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정그룹 대표 의류브랜드 인디안은 단일 브랜드로 국내 최대 판매량을 자랑한다. 인디안과 인디안리더스, 앤섬 등 인디안 브랜드 계열의 지난해 매출은 3800억원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브랜드들이 매출 1000억원을 넘기기가 쉽지 않는 상황에서 중견기업이, 그것도 브랜드 하나로만 이 정도의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1974년 설립된 세정그룹은 현재 10개의 관계회사에서 2600명이 근무하는 의류전문 기업으로 지난해 업계 최초로 매출 1조원(1조50억원)시대를 열었다. 국내 의류전문 중견기업으로 매출 1조원 시대를 연 것은 세정그룹이 처음이다. 창립 37년 만에 매출 1조원을 돌파한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제품 하나에도 장인정신을 심어라”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의 경영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혼의 경영’이다. 제품마다 장인정신을 심어넣는다는 건 박 회장이 회사 설립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온 원칙이다. 박 회장은 국내 패션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1974년 무일푼으로 시작한 동춘섬유공업사에서 출발한 세정그룹은 오늘날 제일모직, 코오롱, 이랜드, LG패션 등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하고 국내 최대 매출을 자랑한다. 현재 주력사인 (주)세정에서 판매 중인 의류 브랜드는 앞서 설명한 인디안 계열을 비롯해 여성복 올리비아로렌, 남녀 캐주얼 헤리토리, 토털 브랜드 트레몰로, 할인점 브랜드 폴베이, 런딕, 앤클리프 등이다. 여기에 계열사 세정과 미래에서는 20대 타깃 캐주얼 브랜드 니(NII)와 크리스, 크리스티 등을 판매하고 있다. 언젠가는 내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에 옷가게 점원에서 출발한 그의 성공스토리는 TV드라마 ‘패션70’의 소재로 사용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오늘날 세정과 박 회장을 만든 ‘인디안’이라는 브랜드는 어떻게 탄생된 것일까.
“1974년쯤인가. 옷 400벌을 동대문에 내다팔기 위해 부산역에서 밤 11시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좀 남았어요. 그래서 중앙동에 있는 한 서점에서 책을 뒤지는데 한 외국서적에 인디언 추장이 말을 타고 광활한 평야를 바라보는 그림을 봤어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뭔가 괜찮은 브랜드가 없을까 고민해 왔었는데 어감도 좋고 와닿더라고요.”
용기만으로 시작한 박 회장의 무모한 도전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직원들에게 “장사꾼은 제품을 팔고 기업가는 브랜드를 판다”며 브랜드 이미지를 강조하는 그는 그래서인지 품질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저는 티셔츠나 재킷을 팔지 않습니다. 혼을 팔고 있을 뿐이죠. 그 혼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치예요. 혼이 담기지 않는 제품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어요. 경영자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제품을 어떻게 고객에게 좋다고 팔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전 제 맘에 들지 않는 제품은 절대 팔지 않습니다. 고객이 얼마나 무서운데요. 장인의 혼이 담긴 제품은 고객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니까요.”
실제로 세정이 출시하는 모든 시제품은 박회장 본인이 직접 손으로 만져보는 등 이것저것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출고가 가능하다. 인터뷰가 있었던 지난 3월5일도 박 회장은 하루 종일 사내에서 품평회를 가졌다. 관계자 몇 명만 참석한 가운데 비밀리에 열린 이날 품평회에서 박 회장은 할인점 브랜드 1000여 벌을 일일이 손수 만져보고 평가했다. 매번 그렇지만 품평회에서 박 회장은 디자인부터 소재, 박음질까지 꼼꼼히 체크한다. 현재 세정의 13개 브랜드에서 품평회에 출시하는 옷은 브랜드 당 1000~2000벌. 단순 계산해도 매년 2만6000여벌의 옷 하나하나가 박 회장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고객들에게 선보여진다. 품질과 관련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회장은 이 같은 품평회를 창립 이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거른 적이 없다는 게 회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품질을 넘어 경이로움을 팔아라”
그러던 세정이 본격적인 성장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재래시장판매 위주에서 대리점 판매 위주로 유통판매방식을 바꾸면서부터다. 인디안 브랜드로 재래시장에서 품질 좋은 남성 캐주얼 의류로 인기를 얻던 박 회장은 1988년 돌연 재래시장 도매 방식에서 프랜차이즈 형태로 변신을 시도한다. 자본력을 갖춘 대기업 계열사라면 모를까 세정과 같은 중소기업에 대리점 위주 판매방식은 엄청난 위험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안정적인 영업구조를 버리고 대기업과의 전면전에 나서는 것에 대한 주변의 우려는 만만치 않았다.
“당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뉴욕 맨해튼 거리를 돌아다녀보니 로드숍이 아주 보편화돼 있더라고요.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보세요. 스트리트 몰이 쭉 이어져 있잖아요. 전 앞으로 유통 트렌드가 편리성 중심으로 변할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대리점 방식 도입은 당연한 결과였죠. 거점 지역도 도심지보다는 외곽지역 중심으로 우리만의 독특한 매장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지금도 많은 의류회사들이 엄청난 돈을 내며 백화점에 입점하려고 해요. 그러니 옷값이 비싸질 수밖에 없어요.”
박 회장의 결단은 인디안을 국민브랜드로 만든 동력이 됐다. 도심 백화점이 아닌 시 외곽에 거점 점포를 여러 곳 두어 고객과의 간격을 좁힌 것은 가격적인 측면뿐 아니라 박 회장의 지론인 브랜드 이미지 강화 차원에서도 성공으로 이어졌다.
대리점 체제 도입 2년 만에 인디안 매장은 전국 140여개로 늘었다. 1987년 100억원을 넘긴 매출도 1989년 280억원, 1990년에는 360억원으로 급성장했다. 현재 세정그룹 내 의류브랜드 대리점수는 1000여개로 국내 최대 규모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국내 패션업계는 패스트패션(SPA) 열풍이 거세다. 유니클로를 비롯해 H&M, ZARA(자라) 등 대형 SPA브랜드가 잇따라 국내 상륙하면서 시장 점유율 30%선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다보니 대기업과 SPA 사이에서 패션 전문 업체들은 매출난에 허덕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나산, 톰보이 등 패션 전문기업들이 잇따라 부도를 맞는 등 국내 패션산업은 시간이 갈수록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부분의 기업이 신규 브랜드를 론칭할 때 사세 확장이나 단기 이익 확대에만 골몰하는데, 패션은 정체성이 중요한 산업이에요. 우리문화를 담아내야 한다는 얘깁니다. 요즘 대기업들이 해외 유명 브랜드를 많이 갖고 들어오는데 예전에는 안 그랬나요. 그리고 이건 좀 생각해볼 점인데요. 초창기 우리 대기업이 고생해가면서 글로벌브랜드를 키워놓으면 곧 해외 본사에서 직접 법인을 설립해 국내로 진출했어요. 아마 대부분 그랬을 겁니다. 결국 우리 대기업이 한 일은 해외업체에게 우리 의류시장 문을 열어준 역할밖에 없었다는 얘깁니다. 여기에 로열티, 광고비까지 옷값에 포함되니 값이 비쌀 수밖에요.”
박 회장은 국산 브랜드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최근 일본이 국내 화장품 시장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고 동대문이 아시아 패션 디자인의 본류로 잡아가고 있는 것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최근 이랜드, 제일모직 등이 중국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것도 긍정적인 변화다. 박 회장 역시 지난 1998년 중국 칭다오에 회사(청도세정복장유한공사)를 세우면서 시작한 대중국 전략을 올해부터 새롭게 정비한다는 계획이다.
박 회장의 올해 계획은 전 연령대가 찾는 통합패션 브랜드를 마련하는 것이다. 스포츠웨어 브랜드 스웨파와 아웃도어 웨어 센터폴도 연내 론칭한다. 아울러 올리비아로렌의 중국시장 진출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현재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지에서 생산되는 공급처를 인도 등지로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모색 중이다. 연내 2000억~3000억원대 기업을 인수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이를 토대로 2016년 매출 2조원 돌파라는 구체적인 목표도 마련했다.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눠라”
패션업계 리더답게 세정은 최근 몇 년 동안 자사 이익보다는 올바른 시장구조를 만들어 가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하버드 경영대 마이클 포터 교수는 기업이 단순한 사회적 책임을 넘어서 지역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발전시키며 공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걸 가리켜 CSV(Creating Shared Value)라고 하는데 저도 여기에 동감합니다. 이걸 우리말로 표현하면 대·중소기업 상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죠. 그래서 저희도 국내 하청업체와 동반자적인 유대관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고객, 대리점주, 협력업체가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니겠습니까.”
박 회장이 본사를 창립 이래 지금까지 부산에 두고 있는 것도 기업의 사회적책임을 위해서다. 박 회장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섬유, 패션도시로 부산이 각광을 받았지만 지금은 시장 환경, 원자재조달 여건 등을 이유로 부산 의류기업들이 수도권으로 집중되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저희는 조금은 힘들고 더 어려운 일이 오더라도 부산을 지킬 겁니다. 오늘날 세정이 있기까지는 지난 38년간 함께 해온 부산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저희가 돈을 벌어 부산의 교육, 문화, 환경 등에 재투자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책임인 CSV 아니겠습니까.”
박 회장이 최근 기업 성장과 함께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사회공헌 활동이다. 세정은 중견기업치고 벌이는 사회봉사활동이 상당히 많다. 박 회장 스스로가 지금까지 사재 30억원 가량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런 이유로 박 회장은 지난 200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부산지역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가입했다. 자신이 내는 국민연금을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하는 은빛연금 기부자 1호에도 선정됐다. 작년 5월에는 사회복지법인 세정나눔재단을 설립했다. 그가 재단에 출연한 자금은 개인 돈을 포함해 330여억원이다. 세정그룹 산하에 있는 세정나눔재단은 자립기반이 취약한 사회복지시설, 장애인,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등 소외계층 이웃을 지원해주고 있다. 이 밖에도 박 회장은 지난 2008년에는 기업의 문화활동을 지원해주기 위해 부산메세나진흥원 이사장을 맡았으며 현재 대한요트협회 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 회장은 공격적인 경영은 올해도 계속될 거라고 밝혔다.
“우리나라 사람들 명품 참 좋아하는데, 저는 회사를 명품 의류 회사로 키울 생각이 전혀 없어요. 명품 옷은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데, 제가 꿈꾸는 세정의 옷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쉽게 사 입을 수 있는 옷이기 때문에 지향점 자체가 달라요. 하지만 원단 같은 재료는 명품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옷,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세정을 있게 만든 비결이었고 앞으로 세정의 미래상이죠. 지금 제가 입고 있는 것 중 우리 세정 제품이 아닌 건 구두 하나밖에 없을 겁니다. 제가 입지 않는 옷을 어떻게 고객에게 팔 수 있겠습니까.”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한과의 경제협력사업도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세정은 2000년대 중반까지 개성공단과 평양 등지에 있는 북한기업과 합작으로 의류가공사업을 진행했다.
“남북경제협력에서 의류가공 사업은 최상의 윈-윈입니다. 현재 저희가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서 옷을 만드는데 비행기로만 5~6시간 걸리는 먼 곳이에요. 그런데 그걸 북한에서 만든다고 상상해 보세요. 북한 사람들은 손재주가 좋아 가공기술 수준도 꽤 높았던 걸 볼 때 경제적 효과는 굉장할 거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의류 이외에 진출한 세정그룹의 자회사는 세정건설, 세정I&C, 세정인텍스, 청도세정악기 등이다.
“우리의 경영이념은 최고의 생활문화를 창조해 인류와 더불어 성장하는 데 있어요. 그래서 유통, 건설, IT, 악기 사업 등을 벌이고 있죠. 앞으로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주거공간에서 우리가 만든 옷을 입고, 우리가 만든 악기의 선율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서 우리의 IT기술로 행복한 삶이 이뤄지도록 하는 게 제가 꿈꾸는 미래의 세정그룹 모습입니다.”
박 회장과의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삶(Life)이다. 풍요로운 삶을 꿈꿨기에 도전할 수 있었고 이젠 받은 만큼 사회로 돌려준다는 게 박 회장이 견지하는 삶에 대한 태도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이를 실천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단일 브랜드로 국내 최대 매출을 기록 중인 인디안의 신제품과 박순호 회장
▒ 박순호 회장은…
1946년 경남 마산 출생, 부산대 행정대학원, 동아대 경영대학원 졸업, 서강대, 부산외국어대 명예경영학 박사, 한국패션협회 이사, 부산메세나진흥원 이사장, 대한요트협회 회장, 사회복지법인 세정나눔재단 대표
저서: <맨주먹으로 일궈낸 나의 꿈>, <열정을 깨우고 혼을 심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