공예품을 만들었다. 재료를 다듬는 작업부터 손수 하다보니 작은 인장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몇 달씩 걸렸다. 그의 꾸준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국제미술대상전, 대한미술전람회, 전국인장작품공모전 등 국내외 미술전을 휩쓸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인장공예를 배우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국내 유명 인장업소 150여 곳을 돌며 인장 분야 장인들의 솜씨를 비교 분석했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중국, 일본, 대만 등 해외를 다니며 인장과 전각에 대한 역사자료와 변천사를 수집했다. 이를 자신만의 인장공예로 꽃피우며 1999년 전각 분야 신지식인, 2001년 인장공예 부문 명장으로 선정됐다. 모두 대한민국 최초다. 이전까지 천대받던 도장업을 명장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가 40여 년간 작업한 인장공예품 수천 점은 그의 작업실을 꽉 메우고 있었다. 최근 한양대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인과 인장’ 특별전에서 그의 작품 50점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의 인장공예품은 손가락만 한 도장부터 벽걸이용 장식품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는 인장공예를 단순히 도장 파는 일이 아닌 인류문화의 한 줄기로 본다.
“도장 하면 사람들이 막도장이나 인감도장 정도만 생각하는데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인류 최초로 문자를 새긴 것이 사실 도장입니다. 신패(信牌) 역할을 하는 도장은 오래전부터 진흙, 나무, 금속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져왔죠. 문자가 없던 고대에는 사냥한 짐승을 들고 춤추는 사람,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사람 모양 등 자신만의 표식을 새긴 그림 도장을 사용했어요. 이후 문자가 생기면서 지금의 도장 형태가 이어져오고 있죠. 크게 보면 인쇄문화도 나무나 금속에 새기는 인장에서 생겨난 겁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그는 옛것을 탐구하며 새로운 인장을 창조한다. 그의 공방에는 원시적인 그림이 새겨진 인장부터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인(서명)을 새긴 인장까지 옛 인장을 현대적으로 재현한 공예품이 가득하다. 모두 발품 팔아 모은 고(古)문서에서 찾아낸 문양들이다.
“신표(信標) 기능의 인장은 사실 촌스럽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만든 게 가장 좋아요. 고대 인장을 보면 안 나오는 동물이 없을 정도로 문양이 다양해 따라 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도장 모양도 자기만의 표식인데 왜 꼭 동그라미여야 하나요.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으레 기계로 일정하게 깎은 원형 도장만 생각해요. 사각형이나 ‘ㄴ’자형 등 다양한 모양의 도장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냄새도 한번 맡아보라고 인재(도장 몸체)에 코도 깎아 넣으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최 명장의 인장은 하나같이 모양이 다르다. 재료 고유의 특성을 살려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 만든다. 나무 재료의 경우 대패질은 물론 흔히 하는 니스칠도 하지 않는다. 대신 호두 기름을 짜다가 손으로 일일이 인재에 문질러 바른다. 이 때문에 그의 양손은 지문이 다 닳아 없어졌다. 그는 “인재에 니스나 페인트를 칠하면 나중에 칠이 벗겨지면서 도장이 깨진다”며 천연기름을 고집했다.
“나무가 뒤틀리면 뒤틀린 대로 썩으면 썩은 대로 자연스러운 게 가장 좋은 겁니다. 생긴 그대로를 살려 소박하게 만든 인장이 참 멋을 지니죠. 제 도장은 같은 사각 도장이라도 다 다릅니다. 틀에 맞춘 사각형도 좋지만 한쪽 귀퉁이가 깨진 사각형도 그만의 멋이 있죠.”

도장은 사람의 심성을 새기는 일
도장을 새기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장 문양에 사용자 개개인의 성품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인고를 그리는 작업부터 도장을 완성하는 단계까지 끊임없이 의뢰인에게 의견을 묻는다.
“중요한 문서에 찍히는 인감은 사용자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그 사람의 인품을 대변하는 거죠. 이 때문에 좋은 인장은 도장을 새기는 기능인과 의뢰인이 서로 마음이 통해야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사용자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면 잘못 만든 거죠. 기능인과 의뢰인이 소통함으로 사용자 고유의 심성을 상징화한 문양을 새겨 넣을 때 좋은 인장이 되는 거고 진짜 ‘복도장’이 되는 겁니다.” 그는 최근 논란을 빚었던 인감증명제 폐지와 관련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는 인감증명제는 저비용으로 확실한 신용보증 효과를 내는 효율적인 제도라고 설명했다. 서명은 할 때마다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5~10년 전의 서명을 검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도장은 확대 비교해보면 점 하나 차이까지 알 수 있어 진위를 바로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장을 빨간색으로 찍는 이유를 아세요. 귀신이 붙지 말라는 일종의 액땜입니다. 부정한 것이 붙지 않아 문서가 변치 말라는 의미죠. 이처럼 인장에는 우리 고유의 풍속과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으니까 인감제를 폐지하자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국내 신용사회의 고유문화로 자리잡은 인장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가꿔나가는 게 옳다고 봅니다.”
요즘 그는 인장 문화를 전파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서울 강북구청에서 일반인 대상으로 인장의 역사와 공예기술을 가르친다. 그는 “인장의 활용범위는 매우 넓다”며 “인장으로 액자를 만들 수도 있고 간판, 타일, 한복, 가구 등 다양한 제품의 디자인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장 문화, 후대까지 전파하고파
그의 바람은 인장공예 작업이 후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자신의 인장공예 작품을 기증할 곳을 찾는 중이다. “창고가 아닌 제대로 전시될 곳을 찾고 있습니다. 시대별 인장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인장공예 전시관이 생겨, 제가 죽은 뒤에도 후대에 인장공예가 잘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돌, 나무, 옥 등 다양한 재료로 인장공예를 한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도장 재료는 썩은 나무다. “나무가 썩으면 그 주변으로 독특한 무늬가 생깁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나무가 오히려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듯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썩은 나무토막을 보세요. 인고의 세월을 거쳐 스스로 만들어낸 문양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썩은 나무토막의 굴곡진 나이테는 매우 고왔다. 어찌 보면 역경을 딛고 자신만의 인장 문양을 만들어낸 그의 삶과 꼭 닮아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거친 손을 통해 예술품으로 승화된 나무토막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