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업 성장성은 무궁무진…

      

‘제2 난타’로 세계시장 두드려야”

- 사진 : 유진행
- 사진 : 유진행

소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초등학교 때 일주일에 한번 있던 구연동화 시간은 소년의 독무대가 되곤 했다. 어머니가 잠들기 전 들려줬던 옛날 이야기도 소년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면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지곤 했다. 산만하던 반 학생들도 소년이 발표하는 시간이 되면 어느새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에 몰입했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희열을 느끼곤 했다.

책벌레에 말 잘하는 똘똘한 아이였던 소년은 초등학교 때 KBS 라디오 <은방울과 차돌이>의 프로그램 진행자가 된다. 동요도 틀어주고 동화도 읽어주는 어린이 방송이었다. 소년의 끼를 일찍 알아챈 담당 PD의 추천으로 소년은 TV 드라마에도 출연한다. 아역 성우에서 아역 배우가 된 것이다. <똘똘이의 모험>과 <얄개전>, <여로> 등으로 인기를 끌며 소년은 어느덧 ‘국민 남동생’으로 등극한다. 그후 1980년대 <젊음의 행진>이나 <가요톱10>, <장학퀴즈> MC와 <밤을 잊은 그대에게> 라디오 DJ 등 유명 아이돌 스타나 하는 인기 프로그램을 도맡으며 소녀팬들의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소년은 어느 날 화려한 연예계 활동을 접고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도 소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소년은 뉴욕에서 싸구려 시계를 팔면서도 행복했다. 한국의 연예인 생활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지만 보고 싶은 공연과 읽고 싶은 책과 다니고 싶었던 여행을 맘껏 즐길 수 있었던 낭인(浪人) 생활은 훗날 크리에이티브의 원천이 된다. 한국에서 느끼던 공연에 대한 갈증과 허기를 맘껏 채운 소년은 4년간의 뉴욕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누구도 실행하지 못한 한국 최초의 비언어(非言語) 연극에 도전한다.

이 넌버벌 퍼포먼스(대사가 없는 공연)는 아시아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 전 세계 41개국 272개 도시에서 공연하며 총 관객 600만명, 총 공연횟수 2만회를 돌파하며 한해 매출 200억원(2010년 이후)을 기록하는 흥행상품으로 자리잡았다. 15년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서 한국 문화산업의 위상을 드높이는 기적을 낳은 이 공연의 영어 제목은 ‘쿠킨(Cookin : Cooking의 줄임말)’이며 한국에서는 마구 두들겨 패며 무아지경에 이른다는 뜻의 ‘난타(亂打)’로 불린다. 기적을 만든 문화 수출자이자 문화 CEO로 거듭난 소년의 이름은 송승환이다.

- 흥겹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난타> 공연 장면(왼쪽). - <난타>가 미국 브로드웨이에 처음 소개된 공연안내 팜플렛을 들고 있는 송승환 대표.
- 흥겹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난타> 공연 장면(왼쪽).
- <난타>가 미국 브로드웨이에 처음 소개된 공연안내 팜플렛을 들고 있는 송승환 대표.

국내 최초의 문화벤처기업 PMC 설립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아티움 3층 PMC프러덕션(www.i-pmc.co.kr: PMC는 Performance, Musical, Cinema의 머리글자, 이하 PMC)에서 만난 송승환 대표의 옷차림은 캐주얼했다. 평소에 터틀넥과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를 즐겨 신는다는 그의 외모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나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괴짜 천재 스티브 잡스와 닮았다고 말하니 PMC 직원 중 한 명이 “우리 대표님은 휴대전화, 태블릿PC 다 애플 거 사용해요. 아이패드로 회의도 하시고. 평소 옷차림도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으시죠”라며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닌 듯 부정하지 않았다.

공연제작사 최초로 주식회사 형태의 문화 벤처기업인 PMC는 근무환경이 다른 회사에 비해 자유분방한 편이다. 직원들의 옷차림새나 일하는 방식 또한 그러하다. 신입사원이 솔선수범해 회식 날짜를 잡아 사장에게 통보했던 이야기나 10억원 규모의 뮤지컬 대본을 인턴사원이 담당했던 일, 작가로 시작했지만 끼와 재능이 출중해 연출가로 데뷔시키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창작자를 비롯해 상하 직급 관계없이 끼와 재능이 있다면 폭넓은 기회를 주고 아낌없이 지원해 주는 일화는 PMC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하여 직원들이 회사를 놀이터로 생각할 수 있도록 적당한 동기부여를 해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나 상상력, 창의력을 어느 회사보다 중요시한다는 점 등 애플과 공통점을 찾자면 충분히 찾을 수 있을 터였다.

탤런트, 연극·영화배우, 쇼 프로그램 진행자 등 연예인으로서 송승환과 공연제작자이자 회사의 대표, 대학 학장으로서의 그는 유명세나 직급에 상관없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였다. ‘대사 한 줄 없는 연극이 무슨 연극이냐’는 세상의 편견과 상식을 깨고 <난타>라는 비언어극을 생각해낸 그가 아니었던가. 40대가 넘어 머리를 노란색으로 물들이기도 했던 그는 틀이나 격식보다는 자유분방함이 더 잘 어울리는 CEO였다. “아, 이런! 오늘 사진촬영까지 하는 줄 몰랐는데”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만큼은 포즈를 바꿔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프로였다.

데뷔 48년차의 ‘팔방미인 엔터테이너’

송승환 대표는 하루에 배우, CEO, 교수, 방송인 등 여러가지 일을 나눠 소화해야 하는 때가 다반사다. 하루를 3일로 쪼개 쓰고 분 단위로 스케줄을 정한다고 말할 만큼 그의 하루는 남들보다 몇 배 바쁜 셈이다. 그래서 종종 워커홀릭(일 중독자)이란 말이 그를 따라다닌다.

“1965년 데뷔해 지금까지 늘 바쁘게 살아왔어요. 분장실에서 대본 외우면서 동시에 학교 숙제나 시험 준비도 해야 했으니까요. 인기 있을 때는 연극, 드라마, 영화, MC, DJ까지 하는 바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적도 있었지만 즐겨서 그런지 힘든 줄도 몰랐었죠.”

가수이면서 연기도 하는 등 연예계가 이른바 ‘엔터테이너 시대’인 요즘, 데뷔 48년차의 송 대표에게 ‘원조 엔터테이너’라는 칭호는 잘 맞는 옷 같았다.

“끼가 있었으니까 성우도 하고 배우도 하고 뭐 그랬던 거죠. 그땐 ‘다재다능하다’는 표현으로 ‘팔방미인’이란 좋은 말이 있었죠(웃음).”

‘팔방미인’ 송승환 대표는 캠퍼스로 활동영역을 넓혀 벌써 두 번째 입시를 치르는 중이기도 하다. 학교 이름은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문화예술대학이고 그의 직함은 학장이다. 멀티플레이어를 요구하는 이 시대에 ‘한 가지 일을 다른 영역으로 확대해 녹여서 하나로 합친다’는 의미의 융합(融合)이란 말은 송 대표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다.

“‘학문과 문화예술 영역간의 통섭’이란 학교 슬로건과 제가 잘 맞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거죠. 제 역할이 단순히 가르치는 개념을 넘어 대중문화 발전의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에서 대학 강단 경험이 있는 송 대표였지만 학장으로서의 역할은 부담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성격의 그에게 학문 간 장르의 벽을 허물고 융합하도록 만드는 일은 분명 매력으로 다가왔다. 새로 출범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뽑고 커리큘럼을 만들어 미래 문화예술산업 인재 양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항해하는 선장 역할은 그에게 잘 맞았다.

“생긴 지 1년 된 학교라 본격적인 융합을 위해선 아직 가야 할 길도 멀고 할 일도 많아요. 하지만 문화예술 산업 분야는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분야예요. 경쟁률이 만만치 않은 이유도 지원자들이 이제 이 분야의 미래를, 가능성을 알기 때문이죠.”

하루에 여러가지 인생을 사는 그가 지쳐 보이지 않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렇다고 따로 시간을 내 운동을 하거나 체력 관리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술을 마시지 않아요.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만큼 자기관리가 따로 있을까요. 남들이 술 마시는 저녁 시간 이후에 저는 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할 수가 있는 거지요(웃음).”

최근 KBS 2TV ‘이야기 쇼 두드림’ 토크쇼에서 황석영, 김용만, 신해철과 함께 MC로 컴백한 그는 다섯 시간에 걸친 녹화 시간이 지치기는커녕 즐겁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여러 직업 중 “연기를 하는 배우가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말할 만큼 연기에 대한 애착도 크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남의 인생을 살아보며 대리만족할 수 있는 배우란 직업이 그에게 삶의 원동력인 셈이다. 조연급 감초 역할이나 악역도 마다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캐릭터만 살아있다면 한번도 해보지 못한 역할에 도전하고 싶다는 그다.

- 공연장을 살펴보며 뭔가를 지시하는 송승환 대표.
- 공연장을 살펴보며 뭔가를 지시하는 송승환 대표.

난타 성공 뛰어넘는 후속작 꾸준히 시도

난타는 비언어극, 즉 말이 없는 공연이다. 국경을 넘어 세계에서 통할 수 있었던 비결도 연극이 언어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재의 신선함도 한몫 했다. 소리가 가장 많이 나는 부엌에서 일어나는 스토리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네 명의 요리사들이 식칼과 도마, 냄비, 프라이팬 등 주방기구를 가지고 요리를 시작한다. 사물놀이 리듬에 맞춰 신나게 두드리면서 90분간 관객과 교감하며 흥을 돋운다. 한국 전통 사물놀이를 연상케 하는 ‘두드린다’는 콘셉트에 연극적인 드라마가 잘 버무려진 것이다. 게다가 공연장이 휴대폰을 꺼야 하고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 엄숙한 공간이라는 편견도 깨버렸다. 공연장에서 관객은 난타의 주인공마냥 신나게 즐기면 되는 것이다.

1997년 호암아트홀에서 첫 공연을 가진 이후 99년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인정을 받고 2004년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후 온갖 흥행기록을 세우기까지 15년째 난타는 PMC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난타만을 공연하는 전용관도 2000년 7월 서울 정동에 처음 문을 연 후 강남, 명동, 홍대, 제주 등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난타는 PMC의 얼굴이자 송승환 대표의 분신이다. 그래서인지 난타 후속작에 대한 기대도 제법 크다. 제작자로서 난타 신화를 넘어설 만한 작품 창작에 대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UFO>나 <대장금>을 비롯해 후속작 시도를 많이 해왔어요. 실패한 작품도 더러 있지만 성급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박카스’에서 ‘비타500’이 나오기까지 30년이 걸렸지 않습니까?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시간을 두고 느긋하게 가는 것도 방법인 것 같아요(웃음).”

송 대표가 올해 새롭게 도전하는 작품이 있다. <웨딩 뮤직 쇼>(가제)는 난타와 같은 비언어극이다. 결혼식장에서 일어나는 온갖 해프닝에 퍼포먼스와 음악이 가미된, 난타의 뒤를 이을 ‘2012년 PMC의 대형 프로젝트’인 셈이다. 난타처럼 흥미로운 스토리로 관객의 상상력을 뛰어넘고 반전이 있는 작품이 될지 기대해볼 일이다. 또 올 상반기에 선보일 계획으로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창작 뮤지컬 <루팡>도 이미 대본과 음악 작업을 마친 상태다.

“공연은 리스크가 큰 사업이에요. 난타라는 ‘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 : 매출액이 높은 인기 콘텐츠)’가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가져다 줘 우리 회사가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PMC는 한해 창작 뮤지컬 3편 이상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난타로 대박 신화를 썼지만 한번도 안주한 적이 없다. 하지만 해외 라이선스 작품이 아닌 순수 창작 뮤지컬만을 제작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모험에 가까운 일이다. 실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여기에 송 대표의 공연 비즈니스 감각이 발휘된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대형 극장에서 시작하지 않아요. 소극장 공연부터 만들죠. 300석 규모의 대학로 소극장은 PMC의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예요. 작은 규모로 작품을 올린 뒤 점점 몸집을 키우는 겁니다.”

PMC의 원칙은 간단하다. 절대 작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철저하게 관객이 원하는 재미와 감동이 있는 작품으로 완성도를 높이며 흥행몰이에 들어간다. 상업적이란 비판도 있지만 관객이 없으면 좋은 작품이 아니라는 원칙이 우선이다. 300석에서 시작해 관객 반응이 좋으면 800석으로 옮기고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지원한다. PMC의 대부분 창작 뮤지컬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공했다. 특히 쥬크박스 뮤지컬인 <달고나>나 <8090 가요 젊음의 행진>은 복고란 트렌드와 잘 맞물려 흥행 보증수표로 인정받은 작품들이다. 또 2000년대 가요로 버무린 <늑대의 유혹> 또한 국내에서 인정받고 올 3월 일본 오사카에서 한달 동안 공연할 예정이다. 그 외 대학로에서 흥행 가속도를 올리고 있는 <밀당의 탄생>은 코믹연애멜로사극이란 새로운 장르를 표방하고 있다. 그의 끊임없는 창작과 실험은 집념에 가까워 보인다.

관객이 원하는 재미·감동 줘야 좋은 작품

“공연이 산업화되려면 제작자가 해외 라이선스 작품 대신 국내 순수 창작물을 잘 만들어 해외에서 돈을 벌어야 해요. 국내 시장은 너무 작아요. 특히 일본,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한류로 검증된 아시아 시장에 가능성을 두고 있죠. 또 문화 콘텐츠를 돈을 주고 산다는 개념이 생겨야 해요. 아직도 초대권으로 공연을 보려는 사람이 많아요. 이 문화가 빨리 없어져야 해요.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도 필요합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이 전체 정부 예산의 1.2%밖에 안돼요. 문화산업화 정책 중 뮤지컬에 대한 예산이 그동안 없었던 거죠.”

송 대표가 작년 1월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가장 열정을 바친 일은 창작 뮤지컬에 정부가 직접 예산을 지원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기획재정부에 배우들과 함께 찾아가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그 결과 올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가 뮤지컬 지원금 30억원을 편성했다. 예산안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면 뮤지컬의 산업화 첫 단계라 할 수 있다.

“매년 120만명의 외국인이 한국에서 공연을 보는데 그중 70만명이 난타를 관람하죠. 난타는 국가에 공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부가 뮤지컬 육성 사업에 힘을 써준다면 난타 같은 작품을 만들어 후배들이 세계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거죠.”

작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제의를 정중히 거절한 사연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충분히 정책을 전달하고 있잖아요. 필요하면 정부에 건의하면 되죠. 저는 현장이 좋거든요.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게 제 역할이죠. 사실, ‘그 일’은 재미가 없잖아요(웃음).”

PMC는 매년 어린이극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어린이 난타>를 비롯해 <가루야 가루야>, <피노키오>, <호두까기 인형>등 다양한 형태의 어린이극을 올리는 이유는 어린이가 미래의 잠재 관객이기 때문이다. 또 공연을 많이 봐야 좋은 공연과 나쁜 공연을 감별하는 안목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난타를 넘어서는 세계적 공연을 만드는 문화 CEO가 탄생할 거란 게 송 대표가 어린이극에 투자하는 이유다.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청년 같은 사람들이 있다. 송승환 대표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늙지 않아요. 전 새로운 프로젝트에 도전할 때도 그 일의 재미부터 따지죠. 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방송국이든 학교든 회사든 모두 젊잖아요. 젊은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젊게 사는 비결 아닐까요(웃음).”

상상을 하면 곧바로 실행으로 옮기고 꿈을 이루는 그에게 실패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건 ‘낙천성’이란 긍정의 이미지가 커 보이기 때문이다. 난타로 세상을 두드리고 성공한 송승환 대표가 올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긍정적으로 기대해본다. 

 

▒ 송승환 대표 프로필

1957년 서울 출생. 보성중, 휘문고를 거쳐 한국외국어대에 입학하고 명예졸업했다. 연극을 향한 열정으로 극단76에 입단해 연극과 방송, 영화를 오가며 배우로 활동했다. <젊음의 행진>, <장학퀴즈> 등 TV 프로그램 MC로 활약하며 하이틴 스타로 활동하다 1985년 뉴욕으로 떠난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문화에 눈을 뜬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9년 극단 ‘환 퍼포먼스’를 창단했다. 이후 1996년 고교 동창인 이광호 공동대표와 주식회사 PMC프러덕션을 설립한 후 한국 최고의 공연기획사로 키웠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융합문화예술대학 학장,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