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가 영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사륜구동 다목적 군용차를 처음 만들어낸 게 1948년 4월. 어떤 도로환경에서든 거뜬히 버틸 수 있는 강력한 군용차를 개발한 랜드로버는, 이 차를 민간용으로도 내놓아 큰 인기를 누렸다. 거친 자연환경에 도전하는 탐험가에서부터 황무지를 개간해야 하는 농장주들에 이르기까지, 다목적 자동차에 대한 수요는 예상을 훨씬 웃돌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빠른 경제개발과 사회재건이 필요했던 영국정부는 랜드로버가 개발한 다목적 자동차에 세금 혜택까지 부여했다. 따라서 당시 랜드로버 오너들은 세금을 전액 면제받기도 했다. 당연히 판매는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다목적 자동차를 처음 선보이고 22년이 지난 1970년, 랜드로버는 최고급 SUV인 레인지로버를 발표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레인지로버는 험로에 어울린다는 기존 SUV의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뜨린 고급차였다. 장비는 모두 최첨단이었고 험로는 물론, 일반 아스팔트 도로에서도 고급세단 못지않은 주행성능을 과시했다. 탐험용, 농지개간용, 사업용으로 주로 쓰이던 랜드로버는 레인지로버 발표 이후 부자들의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다.
북유럽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진수
지난 2008년 디트로이트 모터쇼. 랜드로버는 LRX라는 이름의 콘셉트카를 내놓았다. 모터쇼를 찾은 세계 각국 기자들과 관람객들을 충격에 빠뜨린 주인공이었다. LRX 콘셉트는 그동안 랜드로버가 발표해온 SUV들과 전혀 다른 이미지의 새로운 SUV였다. 보디라인은 날렵했고 디자인은 세련됐으며, 무엇보다 크기가 무척 작았다. 랜드로버는 이전까지 ‘엄청난 체구의 육중한 차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LRX 콘셉트는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들의 도심형 소형 SUV만한 사이즈였다. 사람들은 이 차에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과연 이 차가 실제로 생산될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로부터 3년. 랜드로버는 LRX 콘셉트를 기반으로 한 신차를 발표했다. 이름은 레인지로버 이보크(EVOQUE). 사람들은 3년 전에 그랬듯 다시 한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보크는 LRX 콘셉트의 성격과 형태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랜드로버 사상 가장 작다는 사이즈도 그대로였고, 마치 스포츠쿠페처럼 날렵한 보디라인과 미래지향적 디자인도 변함없었다. 소형임에도 이 차에는 랜드로버의 최고급 버전인 ‘레인지로버’ 로고가 붙어 있었다. 이는 곧 이 차가 크기와 상관없는 ‘프리미엄 SUV’임을 보여주는 단서였다. 이보크는 레인지로버 브랜드의 미래를 보여주는 힌트와도 같은 차였다.
이보크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다자인. 뒤로 가면서 급격히 좁아지는 쐐기형 유리창은 SUV에 대한 그간의 선입견을 일시에 허물어버린다. 낮게 깔린 차체는 흡사 스포츠카 같은 분위기. 말 그대로 스포츠카에 커다란 타이어를 끼워 차체만 높여 놓은 것처럼 보인다.
파격적이고 과감한 외부 디자인에 비해 실내는 전형적인 레인지로버의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호화요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레인지로버 특유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호사스럽기 그지없다. 나무와 가죽 등 재질은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디자인은 물 흐르듯 매끈하다. 모든 장비는 철저히 운전자의 편의성에 맞춰 배치돼 있으며, 눈이 휘둥그레지는 신기술로 가득하지만 다루기는 무척 쉽다.
창의적 아이디어로 안전철학 구현
이보크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는 랜드로버가 자랑하는 지형반응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모래밭과 자갈길, 진흙탕과 빙판길 등 다양한 도로조건에 따라 구동력과 서스펜션 등을 최적화해주는 이 시스템은 정통 SUV로서의 성능을 최고치로 끌어올린다. 편의장비도 근사하다. 실내에 마련돼 있는 스크린은 탑승자들에게는 TV화면을, 운전자에게는 위성 내비게이션을 동시에 보여준다. 레인지로버의 대형 SUV 부럽지 않을 전자장비도 가득하다. 이보크의 개발과정에는 빅토리아 베컴이 참여했다.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부인이자 ‘스파이스 걸스’의 전 멤버, 그리고 패션 아이콘이기도 한 그녀는 이보크의 디테일 디자인에 컨설턴트로 참여했다. 빅토리아 베컴의 개발 참여는, 그간 성능에만 초점을 맞춰온 레인지로버가 새로운 트렌드에 눈떴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이보크는 정말 예쁘고 날렵하며, 그러면서도 강력한 험로 주파능력은 그대로 갖고 있는 매력적인 차다. 하지만 정말로 좋은 건 따로 있다. 바로 꿈결처럼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 주행성능이다. 대형 레인지로버 SUV들처럼 억센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들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스포티한 감각이 돋보인다.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물결이 일면서 SUV 시장은 예전 같지 않은 게 사실이다. 차 값이 비싼 데다 덩치 크고 기름 많이 먹으며 이산화탄소도 많이 내뿜는 대형 SUV는 요즘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최근 새로 나오는 SUV들이 대부분 사이즈를 줄이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SUV 전문 브랜드 랜드로버는 이를 무척 적극적이고 영리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이보크는 작고 가벼우며 연비와 성능 좋은 디젤 엔진을 갖추고 있다. 도심에서도 매끈하게 달리고 험로에서도 정통 SUV다운 성능을 잃지 않는다. 레인지로버는 미래 자동차시장에서도 여전히 최고급 SUV 브랜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이보크가 있다.
Tip. 정통 SUV의 자존심, 지형반응시스템
도로환경 따라 최적 주행모드 제공
지난 2004년 랜드로버 디스커버리3를 통해 처음 선보인 지형반응시스템(Terrain Response System)은 랜드로버라는 브랜드의 성격과 강점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장비다. 일반주행과 자갈길 및 눈길, 늪지, 모래, 암반 등 다섯 가지 모드 중 현재의 도로환경에 가장 적합한 한 가지를 선택하면 엔진 매니지먼트와 기어박스 반응, 서스펜션, 브레이크 등 주행에 관여하는 모든 장치들이 최적으로 맞춰지는 첨단장비다. 게다가 이 장비가 작동할 때면 작동상황을 모니터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다. 극한 상황에서 이 시스템을 한번 경험하고 나면 “역시 랜드로버!”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평소 감히 엄두도 못낸 도로도 거뜬히 주파해내기 때문이다. 워낙 탄탄한 기본기에 첨단장비의 도움까지 더했으니 랜드로버의 험로 주파능력은 절정에 달할 수밖에 없다.
미니 시승기
코너 절묘하게 파고드는 성능 ‘기대 이상’
-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운전석(사진 위).
레인지로버 이보크는 브랜드 역사상 가장 작고 가벼우며 가장 효율적인 차다. 정통 SUV 마니아들은 세계 유일의 SUV 전문 브랜드 랜드로버가 이토록 작고 귀여운 차를 만들어낸 데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크의 실체를 경험해 보고 나면 그런 불만이나 의구심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이 차는 외모와 달리 정통 SUV다운 강인한 체질을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쿠페 SUV’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스타일링이 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차는 역시 보는 맛이 있어야 한다. 모터쇼의 화려한 무대를 벗어나 실제 도로 위에 등장한 이보크의 디자인은 ‘혁신’ 그 자체다.
국내 시판 모델은 2.0 휘발유와 2.2 디젤 등 두 가지. 모두 과거 랜드로버 차에 올라가던 엔진보다 배기량을 줄였다. 요즘 유행하는 ‘엔진 다운사이징’에 따른 것이다. 반면 배기량 대비 출력과 토크는 더 강력해졌다. 국내시장에서의 주력 모델은 연비 효율성이 더 좋은 2.2리터 터보 디젤 버전. 운전석에 앉으면 부드러운 가죽으로 마무리한 운전석 인테리어가 다시 한번 보는 재미를 더한다. 소형 SUV 시장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해도 좋을 실내구성과 고급성이 돋보인다.
운전석 시트 포지션은 독특하다. 세단보다는 분명 높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SUV에 비해서는 훨씬 낮다. 그 덕에 타고 내리기가 수월한 편이어서 여성 운전자들이 반길 것 같다. 재규어-랜드로버의 최신형 SD4 터보 디젤 엔진을 올린 이보크 2.2 디젤은 최고출력 190마력의 성능을 낸다(기존 3.2리터 엔진을 대체한 2.0리터 휘발유 엔진은 240마력의 강력한 출력을 자랑한다). 여기에다 차체가 작고 가벼운지라 실제 치고 나가는 맛은 생각보다 훨씬 경쾌하고 부드럽다. 속도를 올리면 차체가 점차 노면에 착 달라붙는 것도 심리적 안정감을 더하는 요소다. 이 차의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시간은 8.5초. SUV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빠른 순발력이라 하겠다.
가속력도 물론 좋지만, 이보크의 매력은 날랜 핸들링 성능에 숨어 있다. 작은 차체는 계속되는 커브길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급코너에서도 전혀 코너 밖으로 밀려나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고급 스포츠카에 주로 쓰이는 마그네라이드(MagneRide) 연속 가변 댐퍼 시스템을 적용한 서스펜션은 어떤 상황에서든 안락한 승차감을 보장한다. 크고 작은 도로 충격을 연신 걸러내면서 코너를 절묘하게 파고드는 성능은 기대 이상이다. 그렇게 열심히 달리면서도 리터당 12킬로미터 이상의 실제연비를 유지한다. 2.2리터 디젤 엔진을 올린 이보크의 공인연비는 리터당 13.7킬로미터다(휘발유 버전의 공인연비는 리터당 10.3킬로미터). 2.2리터 디젤엔진 모델 값은 7710만~8390만원이고 2.0리터 휘발유 엔진을 쓰는 모델은 8210만~9090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