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혁명을 주도했던 인텔의 지난 몇 년간 성적표는 그야말로 초라하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모바일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1971년 세계 최초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하면서 PC와 노트북 시대에는 각광을 받았지만 산업 트렌드가 스마트폰, 태블릿 등 모바일로 옮겨가면서부터 별다른 혁신 제품을 선보이지 못한 게 쇠락의 주된 요인이다. 인텔의 시장지배력이 정체된 사이 ARM과 같은 후발주자들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것도 인텔 경영진에게는 우울한 소식이다.
최근 인텔은 대대적인 혁신에 돌입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제휴를 맺어 윈텔(윈도우+인텔)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처럼 강력한 파트너십 구축이 인텔 부활의 핵심이다. 최근 인텔은 다양한 분야에서 제휴를 이끌어 내고 있다. 구글에 인수된 모토롤라와 프로세서 공급과 관련해 제휴를 맺은 데 이어 우리 기업인 LG와는 무선디스플레이, 삼성과는 모바일 운영체제(OS)와 관련해 연합군을 형성했다.
기업, 산업 간 동맹(Alliance)이 글로벌 경제 화두로 커지고 있다. 초정밀 기술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기업, 산업 간 동맹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다양해지는 소비자의 기대치(니즈)를 맞추기 위해서는 자사 또는 자기 산업 분야에 없는 기술·전략을 타사, 타산업에서 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삼성과 애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특허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라도 기술협약을 통한 동맹은 필수적인 요소다. 김진성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연구위원은 “1990년대는 규모의 경제를 갖추기 위해 기업 인수·합병(M&A)이나 대규모 지분 투자를 통한 전략적 제휴가 이뤄졌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는 친환경 등 같은 특정 시장을 선점하거나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성격의 제휴가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 간 동맹으로 친환경 기술 습득
대표적인 것이 자동차 산업이다. 지난해 르노-닛산과 다임러는 상호 공동출자를 통해 부품조달 및 기술개발과 관련된 제휴를 체결했다. 포드는 도요타와 손잡고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용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공동 개발키로 결정했다. 르노-닛산과 다임러 간 동맹 체계 구축은 시사점이 적지 않다. 특히 소형차 라인업을 확대해야 하는 다임러 입장에서는 르노-닛산과의 동맹 관계를 구축하는 게 절실하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번 동맹전략 구축으로 양사는 스마트 포투와 르노 트윙고의 차기 모델을 공동으로 개발하는 것은 물론 생산도 분담할 계획이다. 또 르노-닛산도 다임러에 소형 세그먼트용 3, 4기통 엔진을 공급하고 다임러는 르노-닛산에 인피니티용 4, 6기통 엔진을 상호 공급키로 결정했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1991~1995년 주요 완성차 업체 간 제휴발생 건수는 연평균 2건에 불과했지만 2006~2011년에는 연평균 19.2건으로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진성 연구위원은 “친환경차 분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있는 포드, 폴크스바겐과 독자기술 확보가 힘든 푸조-시트로앵(PSA), 다임러는 동맹이라는 방식으로 시장 진입을 시도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글로벌 산업 분야에서 기업 간 동맹 시스템이 가장 잘 구축된 곳은 항공 산업이다. 현재 글로벌 항공 산업은 스카이팀, 스타얼라이언스, 원월드 등 3개 동맹으로 나눠져 있다. 이 중 국내 항공사인 대한항공이 주도하고 있는 스카이팀은 현재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플로트, 동방항공, 남방항공 등 16개 항공사로 구성돼 있으며 173개국, 958개 도시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결성된 스카이팀의 연간 이용객수는 5억600만명, 하루 출발하는 항공편만 1만4731회에 이른다. 아시아나항공이 참여하고 있는 스타얼라이언스는 25개 항공사를 회원사로 두고 있다. 전 세계 190개국 1293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으며 하루 출발 편수는 2만500회에 달한다. 현재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주요 항공사는 전일본공수(ANA), 타이항공, 싱가포르항공, 루프트한자항공, 유나이티드항공, 에어캐나다 등이다. 스타얼라이언스는 지난 1997년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의 제안으로 구체화됐다. 아시아나항공은 지난 2002년 6월 가입했다. 일본항공(JAL), 아메리칸항공, 브리티시항공 등 12개 다국적 항공사가 뭉친 원월드는 현재 147개국 766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이들 세 항공 동맹의 시장 점유율은 스타얼라이언스가 29.3%, 스카이팀이 24.6%, 원월드가 23.2% 수준이다.
이들 항공 동맹은 영업, 마케팅, 운송, 예약 등 모든 항공 업무를 제휴하는 등 고객들의 편리성 향상에 주력하고 있다. 항공유 공동구매, 각 회원사가 보유한 부대시설을 이용하는 것도 주요 서비스다. 현실적으로 직항을 개설하기 힘든 곳은 회원 항공사 노선을 이용하도록 해 노선 개설에 따른 비용을 줄이는 것도 동맹 체결로 얻은 부수적인 효과다. 정진구 아시아나항공 홍보팀 대리는 “항공 동맹 가입에 따른 회원사 간 공동마케팅으로 부대수익을 포함해 연간 430억원(추정치) 이상의 추가수입이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이들 3개의 항공 동맹이 이미 7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해 놓고 있어 후발 항공사들이 항공 동맹에 가입하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생존하기가 어려운 구조”라면서 “중남미, 중국, 인도 등 신흥시장을 놓고 세 항공 동맹 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화물운송 분야도 동맹관계가 형성돼 있어 대한항공, 델타항공, 에어프랑스, 아에로멕시코 등 4개 회사가 화물 분야에서 공동으로 설립한 스카이팀 카고(Cargo)와 스칸디나비아항공(SAS), 싱가포르항공이 의기투합한 와우(Wow)얼라이언스, 전일본공수(ANA)와 화물운송업체 UPS가 공동으로 세운 ANA-UPS얼라이언스는 화물항공 업계에서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3대 항공사 동맹 시장점유율 70% 이상 차지
또 다른 화물수송 분야인 해운분야에서도 동맹 움직임은 활발하다. 지난해 12월에는 현대상선이 속해 있는 뉴월드얼라이언스(TNWA)와 그랜드얼라이언스(GA)를 하나로 합친 ‘G6’ 얼라이언스가 새롭게 출범했다. ‘G6’ 얼라이언스에는 현대상선 외에 APL(싱가포르), MOL(일본), 하팍로이드(독일), NYK(일본), OOCL(홍콩) 등 6개 해운회사가 참여하고 있다. 이들 6개 회사의 해운동맹 체결로 G6얼라이언스의 시장 점유율은 17~20% 수준으로 높아지게 됐다. 이는 현재 14~15% 정도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해 단일 해운사로는 세계 최대인 덴마크 머스크를 뛰어넘는 규모다. G6얼라이언스가 출범하게 된 것도 외형적인 면에서 머스크를 뛰어넘기 위해서다. 공동 노선 확대로 시너지를 높여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게 글로벌 경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판단이다. 지금까지 세계 해운업계 동맹은 뉴월드얼라이언스와 그랜드얼라이언스, CKYH얼라이언스 등 3개였으나 이번 제휴에 따라 2개로 재편됐다. 한진해운은 중국 코스코(COSCO), 일본 케이라인(K-Line), 대만 양밍(Yang Ming) 등 3개 회사와 함께 만든 해운동맹 CKYH얼라이언스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국제 항로에 13척의 배를 투입하고 있는 현대상선은 지금까지 뉴월드얼라이언스 제휴를 통해 그동안 43척의 배와 5개 항로를 이용해왔다. 이준기 현대상선 홍보팀 차장은 “G6얼라이언스 서비스가 본격화되면 총 9개 항로에서 90척의 배를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며 “지금까지 운행하지 않았던 발틱해 일대와 스칸디나비아 지역까지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G6얼라이언스 노선에는 우리나라의 경우 부산과 광양, 중국은 상하이·닝보 등 8개 항구, 유럽에서는 영국(사우샘프턴, 탬즈포트), 독일(함부르크, 브레머하펜), 네덜란드(로테르담), 프랑스(르아브르), 폴란드(그단스크), 스웨덴(고텐부르크)의 항구도 이용할 수 있다. 또 지중해에서는 이탈리아(제노바), 프랑스(포쉬르메르), 스페인(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이집트(다미에타), 터키(이스탄불), 우크라이나(오데사), 이스라엘(아슈도드)이 새로운 노선으로 추가됐으며 사우디아라비아(제다), 아랍에미리트(제벨알리), 오만(살랄라), 이집트(포트사이드), 모로코(탕헤르), 스리랑카(콜롬보) 등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으로 서비스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중장기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지분 교환과 같이 지배구조와 관련해 동맹을 맺는 것도 최근 나타나는 모습 중 하나다. 대표적인 것이 포스코와 신일본제철 간 전략적 제휴다. 포스코는 회사 설립 초기부터 신일본제철로부터 제철 기술을 지원받은 전략적 관계다. 현재 두 회사는 인력·기술제휴, 합작사 설립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협력을 벌여나가고 있다. 두 회사는 지난 2007년 세계 최대 철강기업인 아르셀로-미탈의 적대적 M&A에 대비, 보유 지분을 늘려 유사시 백기사(우호 지분) 역할까지 맡고 있다. 2012년 6월말 현재 포스코는 신일본제철의 지분 3.5%, 신일본제철은 포스코 지분 5.05%를 보유하고 있다. 이외에 신일본제철은 포스코가 베트남에 지은 냉연공장에 15% 가량 되는 지분을 투자했다. 현지 업체와 공동으로 설립한 태국 냉연공장도 신일본제철이 약 40%, 포스코가 약 12%씩 공동으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포스코 관계자는 “최근 우리(포스코)가 기술도용 등의 문제로 신일본제철과의 제휴가 예전만 못하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지만 두 회사 간 파트너십에는 아직까지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면서 “원가 절감을 위한 기술 확보에 공동 대처하는 등 협력 관계는 여전하다”고 설명했다.

상호 회사 지분 맞바꿔 협력 강화
최근 게임업체 넥슨이 같은 게임소프트웨어 개발사 엔씨소프트 주식을 대거 인수한 것도 전략적 차원을 넘어 동맹 관계로 확대시킨 케이스라는 지적이다. 지난 6월8일 넥슨은 넥슨 일본법인을 통해 엔씨소프트 최대주주인 김택진 대표 지분 14.7%(321만8091주)를 주당 25만원(총 8045억원)에 인수, 최대주주가 됐다. 관련업계에서는 지분 매각을 통해 8000억원 가량 현금을 확보한 김 대표가 넥슨의 지주회사인 비상장사 넥슨홀딩스(NXC)의 지분을 매입해 두 회사 간 강력한 협력 관계를 유지시켜 나갈 거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급변하는 글로벌 게임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경쟁력을 갖춘 두 대표 회사가 기술적인 것은 물론 지배구조상으로도 제휴를 맺어 적극적으로 제휴를 벌어나갈 것이라는 게 금융권의 일반적인 추론이다. 넥슨과의 합병설이 불거지자 금융당국이 요청한 조회공시에서 엔씨소프트가 “합병은 없다”고 밝힌 것을 놓고 관련업계가 두 회사의 완전한 합병보다는 강력한 제휴, 동맹 쪽에 무게를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외 시장이 이렇게 변하자 삼성, 현대차, LG 등 주요 대기업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삼성전자만 해도 이재용 사장이 직접 나서, 다른 해외 기업과의 제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현대차도 계열사 모비스가 독일 부품 전문기업 보쉬와 합작사를 설립하는 등 전략적 제휴 강화를 최일선 과제로 내걸었다. 익명을 요구한 모 증권사 지주회사담당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는 애플과의 특허전쟁, 일본-대만-중국 가전, 반도체 업체들 간 제휴라는 장벽이, 현대차는 다른 글로벌 완성차 회사 간 제휴가 활발해지는 게 기업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국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도 “주요 산업의 기술 트렌드가 급속도로 변하는 과정에서 나홀로 성장은 불가능하다”면서 “기업 간 동맹은 비용절감을 넘어 생존의 문제로 커졌다”고 말했다. 김 책임연구원은 스마트폰 운용체제(OS)인 안드로이드를 놓고도 여러 기업 동맹이 나눠지는 것을 예로 들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야 하는 삼성, 현대차, LG와 같은 국내 대기업들은 타업종,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쌓는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무리하게 기업 M&A에 나서기보다는 서로 간 필요에 따라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는 게 유리하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