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12일 개막하는 여수세계박람회의 명물 \'스카이타워\'. 이 건물에 설치된 파이프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파이프오르간\' 으로, 개막 전부터 기네스북에 올랐다. 뱃고동과 닮은 소리를 내는 이 오르간의 정식 명칭은 복스 마리스(Vox maris), 라틴어로 ‘바다의 소리’란 뜻이다. 독일에서 제작됐으나 오르간을 설계한 이는 놀랍게도 한국인이다. 숨은 주역은 바로 홍성훈 오르겔바우(파이프오르간 제작) 마이스터. 그는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독일에서 오르겔바우 마이스터 자격을 획득하고, 국내 최초로 파이프오르간 제작을 시작했다. 기술강국 독일이 인증한 명장, 홍 마이스터를 만나봤다.

 

 

1. 중소기업중앙회 로비에 설치될 파이프오르간. 중소기업들이 혁신적인 사고로 블루오션을 찾길 바란다는 바람에서 파격적인 파란색으로 제작했다. 2. 견습생 시절 작품

지난 4월2일 경기도 양평의 ‘홍성훈오르겔바우’ 공방에 도착하자 갑자기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아 비오니까 좋네요.” 홍성훈 마이스터(54)는 경쾌한 봄비 소리에 몹시 흥겨워하며 기자를 맞이했다. 천장이 높은 작업실 안에는 약 4m 높이의 파이프오르간이 우뚝 서 있었다. 두 명의 기술자가 홍 마이스터의 설계도면에 따라 한창 내부 부품을 조립 중이었다. 홍 마이스터는 “오늘 오신 것은 정말 행운”이라며 운을 뗐다.

“파이프오르간은 크기에 따라 제작기간이 보통 1~3년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작업실에서 오르간의 온전한 형태를 볼 수 있는 것은 딱 한번이에요. 완성된 각 부품을 시험 삼아 조립해보는 그 때죠. 그런데 수공예로 만들기 때문에 그 날이 언제인지 아무도 몰라요(웃음). 최종 조립 후 생각한 대로 악기 소리가 잘 나면 전부 해체한 뒤 그대로 현장에 설치해 완성하죠.”

홍 마이스터는 국내 유일한 파이프오르간 제작자다. 고난도의 종합적 기술이 필요한 데다, 국내 제작 인프라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내에는 오르겔바우 마이스터 교육과정은 물론 자격시험조차 전무하다.

파이프오르간의 종주국은 유럽이다. 특히 독일이 ‘파이프오르간 제작의 메카’로 불린다. 원래 시초는 BC 265년 이집트에서 만든 물오르간(수압 오르간)이었다. 이후 풀무질을 통한 바람으로 작동하는 방식으로 개량돼 그리스·로마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파이프오르간은 중세시대 교회악기로 크게 발달했다. 이 시기 대형 파이프오르간이 많이 탄생했다. 점차 일반 연주에도 쓰이면서 17~18세기 바로크시대에 꽃을 피웠다.

1. 구로아트밸리 오르겔 소리 조형물  2. 일대일 설계도면 3. 홍 마이스터의 트루에오르겔

 

파이프오르간 제작은 종합예술

‘천상의 소리’라 평가받는 파이프오르간은 건반악기이자 기명(氣鳴)악기다. 건반을 눌러 작동하지만 악기 소리는 건반과 연결된 수백개에서 수천개에 이르는 파이프(피리)가 울리면서 난다. 이때 파이프를 부는 바람은 전기 모터로 생성된다. 이런 복잡한 메커니즘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컴퓨터 설계가 필수다. 그러나 워낙 변수가 많아 오르겔 마이스터의 개인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 일례로 파이프오르간은 설치 공간에 따라 소리의 공명이 달라지는데, 마이스터는 이를 가상으로 측정해 설계해야 한다. 또 설치 공간에 따라 파이프 개수, 디자인 등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존 건축물과의 조화미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파이프오르간 제작에는 공학기술과 음악성, 건축예술 등이 복합적으로 요구된다. 이로 인해 현재 파이프오르간을 직접 제작하는 나라는 유럽, 미국, 캐나다 등 10여개국뿐이다. 최근 홍 마이스터의 활약으로 한국이 추가됐다.

그는 원래 기술직과 전혀 관계없는 뮤지컬 배우 출신이다.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으나, 취미로 탈춤을 추다 잠시 봉산탈춤 전수자로 활동했다. 그후 뮤지컬 배우의 꿈을 갖고 1년 이상 서울시립가무단(현 서울시뮤지컬단)에 있었다. 주로 단역이었다. 뮤지컬 배우로서 역량에 한계를 느낀 그는 1986년 1월 돌연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대학시절 곧잘 치던 기타를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지인의 권유로 27세에 처음 파이프오르간 제작에 입문하게 된다.

독일의 마이스터 교육 과정은 도제식이다. 견습생으로 받아들여져야 기술을 배울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파이프오르간 제작 세계 랭킹 1위인 ‘요하네스 클라이스 오르겔바우’에 입사해 기술을 습득했다. 그리고 1997년 5월 두 번째 도전 만에 독일 오르겔바우 마이스터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독일에서 앞길이 보장돼 있었지만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에 파이프오르간은 보편화된 악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고 한다.

“예전에 뮤지컬 배우로 활동할 때 내가 마흔 살이 되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오르겔 마이스터에 합격해 귀국한 게 1997년 11월, 서른아홉 살이었어요. 오자마자 IMF가 터져 어려움도 있었지만 1998년 1월 홍성훈오르겔바우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돌아보니 40세에 제가 한국의 오르겔 마이스터가 돼 있더라고요(웃음).”

그는 현재 대한민국 파이프오르간 제작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지난 14년간 복원 외에 순수 제작한 파이프오르간만 15대다. 서울 태평로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대·소성당을 비롯해 전국 성당과 교회, 서울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등에 그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이 중 지난 2008년 구로아트밸리에 완공한 작품은 기존 파이프오르간의 틀을 완전히 깬 오르겔 소리 조형물이다. 세계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해체한 작품으로, 매 시각 10분 전 벽에 붙은 파이프들이 자동으로 연주되는 오르겔 시보다. 서울대 음대 현대전자음악연구소와 협동 연구해 완성했다. 그가 설계한 여수엑스포의 스카이타워 파이프오르간도 전례가 없던 작품이다. 기존 파이프오르간과 달리 파이프가 건물 내부가 아닌 외벽에 설치됐다. 처음에 설계도를 본 여수엑스포 조직위원회는 기술적인 면에서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구로아트밸리 작품을 본 조직위는 확신을 가졌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저는 ‘항상 안 되는 게 뭐 있냐’로 시작합니다. 스카이타워 파이프오르간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도 할 수 있다고 하고 2주 동안 골머리를 앓았죠. 국내 여건상 제작은 독일 회사에 의뢰했습니다. 얼마 전 직접 연주해봤는데 소리가 좋더군요.” 

최근 그는 쌀을 담아두는 뒤주 크기의 트루에오르겔(미니 파이프오르간)도 5대나 완성했다. 예전에 한 독일 명장이 그에게 이것만은 정말 못 만들 것이라 단언했던 오르간이었다. 그만큼 트루에오르겔은 만들기가 어렵다. 괘종시계 만들다 손목시계 만들기 어렵듯, 기존 파이프오르간의 모든 부품이 축소돼 들어가기 때문이다.

독일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홍 마이스터는 요즘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바로 파이프오르간의 100% 국내 제작이다. 보통 파이프오르간 1대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부품이 수천가지다. 이 모든 것을 국내에서 충당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그렇지만 그는 현재 파이프오르간 제작 공정의 38%까지 국산화하며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이미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나무 파이프(나무토막을 붙여 만든 피리)까지 자체 제작 중이다.

1, 2. 설계부터 제작까지 온전히 오르겔바우 마이스터의 몫이다. 3.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나무 파이프를 시험삼아 불어보는 홍 마이스터.

 “신명나는 한국판 오르간 만들 것”

“특히 이번에 작업한 이 파이프오르간은 거의 90% 국내 기술로 만들었습니다. 건반, 모터, 금속 파이프 등 몇 가지만 수입하고 대부분 자체 제작하거나 서울 시내 곳곳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필요한 재료를 구했죠. 앞으로 5년 내에 금속 파이프도 직접 만들 겁니다.”

이 작품은 오는 9월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 로비에 설치될 예정이다.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미한 이 작품은 그간 홀로 분투해온 홍 마이스터의 노력의 결정체다. 퉁소, 대금과 같은 한국적 음색을 지닌 파이프오르간으로, 외관에는 전통공예 칠보로 만든 나비 12마리가 장식될 예정이다. 2012년 제작 완공을 기념해 12마리다. 나비 장식품은 칠보공예 작가가 따로 제작 중이다.

“이탈리아의 한 음대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은 다른 악기와 달라 그 나라 그 민족이 만들어야 하는 악기다.’ 파이프오르간은 사실 피리의 군락이에요. 그런데 피리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심지어 풀잎으로도 만들 수 있는 게 피리예요. 이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민족 고유의 특성에 따라 피리의 모양과 음색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서양에서는 플루트처럼 명료하고 깨끗한 소리를 선호하지만 우리는 퉁소와 같이 허스키한 피리 음색을 좋아하죠. 그래서 저는 우리 정서에 맞는 파이프오르간을 만들고 싶어요. 우리 민족의 에너지가 담긴 신명나는 파이프오르간이요. 한국적인 정서를 담기 위해 언젠가는 파이프오르간에 옻칠도 할 겁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