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분야에서도 ‘감동’을 주고받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바로 생명자본주의로서의 농업이다. 지금까지 농업의 경쟁력이 가격과 품질이었다면 앞으로는 아름다운 경치, 아름다운 이야기가 경쟁력이 된다는 얘기다.

농업도 감동시대…생명 접목해 차별화

   

다른 산업과 융합통해 무한가치 창출

과거엔 산에 있는 나무를 벌목해 목재로 써야 자본이 됐다. 그러나 이젠 나무를 베지 않고도, 목재로 쓰지 않고도, 있는 그대로의 나무라는 생명 자체가 훌륭한 자본이 될 수 있다. 나무가 만드는 아름다운 경치를 통해 감동을 주고, 문화·예술적 가치를 부여해 새로운 자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자본주의(Vita Capitalism)는 생명이 생산과 창조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가 2009년 처음 만든 개념이다. 지난 3월 이어령 교수는 생명자본주의포럼을 창립하며 “자본주의라는 배에 물이 들어오고 있다”며 “차가운 산업·금융자본주의에서 생명자본주의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자본주의가 삶의 수단을 얻기 위한 자본주의였다면 생명자본주의는 삶의 목적, 즉 행복을 얻기 위한 자본주의다. 생명자본주의에선 물품이 아니라 공간과 감동이 상품이 된다. 특히 농진청이 주력하고 있는 작지만 강한 농업인 강소농을 더욱 차별화하고 경쟁력 있게 만들 수 있는 것 역시 생명자원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자연에 조화로운 농업을 추구하는 생명자본주의다.



농촌진흥청은 지난해 벌의 독침 성분을 활용해 여드름 전용 화장품을 개발했다. 봉독이라고 불리는 이 성분은 항균작용이 탁월하다. 이를 얼굴에 뿌리면 여드름균의 증식을 막을 수 있다. 이 제품은 한 화장품 회사에서 대중화시켜 인기 상품이 됐다. 꿀을 생산하는 데만 쓰인다고 생각한 꿀벌이 새로운 돈벌이 수단이 된 것이다.



가을이 되면 김포평야는 한 폭의 캔버스가 된다. 일반 벼 사이에 흑미를 심어 평야 전체에 색깔을 낸 ‘논 그림’ 때문이다. 농사를 예술로 승화시킨 발상의 전환으로 벼를 키워 돈을 벌 뿐 아니라 고장 홍보도 하고 관광 수입도 올리는 1석3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전북 김제의 자원순환형 녹색마을에서는 친환경 축사에서 돼지를 사육하고 여기서 나온 분뇨를 자원화한다. 분뇨는 퇴비로 사용되고 바이오가스 시설을 통해 에너지로 이용한다. 외부에서 에너지 유입 없이 마을 내에서 에너지를 순환해 이용하고 있다.



‘생명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10월14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생명자본주의와 농업의 새로운 가치’ 심포지엄에서 이런 사례가 소개됐다. 이 심포지엄은 생명자본주의포럼과 농촌진흥청이 함께 주최했다. 이 심포지엄은 농업이 어떻게 생명자본주의 정신에 입각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지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 생명자본주의는 정보기술(IT)·의학·교육·레저 산업 등에 다양하게 접목된다. 특히 농업은 타 산업과의 융·복합을 통해 무한한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생명산업이다. 이날 열린 심포지엄은 농업 분야에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생명자본주의의 구체적인 모습을 생명가치에 토대를 둔 농업을 통해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이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생명자본주의의 정신을 역설했다. 그는 신생아의 눈물을 보존하는 ‘메모리얼 티어즈’라는 비즈니스가 등장한 일본의 사례, 흙 없이 인공자연에서 배추와 상추를 키우는 기술 등을 소개했다.



그는 바다와 접하지 않은 충청북도 산골에도 해수욕장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고, 생명의 또 다른 가치를 끌어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산골 찜질방에 해수욕장처럼 모래를 깔아놓고 프랑스 니스 해수욕장의 정경을 3D 영상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겠어요. 바람 소리도 들리고, 바다 냄새도 나게 하고요. 아날로그와 가상현실을 결합시키면 산골도 세계적인 관광지가 될 수 있어요.”



 이날 심포지엄에는 민승규 농촌진흥청장이 참석해 ‘생명의 경쟁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농업’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민 청장은 주제발표에서 ‘3차 농업혁명’을 강조했다. 1차 농업혁명은 여러 작물을 돌려 심는 윤작법으로 생산성을 높였고, 2차 농업혁명은 화학비료와 품종 개발로 비약적인 생산량 증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 두 차례의 농업혁명으로 생산성은 향상됐지만 생명을 기반으로 하는 농업의 다양한 장점은 사라져버렸다. 농약과 비료를 과다하게 사용하면서 생태계는 파괴되고, 농산물의 안전성은 위협받게 됐다는 것이다.

- 이어령 생명자본주의 포럼 위원장(왼쪽)과 민승규 농촌진흥청장.
- 이어령 생명자본주의 포럼 위원장(왼쪽)과 민승규 농촌진흥청장.

자연과 조화 이루는 농업 돼야

민 청장은 “융합과 연구개발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명이 바로 3차 농업혁명”이라며 “농산물뿐 아니라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생명기술(BT)·IT와 결합해 첨단 기술을 개발해 죽이는 농업이 아니라 살리는 농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농산물 시장의 개방이 갈수록 빨라지는 상황에서 국내 농업의 경쟁력을 가격이나 규모에서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농산물이 단순한 먹거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 예술과 접목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민 청장은 한국농업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변곡점에 와 있다며 생명자본주의가 농업의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자연의 한계를 인위적으로 극복하는 농업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농업이 돼야 합니다. 생명이 생산과 창조의 자본이 되고, 감동이 경제력이 됩니다. 농업이 공업 등 타 산업과 생명순환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겁니다.”

 

  생명자본주의 농업 성공사례    1  - 청매실농원 홍쌍리 대표

“매화는 딸, 열매는 아들처럼 키웁니다”

- 홍쌍리 대표(위)와 청매실농원 전경.
- 홍쌍리 대표(위)와 청매실농원 전경.

전남 광양시 다압면에 있는 청매실농원. 이름 그대로 매실을 키워 내다파는 매실농장이다. 그러나 여느 매실농원과는 풍광부터 다르다. 매년 봄이면 19만8000㎡(6만여평) 산등성이에 가득 심은 매화나무에서 눈꽃 같은 꽃송이들이 날린다. 겨울에도 매화나무 아래는 여전히 푸르다. 나무 아래 보리를 심기 때문이다.



농원 뒤편에는 구절초와 맥문동, 벌개미취 등 ‘천대받고 짓밟히는’ 50여종의 약용식물들이 자라고, 농장 아래쪽에는 3000개의 항아리에서 매실 고추장, 매실 된장, 매실 장아찌 등 매실을 활용한 각종 장류들이 익어간다.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전통 초가집, 그 뒤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이 농장을 찾는 사람의 수는 연간 150만명에 달한다. 해외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 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홍쌍리(69) 대표는 한 해 40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친환경 매실 농사로 매실 가공식품을 만들고, 농원을 관광 상품화했기 때문이다.



“매화나무에 핀 꽃은 내 딸이고, 열매는 내 아들입니다. 내 나이가 80, 90세가 돼도 내가 키운 작물들이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 내 꿈은 그겁니다.”



‘한국식품명인’으로 선정되기도 한 홍 대표는 “매실을 단순히 상품이나 돈이 아니라 자연의, 신체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키우고 있다”며 “주변에 야생화 군락을 조성하고 유기농업 기술을 실천하는 등 자연의 생명력을 최대한 살린 게 농장의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1965년 홍 대표는 부산서 지금의 외딴 산속으로 시집을 왔다. 23세 때였다. 기차도, 버스도, 전화도 없는 산기슭은 온통 밤나무 천지였다. 당시만 해도 밤 한 가마니는 쌀 두 가마니 값이었다.



하지만 홍 대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시아버지인 고 김오천옹이 심어놓은 청매화 몇 그루였다. 그는 시아버지를 설득해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낮이면 머슴같이 일하고 밤이면 책을 보면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매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며, 사랑하며, 환경 친화적으로 농원을 가꾸고, 매실로 아픈 몸을 치료하는 마음으로 매실 생산품을 만들었다.



‘흙이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다’는 홍 대표의 생명사랑이 청매실농원을 해외에서도 찾아오게 하는 매실명가로 만든 토대가 된 것이다.

 

  생명자본주의 농업 성공사례    2  - 다알리아농장 이종범 대표

“꽃 심고, 음악 틀어주니까 쑥쑥 자랍니다”

- 이종범 대표(위)와 다알리아농장 전경.
- 이종범 대표(위)와 다알리아농장 전경.

충북 청원군 미원면에는 꽃향기와 음악이 어우러진 한우농장이 있다. 축사는 ‘예술관’으로, 한우는 ‘예술한우’로 불린다. 바로 ‘다알리아농장’이다. 이 농장에서 300마리의 한우를 키우는 이종범씨(51)는 한우 우리에 음악을 틀고, 축사 앞에 야생화 꽃밭을 만들었다. 그는 “야생화를 심고 음악을 들려줬더니 육질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씨가 축사를 화원처럼 꾸미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며 고추 농사를 짓던 그는 1999년 축산에 뛰어들었다. 육우 40마리로 출발한 그는 부지런히 사료를 먹였다. 하지만 소는 크게 자라지도, 고기 품질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그가 변해야 산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은 2007년 초 벤처농업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다. 한 강의에서 “소비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축산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소를 잘 키워 소비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던 그에게 실마리를 준 것은 그의 아내였다. 당시 둘째 아이를 낳은 후 우울증에 빠져 있던 아내는 시간만 나면 축사 주변에 갖가지 꽃을 심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꽃이 활짝 피자 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소들이 편안해했고, 잔병치레도 거의 하지 않은 것이다.



부부는 2500㎡에 달하는 축사 주변에 본격적으로 꽃을 심었다. 다알리아를 중심으로 해바라기, 들국화, 백합, 백일홍 등 갖가지 꽃을 심었다. 꽃이 지는 겨울에는 꽃그림액자를 축사 곳곳에 걸어놓는다. 현재 축사 주변에 심은 꽃은 다알리아 등 100여종. 한 해 꽃씨를 구입하는 비용만 300만원에 달한다.



소들에게 음악도 들려주기 시작했다. “음악이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축사 2동 가운데 한 동에는 음악을 틀어주고, 다른 동에는 틀지 않았어요. 3개월 후에 비교해봤더니 음악을 듣고 자란 한우는 하루 최대 1㎏까지 체중이 더 늘어났더군요. 그래서 모든 축사에 스피커를 달았지요.”



음악은 매일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 동안 튼다. 음악은 시간이나 날씨에 따라 매번 바뀐다. 아침에는 자연의 소리나 조용한 음악을 들려주고, 화창한 날씨에는 경쾌한 음악을 들려주는 식이다.



이러한 역발상의 효과는 놀랍다. 이씨 농가의 고급육 생산효과는 다른 농가보다 월등히 높다. 그의 농장의 최상급 육질 출현율은 67%(1+ 이상등급)를 기록, 전국 평균 34%에 비해 2배나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