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우지’라는 바닷새는 길다란 주둥이로 물고기를 잡아먹는 재주가 뛰어나다. 중국 구이린(계림)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이 새를 이용한 아주 독특한 낚시법이 전래되고 있다. 이른바 ‘가마우지 낚시’다. 방법은 간단하다. 가마우지의 목 아래 부위를 끈이나 실로 묶은 뒤 물에 풀어 놓는다. 그런 다음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낚으면 그것을 가로챈다. 가마우지의 목을 묶어 놓으면 물고기를 잡아도 삼키지 못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는 1989년 펴낸 <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 경제’라고 규정했다. 한국의 제조업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하더라도 핵심 소재·부품을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결국 부가가치의 상당 부분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는 구조적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비아냥거렸던 셈이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2011년 소재·부품 분야 대일(對日) 무역적자는 227억달러에 달했다. 수출은 170억달러에 그친 반면 수입은 397억달러나 됐다. 그나마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폭이 전년 대비 약 15억달러 감소했다는 점이 위안거리다. 한국 소재·부품 산업 경쟁력이 점차 제고되고 있다는 긍정적 신호라는 게 지경부의 분석이다. 엄밀히 따지면 소재·부품 산업 발전 없이는 대일 무역역조 개선은 물론 진정한 의미의 자립경제 달성도 어렵다. 과거 한국 경제의 고속성장기에는 정부와 기업들이 오로지 수출확대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소홀히 한 게 사실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도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해 땀 흘린 기업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진그룹(허진규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일진은 창립 이래 40여 년간 소재·부품 한 우물만을 파오다시피 한 기업이다. 한국 제조업의 ‘뿌리’를 키우고 ‘주춧돌’을 놓는 데 앞장선 숨은 주역인 셈이다. 소재·부품 외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을 만나 가슴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들어봤다.

1970년대 초반 어느 때였다. 당시 허진규 일진금속공업(일진그룹의 모기업. 현 일진전기) 사장은 직접 영업 일선을 뛰던 중에 한국전력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만 해도 한전은 국내 최대 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거래관계를 맺으면 여러모로 사업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계산이 섰다. 한전을 살펴보니 발전소, 변전소, 송배전망 등에서 대량으로 소요되는 금속제품을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 허 사장은 무릎을 쳤다. “나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물건들이다. 내가 만들어 납품하게 되면 큰 기회가 되겠구나.” 하지만 한전의 문턱은 생각보다 훨씬 높았다. 담당자들을 만나봤지만 무시와 냉대만 받았다. 그렇다고 허 사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몇 년간 줄기차게 한전을 노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한 줄기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한전 측이 일본서 전량 수입하던 금구류(金具類: 전력선로나 통신선로에서 전선을 지지물에 매달 때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금속제 부속품)의 일부 물량을 허 사장에게 맡긴 것이다. 운도 따랐다. 한전 측이 예기치 못한 부족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허 사장은 한번 찾아온 기회를 확실하게 잡았다. 일제 금구류에 전혀 손색이 없는 품질의 배전 금구류를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게 1975년의 일이다. 그 해 허 사장은 또 다른 큰 결실을 맺었다. 국내 최초로 동복강선(강철 선의 표면에 구리를 코팅해 만든 전선)을 개발해낸 것이다. 한국 소재·부품 산업 역사에 일진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처음 새긴 기념비적 성과였다.

강석진 회장(이하 강 회장) | 어떤 학자는 허진규 회장님을 가리켜 ‘대한민국 벤처기업의 원조’라고도 하던데요.

허진규 회장(이하 허 회장) | 제가 스물여덟 살(1968년)에 창업했죠. 그때는 벤처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때죠. 훗날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벤처기업이라는 개념이 나오더군요.

강 회장 | 그 무렵은 우리나라에 산업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할 때였는데, 젊은 나이에 참 대단한 창업정신이었던 것 같군요. 우리나라 벤처산업의 선구자라고 평가해도 될 듯합니다.

허 회장 |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공장다운 공장이 거의 없었을 때죠. 제가 처음 입사한 직장이 ‘한국차량기계제작소’라는 회사였는데, 이름과 달리 벽걸이시계와 주물을 만드는 곳이었죠. 일본에서 공장을 인수해 그곳의 설비를 통째로 한국에 옮겨와 세운 회사였죠. 그런데 이름만 차량기계제작소이지 주로 파이프를 연결하는 ‘관 이음새’를 만드는 사업을 했습니다. 그 회사에서 새로 엔지니어를 채용한다고 해서 들어가게 됐죠.

허진규 회장은 1963년 서울대 공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ROTC 1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그가 처음 배속된 곳은 육군본부 병기감실(兵器監室) 조병(造兵)위원회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군수물자 국산화에 큰 관심을 쏟고 있었다. 병기감실은 대통령의 지시로 총포, 탄약, 차량 등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은 조직이었다. 허진규 회장은 그 시절 전국의 산업현장을 두루 시찰할 수 있는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유사시 군수물자 생산능력을 갖춘 기업과 공장을 파악해두는 게 업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육본 병기감실 근무 시절 공업발전 투신 결심

강 회장 | 병기감실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이 일진을 창업하는 데 어떤 계기가 됐을 수도 있겠군요.

허 회장 | 당시 공대생들은 졸업하면 취직할 곳이 마땅찮아 외국 유학을 많이 갔어요. 미국 버클리대(UC버클리)나 스탠퍼드대가 인기 있었죠. 저도 대학 다닐 때는 유학을 계획하고 군복무를 마치면 떠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조병위원회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까 우리나라 공업 수준이 너무 형편없어 참담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가 공학도로서 우리나라 공업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는 게 나라를 위한 일이다 싶어 유학의 꿈을 접고 취업하기로 마음먹게 됐죠.

강 회장 | 처음에 한국차량기계제작소라는 회사를 택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요.

허 회장 | 당시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나면 인천중공업(이후 인천제철, INI스틸을 거쳐 지금은 현대제철로 바뀌었다) 정도 외에는 갈 만한 큰 기업이 별로 없었어요. 포항제철(포스코)도 설립되기 전이니까요. 제가 군에 있을 때 한국차량기계제작소 시찰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회사가 괜찮은 것 같아 군복무를 마치면 여기 들어와야지 하고 마음먹었죠.

허진규 회장은 한국차량기계제작소 근무 시절 운명적인 인연을 만나게 된다. 일본인 공장장 미야하라가 바로 그였다. 두 사람은 자주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미야하라가 이따금씩 질문을 던지면 허진규는 곧잘 대답하곤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기술자 미야하라는 젊은 엔지니어 허진규의 재능과 자질을 높이 샀고, 허진규는 그로부터 업무지식은 물론 일에 대한 열정과 태도를 배웠다.

허 회장 | 미야하라 공장장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죠. 그는 특이했어요. 처음엔 일을 시키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입사원들도 할 일이 없어 맨날 노는 거죠. 나도 별로 할 일이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현장에 갔을 땐데, 그 양반이 자기 책상에 있는 노트를 좀 가져다 달라는 거예요. 그걸 가져가면서 펼쳐보니까 자기 할 일을 깨알처럼 적어 놓은 겁니다. 그때 느낀 바가 있었죠. ‘내 눈에는 할 일이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내가 더 노력해야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때부터 점차 할 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군요. 그 양반한테 감화를 많이 받았죠.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부도를 맞았어요. 저는 처음에 부도가 뭔지도 몰랐지요. 알고 보니 회사가 돈이 없어서 문을 닫는다는 겁니다. 당혹스러웠죠.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직접 회사를 세우기로 마음먹었죠. 달리 취직할 만한 회사도 마땅치 않았던 데다 지금껏 배운 것도 있으니 한번 사업을 해보자고 결심한 거죠. 미야하라 공장장의 충고도 큰 힘이 됐죠. 그 양반이 “한국에서는 비철금속을 비롯한 주물산업이 막 시작하는 단계다. 자네는 기술도 좋고 성실하기 때문에 창업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네”라고 조언을 해주더군요. 거기서 자신감을 얻어 시작한 게 비철합금 주물공업이었습니다.

1968년 1월 오늘날 일진그룹의 모태가 되는 일진금속공업사가 설립됐다. 하지만 젊은 패기와 열정, 도전정신 외에는 사실상 맨주먹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금, 기술, 장비 아무 것도 없었다. 허진규는 자신이 살던 서울 노량진 집 앞마당에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가건물을 짓고는 주물용 가마솥 하나만을 갖춘 채 사업을 시작했다. 말하자면 ‘가내공장’이었다. 한국차량기계제작소에서 근무했던 기능공 2명도 직원으로 채용했다. 허 회장의 회고다.

“처음 공장을 차렸던 노량진 집은 앞뜰이 좁았어요. 그래서 얼마 뒤 그 집을 팔고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집을 옮겼어요. 집채는 적고 마당이 넓은 곳이었죠. 공장을 넓히기 위해서였죠. 옛날에는 영등포가 공장지대였는데, ‘진등포’라는 별명도 있었습니다. 땅이 진흙구덩이라서 굉장히 질척거렸거든요. 그래서 영등포에서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이야기가 회자됐죠(웃음).”

허 회장이 일진금속공업을 설립한 후 처음 개발한 제품은 선풍기 스탠드(날개와 전동기를 지지하는 수직 받침대)였다. 1960년대 국내에서 선풍기를 제조하는 회사는 금성사(현 LG전자), 삼양전기 정도밖에 없었다. 때마침 삼양전기가 선풍기 스탠드를 알루미늄으로 만들 수 있느냐고 제안을 해와 첫 주문을 받은 것이다.

강 회장 | 그런데 삼양전기는 뭘 믿고 생산실적도 전혀 없는 작은 신생업체에 주문을 줬지요.

허 회장 | 자기들이 알루미늄 스탠드를 만들고 싶은데 어디 마땅히 주문할 데도 없는 상황이었나 봐요. 그러다 제가 비철 주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안을 해왔던 겁니다. 선풍기라는 건 제때 만들어 제때 팔아야 하는 시즌 상품이라서 급하게 주문을 했던 거죠. 그때 3000개 정도 되는 꽤 큰 물량을 주문받았는데 이익은 하나도 못 봤어요(웃음).

수입하던 소재·부품 국산화에 앞장선 주역

강 회장 | 한전에 납품하게 되면서 회사의 성장에 큰 전기가 마련된 것 같은데요. 그나저나 당시 한전처럼 큰 기업을 대상으로 영업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허 회장 | 처음에 “내가 금구류를 만들 수 있으니까 일본에서 수입하는 것을 줄이고 국산제품을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한전 사람들은 “턱도 없는 소리 마라”는 거예요. 전기라는 게 사고가 나면 큰일 나는데 당신 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느냐는 투였죠. 그래서 많이 싸웠죠. “당신들은 전기 전문가이지만 나는 금속공학을 공부해 그 정도는 만들 수 있다”면서 말이죠. 당시 정부는 수입제품 국산화를 부르짖을 때였어요. 저는 계속 접촉하면서 설득했죠. 그러다 일본에서 수입한 금구류 물량이 조금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자 한전 측에서 제게 금구류를 만들 수 있냐며 제안을 하더군요. 흔쾌히 주문을 받았죠. 그런데 제가 납품한 제품을 보고는 한전 사람들이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거예요. “비슷하긴 한데 써도 괜찮으냐”며 말이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니, 전기 다루는 게 그렇게 무서우면 한국에서 전기를 왜 생산하느냐? 현해탄에 송전탑 세우고 일본에서 전기를 수입하지.” (일동 웃음) 어쨌든 한전 담당자들은 제가 납품한 제품 몇 개를 쓰고 나서는 잠을 못 잤대요. 사고가 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 거죠.

강 회장 | 그때만 해도 국산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부족할 때였죠.

허 회장 | 사실 저는 우리 제품이 일본 제품보다 더 좋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한전 담당자들도 처음에는 불안해하다가 한두 달 지나면서 아무런 문제가 없자 비로소 안심하더군요. 그뿐 아니라 저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져 주변에 “일진 제품이 괜찮으니 써보라”면서 입소문을 내는 홍보대사 역할도 해주더군요. 그러면서 납품 규모도 점차 커졌죠.

한전과의 거래규모가 확대되는 과정에 한 가지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행사(허진규 회장의 기억은 분명치 않지만 1978년 제9대 대통령 취임식으로 추정된다)에서 일어난 일이다. “세종문화회관 취임식장에서 정전 사고가 일어났어요. 한전은 난리가 났죠. 그 무렵만 해도 수시로 정전 사고가 일어났지만 공교롭게도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큰 행사에서 전기가 나간 겁니다. 청와대가 직접 사고원인 조사에 나섰는데 한전 사람들은 당황하면서도 ‘틀림없이 일진 제품 때문에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 분위기였어요. 저도 조마조마했죠. 사실이라면 큰 낭패잖아요. 하지만 조사 결과 일본서 수입한 제품을 잘못 설치한 게 사고원인으로 밝혀져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그 덕에 일진 제품의 신뢰도는 나날이 높아졌지요(웃음).”

강 회장 | 일진그룹이 생산하는 품목 가운데 90% 이상이 독자 기술로 개발됐다고 들었어요. 1970~80년대만 해도 국내 기업들은 독자 기술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서 외국에서 기술을 배워오거나 돈 주고 라이선스를 얻어 손쉽게 사업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잖습니까. 그런데도 회장님은 사업 초창기부터 우직하게 독자 기술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죠.

허 회장 | 물론 외국 기술을 가져다 쓰면 사업 전개 속도도 빠르고 성공 확률도 높은 게 사실이죠. 왜냐면 기술 개발이란 게 실패 확률도 높고 시간도 오래 걸리거든요. 제가 독자 기술 개발에 나섰던 것은 공대 출신 선후배, 동료들이 연구소나 학계에 많이 포진해 있으니까 서로 협력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완제품을 만드는 조립산업은 외국 기술로도 충분히 신제품을 만들고 시장을 선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재·부품 산업에서는 자체 기술이 없으면 절대 사업을 확장할 수가 없어요. 저는 창업할 때부터 남들이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내가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있었어요.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아이템을 개발하고 사업화에 성공했을 때의 쾌감은 실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몰라요. 그런데 우리도 (다른 기업들처럼) 기술을 도입해 사업을 했더라면 빨리 커졌을 텐데 괜히 그랬나 봐요, 허허(일동 파안대소).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경영자보다는 공학도 관점에서 회사를 경영했던 것 같아요. 다행인 것은 그런 과정에서 훌륭한 엔지니어들을 많이 양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죠.

강 회장 | 일진그룹은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제품이 많지요. 배전 금구류, 동복강선,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인쇄회로기판(PCB)용 전해동박 등이 그런 사례죠. 일진그룹을 대표하는 기술이나 제품 중에서도 특히 많은 애착을 갖고 계신 것은 무엇인지요.

허 회장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데가 없잖아요(웃음). 모든 기술과 제품에 다 애착이 가죠. 사실 너무 많아 일일이 꼽기도 어렵죠. 그래도 몇 가지 말하자면 초창기엔 동복강선이 돈을 많이 벌어다 줬죠. 당시 회사의 버팀목 역할을 했어요. 요즘엔 PCB용 전해동박, 즉 ‘일렉포일’이 큰 자랑거리죠.

Tip l 일진그룹 경영현황

세계 일류기술 갖춘 소재·부품 전문기업

일진그룹은 지주회사인 일진홀딩스를 비롯해 그룹의 모태가 된 일진전기, 일진머티리얼즈, 일진다이아몬드, 일진디스플레이 등 5개의 상장회사와 일진유니스코, 일진제강, 일진반도체, 루미리치, 알피니언메디컬시스템, 전주방송, 일진컴포지트 등 7개의 비상장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소재·부품 전문 중견그룹이다. 일진전기는 전력·통신케이블, 가스절연개폐장치, 변압기, 모터, 펌프 등을 생산하고 있다. 또 일진머티리얼즈는 일렉포일 분야의 세계 3대 메이커이며, 일진다이아몬드는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시장의 세계 3대 업체다. 2011년 그룹 전체 매출 규모는 2조5000억원 정도다.

‘일렉포일’ 기술개발로 한국 전자산업 초석

1975년 일진그룹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함께 국내 최초로 개발한 ‘동복강선(銅複鋼線)’은 회사의 명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 혁신적 제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구리로 만들어지는 전선은 길게 늘어뜨리면 자체 무게 때문에 휘어지거나 끊어질 위험성이 있다. 허 회장은 바로 그 문제점을 주목했다. 그래서 강선(鋼線: 철선)의 표면을 구리(동)로 코팅해 전기는 표면으로 흐르게 하고 하중은 강선이 받치도록 하는 신제품을 구상한 것이다. 일진이 개발한 동복강선은 통신선과 전력선으로 널리 쓰이게 됐다. ‘사라호’ 같은 대형 태풍이 한번 지나가고 나면 끊어지기 일쑤였던 전선들이 튼튼한 동복강선으로 대거 교체됐다. 당시 체신부와 한전이 최대 고객이었다.

1988년 국내 최초로 양산을 시작한 전해동박(電解銅箔, 일진의 제품명은 ‘일렉포일·Elecfoil’이다)은 일진그룹을 글로벌 소재·부품 강자로 도약시킨 일등공신 제품이다. 전해동박, 즉 일렉포일은 황산구리 용액을 원료로 전기분해를 거쳐 만드는 얇은 구리 박(箔)이다. 인쇄회로기판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1차 핵심소재다. 최근에는 2차전지의 음극 집전체(集電體)로 각광받고 있다. 허 회장은 “우리가 처음 일렉포일을 개발했더니 ‘일진이 저걸 어떻게 만들었지’ 하며 다들 놀라는 거예요. 당시 상공부에서는 ‘우리가 판매해줘야겠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Tip l 일진그룹이 서울대에 연구소 기증한 사연

빛나는 산학협력의 성과에 대한 ‘보은’

일진그룹은 1990년 서울대학교에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한국 소재산업 발전의 밀알이 될 새로운 소재를 연구개발하는 ‘신소재공동연구소’였다. 건물 이름은 덕명(德明)기념관으로 지었다. 덕명이란 이름은 허진규 회장의 아호에서 땄다. 국내에서 민간기업이 대학에 연구소를 기증한 최초의 사례였다. 허 회장의 말이다.

“우리가 서울대와 공동 개발한 제품들이 제법 있습니다. 합성다이아몬드, 일렉포일 등이 서울대와 함께 개발한 거예요. 그래서 소재연구소를 하나 지어 기증하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죠. 그때만 해도 서울대 교수들이 그런 일(연구소 기증)을 처음 겪다 보니 이렇게 지어라 저렇게 지어라 요구도 많았죠(웃음). 또 서울대가 국립대라서 국가에서 재정지원을 받는데 왜 굳이 기업이 나서느냐며 말들도 많았죠. 문교부에서 그러더군요. 그냥 돈만 내놓고 설계부터 입찰을 하라고요.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리겠어요. 효율성도 나빠지고. 결국은 우리가 설계부터 모두 맡아 짓게 됐죠.”

신소재공동연구소 기증은 당시 이동영 서울대 교수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이 교수는 일진그룹이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동복강선, 합성다이아몬드, 일렉포일 등의 연구개발 과정에 깊숙이 동참한 핵심 주역이었다. 또한 허 회장에게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2년 선배이기도 하다. 허 회장은 이 교수를 가리켜 “평생의 동반자이자 멘토”라고 소개했다.

이동영 교수는 2001년 호암상 공학 부문 수상자다. 당시 수상 소감에서 자신의 학문적 성취의 상당 부분이 일진그룹과의 공동 연구개발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정년퇴임 후에도 신소재공동연구소에 나와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유명 학술지인 <사이언스>, <네이처>의 논문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이기도 하다.

허진규 회장과 이동영 교수의 각별한 관계는 서울대 공대 동문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동행’이 산학협력의 바람직한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에 선정된 허진규 회장이 꽃다발을 들고 있다

일렉포일은 거의 모든 전자제품에 쓰이는 핵심소재라는 점에서 ‘전자산업의 논밭(반도체가 ‘전자산업의 쌀’이라는 비유에 빗댄 표현)’과도 같다는 설명이다. 일진그룹은 세계 톱 수준의 전해동박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자존심을 바탕으로 일본식 용어인 전해동박을 버리고 일렉포일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일렉포일 제조기술을 가진 기업은 일진그룹을 비롯해 단 2개사에 불과하다. 1999년 과학기술부는 일렉포일 제조기술을 ‘20세기 대한민국 100대 기술’로 선정한 바도 있다.

허 회장은 일렉포일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듯했다. 비서진을 시켜 일렉포일 샘플을 가져오게 한 뒤 직접 제품 설명을 하기도 했다. 특히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서 일렉포일이 첨단 전자제품을 구현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강조했다. “여기 스마트폰을 보세요. 스마트폰을 흔히 손 안의 컴퓨터라고 하죠. 이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PCB가 필요합니다. 테니스 코트만큼 넓은 기판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때 PCB를 여러 겹으로 적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바로 일렉포일입니다. 요즘에는 PCB 200개를 적층할 수 있는 단계까지 기술이 발전했어요. 몇 미크론(㎛: 1000분의 1mm) 두께의 극도로 얇은 일렉포일 덕에 가능해진 겁니다. 전자제품의 경박단소화에 일렉포일이 엄청난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강 회장 | 그럼 삼성전자 같은 전자업체들이 일렉포일을 많이 쓰겠군요.

허 회장 | 우리가 직접 삼성전자에 납품하지는 않습니다. 일진이 생산한 일렉포일은 PCB 제조업체를 거쳐 삼성전자에 공급되고 있어요. 삼성전자 제품은 지금 세계 최고잖아요. 삼성전자가 쓰는 소재, 부품은 다른 기업들도 다 쓰죠. 현재 삼성전자가 우리 일렉포일을 (전체 소요량 중에서) 70~80% 정도 쓰고 있습니다. 일렉포일은 전자산업의 핵심소재이기 때문에 이게 없다면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꽝’이에요(웃음).

일렉포일은 휴대전화, 컴퓨터, TV, 오디오, 세탁기, 냉장고 등 각종 전자제품 및 IT기기를 만드는 데 필수소재다. 일렉포일이 없으면 첨단 전자제품도 존재할 수 없다. 최근에는 자동차에도 일렉포일 사용량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른바 자동차의 전자화 추세 덕분이다. 그러고 보면 소비자들이 일상생활에서 항상 사용하는 제품 속에는 일진의 기술력이 숨어 있는 셈이다.

강 회장 | 일렉포일 수출도 많이 합니까.

허 회장 | 수출을 많이 하죠. 특히 전해동박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으로 많이 나갑니다. 요즘 배터리에 일렉포일을 많이 쓰는데, 일본 산요가 우리 제품을 많이 갖다 쓰지요.

강 회장 | 그렇다면 세계 일렉포일 시장에서 어떤 기업들이 경쟁자입니까.

허 회장 | 아무래도 일본의 미쯔이, 후쿠다, 후루가와 같은 기업을 들 수 있죠. 대만 기업(장춘)도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기업은 동양세에 밀려 문을 닫았어요. 한국, 일본, 대만 3개국이 일렉포일을 만드는 나라라고 보면 됩니다.

강 회장 | 우리나라 전자, IT산업이 세계 일류로 도약한 데는 일진그룹 같은 소재·부품기업의 뒷받침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있어야겠어요. 우리 국민들은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등 완제품을 만드는 글로벌 기업을 높이 평가하지만 소재·부품 분야의 숨은 주역 기업들은 잘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허 회장 | 우리나라가 앞으로 제조업보다는 금융업을 키우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많지만, 제조업을 꽉 붙들고 있어야 돼요. 제조업을 놓치면 큰일 나요. 굶어 죽습니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사회에 큰 기여를 합니다만 국민들로부터 그만한 대우를 못 받고 있어요. 학생들이 공과대에 안 가려는 경향도 그런 이유예요. 우리가 대학에 갈 때는 학교에서 공부 제일 잘하는 학생들이 공대에 갔어요. 전국 1등에서 100등까지 거의 모두 서울대 공대에 간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머리 좋은 학생들이 공대를 기피하고 있는데, 참 큰일입니다. 중국,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최고 인재들이 공대에 가고 있거든요.

Tip l ‘일렉포일’ 개발 비화

집념의 ‘2만회 실험’으로 원조 일본 콧대 꺾다

일진머티리얼즈가 생산하는 일렉포일

허진규 회장은 1978년 일렉포일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국내 기업들은 일렉포일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해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일렉포일 제조업체들은 한국 기업들을 대상으로 배짱 영업을 했다. A, B급 제품은 일본 기업에 공급하고 장난감에나 쓰이는 C, D급 제품을 한국 기업들에게 전자제품용으로 판매한 것이다. 한국 고객사가 불량문제를 어필해도 제대로 된 대응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일본 아니면 한국 기업이 어디서 일렉포일을 공급받을 수 있겠느냐는 식이었던 것이다. 허 회장은 일렉포일 국산화를 못하면 한국 전자산업이 계속 일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 길로 곧장 일렉포일 개발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렉포일 개발 과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기술 동향을 파악하러 일본의 일렉포일 제조업체를 찾아갔다가 그쪽 관계자에게 “이런 기술 꿈도 꾸지 마라”는 말을 듣고 쫓겨나는 수모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렉포일 연구개발 총책임자인 김윤근 연구원(전 일진머티리얼즈 대표)이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몸져눕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1988년 일렉포일 개발에 성공하고 대규모 투자로 공장도 지었지만 예기치 못한 제품불량 문제가 불거져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김윤근 연구원을 비롯한 연구진의 헌신적인 노력 덕에 1997년 마침내 제품불량을 완전히 해소하기에 이른다. 무려 2만회 이상의 부단한 실험 끝에 얻어낸 결실이었다.

일진그룹이 우수한 품질과 저렴한 가격의 일렉포일을 생산하기 시작하자 국내외 기업들로부터 주문이 쏟아졌다. 콧대 높던 일본의 일렉포일 업체들이 당황한 것은 불문가지다. 그들은 갑자기 가격을 낮추는가 하면 한국 고객사들을 직접 방문해 ‘관리’에 나서기도 했다. 일진그룹의 주요 고객사 중에는 일진에게 고맙다며 거꾸로 ‘접대’하는 일도 생겼다고 한다. 현재 일진그룹의 2차전지용 특수 일렉포일은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자랑할 뿐 아니라 일렉포일 기술의 원조인 일본으로 역수출되는 개가를 올리고 있다.

“엔지니어는 일류기술 개발하는 게 애국”

강 회장 | 과학기술 분야가 강해야 진정한 강국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 젊은이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은 참 걱정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공계 출신의 성공한 기업가로서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허 회장 | 제가 서울대 공대 동창회장을 4년간 했어요. 그때 학교도 가보고 교수들도 만나곤 했죠. 제가 보기에 학생들이 공대에 안 가는 건 부모 탓이 가장 커요. 부모들이 자식이 공대에 가는 걸 꺼려요. 제가 서울대 공대의 초청으로 특강을 한 적이 있어요. 학생들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많이 참석한 자리였죠. 제가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돈을 적게 벌려면 의대나 법대를 선택하고, 돈을 많이 벌고 세계를 주름잡으려면 공대를 가라”고 말이죠. 사실 이공계 졸업생은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법대, 의대, 약대 졸업생은 자격증만 따면 평생 편안히 살 수 있지만 이공계 출신은 부단히 연구개발에 힘을 쏟지 않으면 도태되거든요. 하지만 이공계 대학생이나 졸업생들에게 사명감을 당부하고 싶어요. 옛날 일제강점기나 6·25전쟁 때는 몸바쳐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애국이었다면, 21세기에는 외국과의 기술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에 몰두해 일류기술과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애국입니다. 아직도 소재·부품 분야는 충분히 국산화가 되지 않아 대일 무역역조 현상이 여전해요.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건 반세기가 훨씬 넘었지만, 기술 분야에서는 여전히 그들의 식민지를 못 벗어났어요. 기술 국산화를 이뤄야만 진정한 해방이고, 이것이 대한민국 엔지니어의 사명입니다. 국가가 부강하려면 최고 인재들이 공대에 가야 합니다.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기계공학 엔지니어 출신이에요. 우리나라도 곧 이공계 리더들이 고위공직에 올라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명감과 함께 자부심을 가지세요.

강 회장 | 공대 출신들이 기술을 갈고 닦아 나중에 기업의 경영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기업들은 기초가 탄탄하고 잘 돼요. 공대 나왔다고 기술자로만 머무는 건 아니거든요. 젊은 시절에 창업을 하기에도 공대 출신들이 유리하지요.

허 회장 | 벤처에서 출발해 지금은 시가총액이 수조원이 넘는 큰 기업으로 성장한 NHN, 엔씨소프트, 넥슨 등의 창업자들이 모두 공대 출신이지 않습니까. 공대 출신 창업자와 CEO들이 앞으로도 계속 선전해야 우리나라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어요. 지금 세대는 소프트웨어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으니 그런 쪽에 승부를 거는 게 바람직해 보입니다.

강 회장 | 일진그룹은 대표적인 첨단 소재·부품 기업인데요. 우리나라 제조업이 앞으로도 세계 상위권을 유지하려면 첨단 소재·부품 산업이 뒷받침해줘야 하거든요. 그러나 한국 소재·부품 산업은 아직 일본, 독일 등 선진국보다 뒤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특히 독일은 ‘히든 챔피언’이라고 불리는 중견 소재·부품 기업들이 세계 최정상이거든요. 그 덕에 독일 완제품 기업들도 세계 일류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겁니다. 한국 소재·부품 산업이 세계적인 수준에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가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대목인데요.

허 회장 | 우리나라 소재·부품 산업이 예전보다 튼튼해졌다지만 아직 선진국의 7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발생 후 우리나라 소재·부품 산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건 사실입니다. 일본 소재·부품 산업이 생산과 공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전 세계 완제품 업체들이 대체재를 찾기 위해 우리나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는 우리나라 기술이 일본 기술과의 격차를 많이 좁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일시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겁니다. 게다가 중국과의 기술격차도 점점 좁혀지고 있어요. 중국은 거의 한국 턱밑까지 쫓아온 상황입니다. 그나마 우리 정부가 최근 소재·부품 산업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로드맵과 체계적인 육성방안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긍정적인 대목이에요.

강 회장 | 혹시 미래 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새로이 역점을 기울이는 사업이 있는지요.

허 회장 | 몇 년 전 의료기기 사업을 시작해 그동안 많이 투자했는데 금년에 누적 BEP(손익분기점)를 맞출 것 같아요. 제품(초음파 진단기)이 아주 좋다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서울대병원이 국산을 하나도 안 썼는데 우리 물건을 처음으로 가져갔대요. 그래서 담당 임원에게 “공짜로 준 거냐”고 물으니까 “돈 제대로 받았습니다”고 하더군요(웃음).

강 회장 | 초음파 진단기는 앞으로 세계시장 수출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허 회장 | 이미 외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 중순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의료기기 전시회에서 한국 의료기기 산업의 선구자인 이민화 메디슨 창업자(현 한국디지털병원수출사업협동조합 이사장)를 우연히 만났어요. 그때 우리 물건을 한번 봐달라고 하니까 “이미 봤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 최첨단이던데요”라며 미소를 짓더군요.

Tip ㅣ 일진의 합성다이아몬드 시장 진출기

거대 다국적기업 장벽 넘어 세계 빅3 도약

일진다이아몬드의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

일진그룹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제품 중에 공업용 합성다이아몬드를 빼놓을 수 없다. 합성다이아몬드는 초고온, 초고압의 극한기술을 활용해 만들어진다. 일진그룹은 1987년 합성다이아몬드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세계 합성다이아몬드 시장은 미국의 GE와 영국의 드비어스 2개사가 분점하고 있었다. 그런 터에 한국의 작은 기업이 합성다이아몬드 개발에 성공했으니 국내외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89년 일진그룹은 GE와의 송사에 휘말리게 된다. GE가 자사의 합성다이아몬드와 관련한 영업비밀을 침해했다며 일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양측의 법정공방은 5년 넘게 이어졌다. 그러다 1994년 GE가 소송을 취하하게 된다. 일진의 합성다이아몬드 사업을 막는 것이 별 실익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강석진 회장(당시 GE코리아 사장)이 막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강 회장은 ‘한국과의 장기적 동반자 관계 구축’이라는 GE의 한국 진출 전략이 자리를 잡은 마당에 일진과의 분쟁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잭 웰치 당시 회장과 경영진을 상대로 설득했던 것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쳤던 일진과 GE의 공방전은 그렇게 잘 마무리됐다. 더불어 일진그룹은 높은 기술장벽을 뚫고 공업용 다이아몬드 시장의 3대 메이커로 도약하게 됐다.

‘능동정신’이 개인·기업·국가 발전의 원동력

허진규 회장은 20대 청년시절 사업을 일으켜 지금껏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경영 일선을 굳건히 지켜오고 있다. 모름지기 경영자가 기업을 잘 가꾸려면 열정과 에너지의 바탕이 되는 건강이 중요한 법이다. 그의 건강관리 비결은 무엇일까. 허 회장은 뜻밖의(?) 답변을 내놓는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건강의 지름길입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조업이 나의 삶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천생 기업가다. 인생의 좌우명도 ‘일’과 ‘제조업’이 요체를 이룬다. “사업을 시작한 4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조업이 산업의 근간’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요.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로서 최소한 제조업, 특히 소재·부품 분야에서만큼은 ‘장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곧 삶의 모토가 됐어요.”

일진그룹의 사훈은 ‘능동(能動)’이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멋없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성취는 능동에서 시작되고 이뤄진다. 능동적인 사람이 일도 잘하고 성공하는 법이다. 그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를 사훈으로 내세운 것은 역시 우직하고 성실한 공학도 출신의 기업가다움을 느끼게 한다. 날마다 진일보한다는 뜻의 일진(日進)이라는 회사명도 마찬가지다.

“저는 성격적으로 수동적인 것과 멀어요. 누가 시켜서 하는 걸 싫어하죠. 그래서 사업도 시작했을 겁니다. 무슨 일이든 능동적으로 하면 더 활기차고 재미있어요. 능동은 주인의식, 도전정신과 통하는 겁니다. 스스로 도전정신을 갖고 행하는 것이 능동이죠. 그래야 개인과 기업, 국가가 발전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