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 공들이기 전에 ‘알맹이’부터 채워라 

언제부터인가 가끔씩 친구나 직장동료들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자식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흘러가곤 한다. ‘자네 아이가 몇 살이지? 이제 학교에 들어갈 때 아닌가?’, ‘학원은 어디에 보내? 영어과외는 따로 하지?’, ‘교육비가 장난이 아냐. 애들 한 명당 100만원은 될걸.’, ‘자네 첫째가 수능 볼 때가 아닌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데?’, ‘이 부장 이야기 들었어? 이번에 둘째도 S대에 들어갔다는군.’ 등등 주로 자식 교육과 진학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겠지만 자식 교육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예전 같지 않다.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학원이라고는 좀 산다 하는 집에서 피아노나 태권도, 주산 학원 등 한두 군데를 보내는 정도였고 과외라는 것은 초등학교 때는 거의 없었고 고등학교에 가야 반에서 한두 명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는 정도였다. 하물며 외국여행을 가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시대도 있었고 간혹 전공을 살리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친구도 있었지만 어학연수를 위해 외국에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부모들이 지금은 자식 교육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국, 영, 수 과외를 시키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별도로 원어민 영어 과외, 방학 때는 해외연수 프로그램, 좋은 학군으로의 이사는 필수가 되었고, 특목고 진학을 위해 중학교 때 시작하면 늦는다며 초등학교 때부터 따로 특목고 준비학원을 보낸다. 중학교에 가면 특목고 입시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키게 되고, 고등학교에 가면 최종 목적인 대학입학을 위해 논술시험 준비 같은 사교육 외 별도로 봉사활동, 사회참여활동, 각종 공모대회 입상을 위한 준비까지 해야 한다. 이른 바 본격적인 ‘스펙’ 만들기가 시작된다.

중·고생 시절부터 스펙 만드는 나라

스펙이라는 말이 화두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0여년 전 IMF 이후 몇 년간 취업에 어려움을 겪던 대학생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면서 나온 이야기다. 2009년 국립국어원에서 스펙이라는 말 대신에 순수한 우리말인 ‘깜냥’(스스로 일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을 선정했지만 아직 익숙하지는 않다. 취업에 있어 스펙은 보통 학벌, 학점, 영어점수, 해외경험, 자격증, 각종 대회입상, 산학 프로젝트, 인턴 등이며 최근에는 봉사활동이나 사회참여활동 등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즘 학생들이 준비하는 스펙은 어떠할까? 특목고 출신, 성적, 외국어능력, 각종 공모대회 수상, 자격증, 봉사활동, 사회참여활동, 리더십, 동아리활동 등 취업을 위한 스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부터 대학입학에 저런 것들이 필요해졌나?’라는 질문에는 명확한 해답이 있다. 바로 들어가고자 하는 대학에서 저런 스펙들을 가지고 학생들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수시로 변해온 입시제도에 큰 이유가 있다. 1981년까지는 예비고사와 대학별 본고사, 1982~1985년까지는 학력고사, 1986년부터는 학력고사에 논술과 면접이 추가되었고, 1994~1996년에는 수능과 대학별 본고사, 1997~2001년에는 수능과 논술, 그리고 스펙이 화두가 된 2002년부터 2007년까지는 수능과 논술, 추천서, 면접 등 다양한 평가방식이 도입되었고 수시모집 비율이 정원의 절반을 차지하게 된다. 2008년에 잠시 수능등급제를 했으나 2009년부터 현재까지는 다시 수능점수제로 환원되었고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면서 교외활동 및 학생의 잠재력과 성장성, 개성 등이 중요시되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입시 변천사가 아닐 수 없다. 2014년부터는 내신에 있어 절대평가제를 취한다고 하니 지금까지 내신에 불리했던 특목고가 인기를 끌어 특목고 진학을 위한 사교육 열풍이 더 심해질지도 모르겠다.

작년 모 대학의 입학전형 면접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학교별로 우수한 학생을 추천받아 면접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 샐러리맨만을 면접하다 대학생도 아닌 고등학생을 면접하게 돼 내심 설레는 마음으로 면접을 진행한 기억이 난다. 아직 어린 학생들인 만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나름 노력은 했지만 개중에는 말을 더듬고 당황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도중에 우는 학생도 있었다.

면접을 진행하면서 처음에 놀랐던 점이 있었다. 학교별로 우수 학생이라고 추천됐으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서류상으로 파악되는 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수퍼맨’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우수한 성적은 당연하고, 수많은 봉사활동, 독서량, 각종 포트폴리오, 경시대회 수상실적 및 자료, 방과후활동, 사회참여활동, 높은 외국어 실력 등이 돋보였고, 또한 그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만든 자료가 넓은 책상 위를 한 가득 덮고 있었다. 주어진 짧은 시간만으로는 준비해둔 자료를 모두 파악하기 힘든 게 사실이어서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만으로 단순히 그 학생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이미 앞서 제출한 서류심사가 끝난 후의 면접이기에 기존 서류에 나타난 사실의 확인과 궁금한 점을 이야기하면서 서류상에 나타나지 않는 학생의 성격이나 기질, 태도, 성품 등 인성에 관련된 부분까지도 종합해 평가한다.

학생들의 응시원서를 보면 샐러리맨의 이력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신상, 성적, 각종 실적(독서, 봉사, 대회입상 등등), 자기소개서, 추천서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칭찬 일색인 추천서보다는 학생 자신이 쓴 자기소개 내용을 주의깊게 보게 된다. 개인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자기소개 내용은 좀 서투른 듯하지만 솔직하고 학생다운 글이다. 최근에는 학생들의 자기소개 내용을 부모나 전문업체에서 대신 써주는 일도 있다고 하니 답답한 일이다. 학생 당사자와 단 몇 분만 이야기해봐도 본인이 썼는지 여부는 쉽게 알 수 있다. 조금은 정형화된 듯한 자기소개 내용도 종종 눈에 띄는데 ‘어릴 때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어려운 가정환경이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딛고 일어났고 그 은혜를 갚고자 틈틈이 시작한 봉사활동이 결국은 남에게 도움을 주었다기보다는 자신에게 깨달음을 안겨주었으며 나아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통해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기여를 하고 싶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OO대학에 진학을 하려 한다’는 것이다.

- 요즘 대학생들은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스펙’쌓기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한 대학생이 캠퍼스에 나붙은 자격증 취득 관련 속성 강의 홍보용 플래카드를 보고 있다.
- 요즘 대학생들은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스펙’쌓기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 한 대학생이 캠퍼스에 나붙은 자격증 취득 관련 속성 강의 홍보용 플래카드를 보고 있다.

스펙 광풍이 낳은 ‘붕어빵 인재들’

좋은 내용이지만 봉사와 참여 정신이 이른바 스펙으로 널리 알려진 이상 그렇게 차별화돼 다가오지는 않는다.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학생다운 글이란 너무 매끄럽거나 세련되지 않고 세상과 타협된 글이 아닌, 아직 세상을 잘 모르지만 희망이 있고 순수함과 열정이 녹아 있는 글이다.

스펙이라는 것 자체가 남들과 차별화를 두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모들이 자식의 대학입시를 위해 쏟는 수많은 노력이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는 듯하다. 학원이나 과외 등 비슷한 사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제품은 우수하지만 모두 같은 공장에서 나온 듯한 모습을 보인다면 상대평가를 하는 대학입시에서 변별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수하지만 모두가 비슷한 모습이라면 과연 누구를 선발할 것인가? 사람을 평가하는 무수한 방법이 연구되고 시험되고 있지만 결국은 기본으로 돌아가게 된다. 솔직하고 개성이 있으며 사람을 대함에 있어 편한 느낌을 주는 학생에게 더 눈이 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어떤 평가항목에 포함돼 점수를 주게 될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면접에 있어 높은 평가를 받는 요소는 의외로 단순한 경우가 많다.

최근 기업의 채용문화도 입시제도의 변화만큼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많아 봐야 학벌, 성적, 외국어점수, 필기시험, 면접 등으로 평가하던 예전과 달리 외국어는 실제 회화능력을 중시하고, 필기시험은 복잡한 적성검사로 어려워졌으며, 면접은 각 회사별로 준비를 따로 해야 할 만큼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물론 관련되는 자격증과 인턴, 산학 프로젝트, 해외경험 등도 필요하고 여기에 요즘에는 봉사활동이나 사회참여활동까지도 본다고 하니 준비하는 사람이나 평가하는 사람도 꽤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해 선발한 인재들이 예전의 단순한 방식으로 선발된 인재들보다 기업에 더 적합한 인재일까? 이미 각 기업은 새로운 채용방식을 통해 입사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통계를 가지고 채용에 다시 반영하고 있겠지만 그리 더 좋은 실적을 나타내지는 않는 듯하다.

단순히 요즘 신입사원의 1년 이내 퇴사율만 보더라도 중소기업은 30%가 넘고, 대기업도 10%가 넘는다는 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의 단순한 채용문화에서도 수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선발돼 지금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수많은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했다. 다만 최근의 인재들이 스펙이 좋은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가 경제성장을 이룬 효과로 소득이 올라가고 교육환경 같은 기반시설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발하는 쪽도 거기에 맞춰 스펙을 올릴 수밖에 없다.

입시나 취업에서 스펙이 자주 이야기되는 것은 그것이 상대평가에 있어 기본이 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 자료 없이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기에 무언가 그 사람을 나타내는 자료가 있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스펙이다. 단지 전체적인 평가를 내림에 있어 각각의 스펙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느냐가 중요하며 이 부분에 있어 명확한 기준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 입시나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종종 착각을 일으키곤 한다. 입시나 취업에 있어 스펙이 어느 정도 상식 선에서 기본적인 수준 이상이 돼야 서류전형을 통과한다고 알고 있다면 그것이 명확한 정답이다. 취업에 있어 학점은 최소 3.0 이상은 돼야 하고 TOEIC은 700점 이상은 돼야 한다거나, 입시에 있어 ‘SKY대’를 가기 위해서는 전국모의고사 성적 수준이 내신 1~2등급 정도 비율은 돼야 한다든가 말이다.

취업에 있어 채용을 하는 당사자인 기업은 이윤추구를 위해 효율과 합리를 선호하는 조직이다. 각 기업마다 채용기준이 다르지만 개개인을 세세히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한다면 당연히 기본적인 스펙으로 걸러낸 다음 남은 사람을 대상으로 면접을 진행한다. 스펙은 거기까지의 역할이며 비중이다. 본인의 스펙이 안 좋게 생각되더라도 면접 시 자신을 얼마나 잘 드러내느냐에 따라 합격의 여지는 남아 있다. 입시에 있어 당락을 결정하는 대학은 공익과 학문을 추구하는 기관으로 기업과는 스펙의 평가 비중이 좀 다르지만 그래도 성적이 가장 중요함은 누구나 짐작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서류의 성적평가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면접에서 진솔한 모습으로 개성과 열정을 잘 나타낼 수 있다면 합격할 수 있다. 종종 자신의 껍데기라 할 수 있는 스펙만을 면접에서 보이고 강조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하지만 면접관은 알맹이라 할 수 있는 인성적인 부분에 관심을 두고 높게 평가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공의 궁극적 열쇠는 스펙보다 인성

기업은 각기 바라는 인재상이 있고 대학도 각자 뽑고자 하는 인재상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적극적이며 업무수행에 필요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고, 성실함이 묻어 있어 조직 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원만한 사람을 찾는다. 대학의 경우는 잠재력과 소질이 있는 학생을 선발해 졸업 후 사회에 기여할 사람을 찾고 있다. 인재상을 보더라도 디지털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까지 말한 스펙은 이러한 인재상에 맞는 사람을 찾기 위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수치적인 요소이다. 스펙보다 중요한 요소인 인성적인 면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교육만을 통하거나 단기간의 취업준비를 하면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삶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인성이라 할 것이다. 취업에 있어서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선 최소한의 스펙을 갖추면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하며, 자식 교육을 걱정하는 수많은 부모들은 사교육과 허울 좋은 스펙 쌓기로 고민하기보다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건강한 정신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가지게 하는 데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결국 스펙은 스펙일 뿐이지 그 이상의 부가가치는 없다. 스펙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고 스펙만으로 입시나 취업에 성공할 수는 없다. 단지 스펙을 만들면서 본인에게 쌓여지는 능력과 그 과정이 경험이 될 뿐이다. 최근 봉사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나의 스펙으로 평가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진심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사회문제에 의식을 갖고 참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평가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은 그 순수한 마음에 흠집을 내고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억지로 수치화시켜 꺼내지 않아도 이미 그 사람 자체인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을 디지털화하려는 IT 세상인 지금, 공기정화기가 설치된 고층사무실에서 전자문서로 작업을 하기보다는 밤 늦게 줄담배를 피며 먹지를 중간에 넣고 타자기로 서류기안을 올리던 때가 더 따뜻하고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