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동안 가구제작 외길 ‘명장’…
“박물관 유물보고 왕실가구 그대로 재현”

경기도 의정부에 자리한 이성준 명장의 공방. 어지럽게 나무 조각이 쌓여 있는 비좁은 작업실은 왕실가구를 제작하기에는 다소 초라해보였다. 그러나 작업실 한 칸에 보관 중이던 용상이 자태를 드러내자 공방이 일순 환해졌다. 용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의 의자와 동일한 모양으로 일명 ‘세종대왕 용상’이다. 가로 1.7m, 세로 1.4m의 붉은색 의자는 금으로 아로새긴 용무늬가 사방으로 둘러져 있고 등받이와 팔걸이 부분에 여의주를 문 용의 머리 6개가 조각돼 있다. 이 명장은 “의자에 달린 용머리까지 직접 조각하느라 제작 기간만 6개월이 걸렸다”며 “용상은 순금으로 장식했기 때문에 시가로 따지면 5000만원의 가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명장은 2009년부터 임금님 가마, 용상 등 왕실가구를 제작해왔다. 판매용이 아니라 전통가구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서다. 역사 자료를 근거해 만든 그의 왕실가구 작품은 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지난 9~10월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도 관람객들의 큰 이목을 끌었다.
“제가 재현해 만든 조선시대 용상은 3가지입니다. 궁궐에서 정무를 볼 때 앉는 실내용 의자와 야외용 접이식 의자, 마지막으로 외국 사신들과 접견할 때 앉는 의자입니다. 이 중 첫 번째 실내용 의자가 세종대왕 동상에 쓰인 용상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이 정확히 남아 있지 않아 세종대왕이 실제로 이 의자에 앉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웃음).”
사실 그는 왕실가구를 만드는 기술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 모두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이나 도록을 보고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가구라도 실물이나 사진을 보면 설계도면을 그려낼 수 있다. 진정 ‘가구의 달인’이다. 그렇다고 그의 왕실가구가 단순히 모양만 흉내낸 것은 아니다. 정확한 고증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다. 그의 용상 작품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이 명장은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 1945년 충북 충주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나 집안에서 복덩이로 불렸다. 부친은 농사를 지으며 집수리를 돕는 목수일도 했다. 그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3세에 동네 장터 앞 가구공방에서 목공 일을 시작했다. 15세에 나무를 깎아 기타를 만들 정도로 그의 목공 솜씨는 남달랐다. 그 덕에 공방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 접이식의 야외용 용상.
나무 깎아 기타 만든 ‘목공예 신동’
“당시 가수 이미자의 노래가 한창 유행이었는데 공방에 라디오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만든 기타로 유행곡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곤 했죠. 요즘도 음악을 좋아해 가끔 길가다 망가진 기타가 있으면 주워 틈날 때 고쳐 연주하곤 합니다.”
1962년 ‘서울붐’이 일 때 이 명장도 성공을 꿈꾸며 상경했다. 왕복 차비 달랑 120원을 들고서였다. 서울 미아리의 친척집에 머무르며 근처 가구공장에서 일을 배웠다. 눈썰미가 좋아 가구제작의 노하우를 남들보다 빨리 익힌 그는 30세에 첫 개인 공방을 차렸다. 워낙 실력이 좋아 그에게 일감이 몰려들었다. 건설회사 가구납품 마감날짜를 맞추기 위해 꼬박 일주일을 잠도 안 자가며 일한 적도 있다.
그는 부업으로 집 짓는 목수일도 했는데 많게는 하루 20만~30만원까지 벌었다. 당시 목수 일당이 1만원이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다. 젊은 시절 벌이가 좋았지만 집안의 우환으로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전통공예가구제작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은 1982년부터였다.
“당시 전통공예와 관련해 공모전이 상당히 많았어요. 이전까지는 생업으로 현대가구, 전통가구 등 다양한 가구를 만들었는데,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정식으로 전통공예가구를 만들기 시작했죠.”
이 명장은 1984년 대한불교 문화예술대상전 입선을 필두로 전승공예대전, 동아공예전 등 각종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었다. 작품이 점차 유명세를 타면서 일본, 미국 등에서 수차례 초청전시도 가졌다. 그런 노력을 인정받아 1995년 가구제작 부문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이후 전승공예대전 금상 등 큰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지만 그는 인생의 가장 보람된 순간을 명장으로 선정되던 날을 꼽는다.
“대한민국 명장이 되면 정부에서 9박10일간 해외연수를 보내줍니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의 문화 유적지를 둘러보는 프로그램인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다채로운 해외 문화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에 가장 보람된 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한땀 한땀 수제로 만드는 명품 가구
이 명장의 트레이드마크는 왕실가구지만 본업은 전통가구 제작이다. 서랍장, 경대, 뒤주, 돈궤 등 주로 소목가구를 만든다. 전통가구 제작에는 왕실가구 못지않게 엄청난 장인정신이 요구된다. 보통 가구 하나를 만드는 데 5~6개월씩 걸린다. 좋은 가구를 만들려면 나무판을 잘 말리는 일이 우선이다. 적절한 목재를 사다가 몇 년씩 말려야 비로소 가구제작에 들어갈 수 있다.
“나무는 습기에 매우 민감해요. 제가 53년 경력의 대한민국 명장으로 손꼽히지만 지금도 가구를 만들다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나무니까 만들다보면 갈라지기도, 터지기도 하죠. 가구로 완성된 다음에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아파트의 경우 건조해서 전통가구가 손상되기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가구 모양을 낼 때 테두리 주변으로 홈을 파는 겁니다. 맵시도 나지만 나무가 수축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둘 수 있어 손상이 덜 가거든요.”
나무판재가 준비되면 용도에 맞게 재단하고 가공한다. 가구설계 도면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그리지 않는다. 오랜 경험으로 웬만한 가구제작 도면은 그의 머릿속에 이미 들어있다. 그가 경대를 내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옛날 대갓집 규수들이 화장할 때 쓰던 경대입니다. 평소에는 나무상자지만 이렇게 펼치면 거울과 화장도구 서랍장 등을 갖춘 화장대로 변신하죠. 잘 보시면 각 면의 나이테가 모두 연결돼 있죠? 전통가구는 나무 고유의 결을 살려 만들어야 더욱 아름답기 때문에 재단할 때부터 구상하고 만든 것입니다.”
경대를 접고 펼쳤을 때 모두 각 면의 나이테가 하나로 이어지는 섬세한 작업 기술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머릿속 도면으로 이토록 정교한 가구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거의 예술의 경지였다.
그는 특히 나이테처럼 재료 고유의 속성을 이용해 가구의 모양내기를 즐긴다. 그가 만든 바둑판의 경우, 노란 바탕에 검은색 무늬가 있는데 이 역시 천연색이다.
“바둑판의 옆면을 먹감나무로 만들어 고풍스러운 멋을 내봤습니다. 감나무 중에서도 속이 시커멓게 먹이 들어간 나무를 먹감나무라 하는데요. 먹감나무는 감나무 100그루당 1토막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귀한 나무예요. 전통가구는 인위적으로 색을 칠하기보다 재료 고유의 멋을 살려야 제맛이죠.”

가구제작 외길…“평생 이어가고파”
일일이 수작업을 거치는 전통가구는 일반가구에 비해 비싼 편이다. 바둑판만 해도 판매가가 200만원이다. 과거 경기가 호황일 때는 제법 팔렸지만 요즘에는 전통가구를 찾는 사람들이 드물다.
“고가의 이탈리아 가구는 명품이라며 선호하는 것에 반해 우리의 전통가구는 외면하는 현실이 참 아쉬워요. 제가 왕실가구를 제작하게 된 것도 어차피 안 팔려서 쌓이는 거 후세에 남길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라져 가는 옛 문화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수익성에 안 맞아도 여전히 전통가구를 고수하는 이유다. 가구에 옻칠하는 것도 옛 방식 그대로다. 가구에 옻칠을 한 후 방에 불을 때 24시간 말리는데 건조가 끝나면 굴곡진 부분을 깎아내고 또 다시 옻칠하는 작업을 몇 번이고 한다. 이 때문에 옻칠 작업에만 한 달이 걸린다. 모든 것을 홀로 해야 하는 고독한 작업이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즐긴다.
“혼자서 나무를 깎아 가구를 만들다 보면 잡념이 없어집니다. 일에만 몰두할 수 있죠. 가장 기분 좋을 때는 완성된 가구에 마지막으로 낙관을 찍을 때예요.”
그는 모든 작품에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낙관을 새긴다. 불에 달군 쇠막대기로 찍는 낙관은 그만의 인증 마크다. 그의 창고에는 그의 낙관이 찍힌 가구 수십 개가 보관돼 있다.
“앞으로도 평생 가구를 만들며 살 겁니다. 작은 꿈이 있다면 가구박물관을 세우는 거예요. 제 생애 이뤄질지 모르겠지만 한적한 시골에 가서라도 꼭 가구박물관을 만들어 사라져 가는 전통가구를 후대에 널리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