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의 일이다. 영화 ‘아바타’로 유명한 미국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냈다. 지구상에서 가장 깊은 바다 속을 탐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태평양 괌의 남서부에 위치한 마리아나 해구의 깊이 1만898m의 심해로 내려가 3시간에 걸쳐 과학 연구를 위한 샘플을 수집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른바 ‘딥 씨 챌린저(Deep See Challneger)’ 프로젝트였다.
카메론 감독의 야심찬 프로젝트에는 한국의 한 중소기업도 참여했다.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 위치한 코캄이 그 주인공이다. 코캄은 카메론 감독이 탑승한 소형 잠수정에 배터리를 공급했다. 카메론 감독은 수심 1만2000m의 압력에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고성능 배터리를 찾기 위해 세계 유수의 배터리 업체의 제품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했고 그 결과 코캄의 배터리를 선택했다.

배터리 제품뿐만 아니라 플랜트도 수출
코캄은 세계적인 2차전지 전문기업이다. 휴대전화와 노트북에 사용되는 소형 배터리에서 전기차와 경주용 자동차, 군사무기, 산업용 대용량 배터리 등 2차전지 전 분야를 아우르는 제품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몸집이 큰 것은 아니지만 기술력만 놓고 따지면 코캄을 앞서는 기업을 꼽기 어려울 정도다. 코캄의 기술력이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지는 세계 2위의 화학업체인 다우케미칼과의 협력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우케미칼은 현재 미국에서 연간 기준으로 600MWh급의 리튬 폴리머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매년 전기차 2만대에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다. 놀라운 것은 이 공장을 짓고 있는 기업이 코캄이라는 사실이다. 코캄은 다우케미칼에게 공장을 지어주고 배터리 제조기술을 제공할 예정이다. 다우케미칼은 이 신설회사의 이름을 ‘다우코캄’이라고 명명했다. 다우코캄 공장은 올해 8월에 완공될 예정이다. 황인범 코캄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다우코캄이라는 회사명만 보면 마치 다우와 코캄의 합작회사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코캄의 지분은 전혀 없습니다. 회사 이름에 코캄을 붙여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코캄다우’라는 이름을 먼저 검토했을 정도로 다우가 코캄 브랜드를 원했습니다. 배터리 전문기업으로서 코캄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한 거죠. 공장 건설과 기술 라이선스료, 판매량에 따른 러닝 개런티를 받는 계약인데 공장이 100% 가동하고 모두 팔린다면 연간 70억~80억원의 러닝 개런티를 받게 됩니다.”
코캄은 원래 엔지니어링 회사였다. 플랜트 설비를 전문적으로 제조했다. 배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창업 후 10년이 지난 1998년 무렵의 일이었다. 개발을 시작한 지 1년 만인 1999년에 독자적인 기술로 리튬 폴리머 배터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매출은 크지 않았다. 당시 2차전지 시장은 이제 경우 형성되기 시작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이왕 새로운 사업을 하는 것, 아무도 하지 않는 사업을 해보자는 것이 당시 판단이었습니다. 배터리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이 배터리를 생산할 제조설비도 스스로 해결해 나갔습니다. 엔지니어링으로 시작한 기업이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델이 없다 보니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습니다. 시장을 만들면서 사업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코캄의 배터리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무렵의 일이었다. 한 무선조종(RC·Remote Control)대회에서 우승한 팀이 코캄의 배터리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RC마니아들 사이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RC용 소형 배터리는 당시 코캄의 주력제품이었다.

차세대 전력산업 핵심시장 ESS 사업 진출
소형 배터리 시장에서 성공한 코캄은 곧바로 중대형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전기자동차용, 군사용, 산업용 배터리에 도전한 것이다. 국내시장에서는 군사용 배터리에 주력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시장이었고 특수분야인 만큼 중소기업이라도 기술력만 있으면 진입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코캄은 현재 우리 군에 어뢰와 장갑차 등에 장착되는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군사용으로 선택됐다는 것은 최고의 성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배터리 없이 현대전을 치르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뢰를 비롯한 모든 유도무기엔 배터리가 장착됩니다. 배터리의 힘으로 날아가는 겁니다. 탱크와 장갑차, 잠수함 등 기동무기도 배터리가 있어야 합니다. 특히 잠수함의 경우 배터리의 성능은 곧 잠수함의 작전능력을 좌우합니다. 물속에서 버틸 수 있는 시간에 따라 작전범위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통신기기와 로봇에도 필수적이지요.”
전기차 시장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전기차를 적극적으로 보급하고 있는 유럽시장에서 성과가 컸다. 900Wh/셀 급의 초대용량 리튬배터리를 유럽의 전기버스업체에 납품했고 스위스의 출퇴근형 전기차에도 제품을 공급했다. 현재 코캄은 유럽과 미국의 100여개 전기차 제조사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는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세계적인 자동차 부품기업인 매그나사와 기술제휴를 맺는 등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그나사는 코캄과 함께 전기차용 부품 시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코캄의 자동차용 배터리가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코캄 배터리를 쓴 독일의 BMW팀이 F1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데 이 팀이 코캄에 감사의 말을 전해 화제가 됐죠. 순간적으로 큰 힘을 내는 코캄 배터리 덕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말이었습니다.”
최근 코캄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시장은 에너지저장시스템(ES S·Energy Storage System)이다. ESS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시설로 특히 전력회사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재생에너지와 스마트그리드 등 ESS는 현대 전력산업에서 핵심적인 설비로 부상하고 있다. 배터리 없이 전력산업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다.
신재생에너지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태양광 발전을 예로 들어보자. 태양광 발전으로 생산된 전력은 바로 사용하기 어렵다. 일조량에 따라 발전량과 질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일단 배터리에 저장한 후 사용해야 안정적인 전기를 얻을 수 있다. 배터리가 없다면 신재생에너지를 상용화할 수 없는 셈이다.
“세계적으로 ESS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력을 저장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컨대 전기요금이 싼 밤에 생산한 전력을 저장해 두었다가 비싼 낮에 판매하거나, 낮과 밤의 전력수요를 조절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스마트한 전력 사용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배터리는 ESS 산업의 핵심 설비입니다.”
코캄은 ESS용 대용량 배터리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계획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시장이다. 미국의 시장조사 전문업체인 파이크리서치에 따르면 전체 ESS 시장은 2010년 2조원에서 2020년 47조원으로 10년 만에 24배, 같은 기간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은 6000억원에서 12조원으로 20배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ESS 사업의 성공 가능성은 이미 상당 부분 확인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주요 전력회사에 관련 설비를 수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올해만도 미국 중부지역 최대 전력회사인 KCP&L(Kansas City Power and Light)사에 1MWh급, 미국 최대 전력회사인 듀크에너지에 750KWh급 ESS 설비를 수출했다.

러시아 기업, 코캄에 공장 건설 의뢰
미국의 전력회사들이 코캄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앞선 기술력 때문이다. ‘적층기술’이라는 독특한 기술을 비롯해 코캄은 25개의 원천기술을 포함해 100여개의 특허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황 사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적층방식은 배터리의 셀을 가로 세로로 겹쳐 연결하는 기술입니다. 전극이 여러 곳에 있고 내부 저항이 적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방법에 비해 충전이 빨리 되고 순간적으로 많은 전력을 배출할 수 있습니다. 대용량 배터리 기술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는 얼마나 많은 전력을 순간적으로 빼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야 큰 장치를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ESS 시장은 종전까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사실 두 지역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시장도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ESS 시장은 전세계로 번져나가고 있다. 기후변화 등으로 발전량을 늘리기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2020년까지 6조4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코캄이 눈여겨보는 시장 중 하나는 러시아다. 러시아의 전력 사정은 열악한 편이다. 정전이 잦고 전압도 불규칙하다. 질과 양 모두 개선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배터리 수입이 크게 늘고 있다. 최근에는 수입 대신 자체 생산 쪽으로 가닥을 잡고 협력 기업을 물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코캄의 강점 중 하나는 배터리 기술은 물론 배터리 플랜트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공장을 지어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최근 러시아에서 협력 요청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트너 검증 등을 거친 후 협력 여부를 결정할 계획입니다.”코캄의 매출액은 매년 큰 폭으로 불어나고 있다. 2007년 214억원이던 것이 지난해 1285억원을 돌파했다. 5년 만에 6배 성장한 셈이다. 하지만 성장에 매몰될 계획은 없다. 내실을 다지면서 속도 조절을 하면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어나간다는 구상이다.
“공장을 신설하기보다 기존의 생산라인을 고부가가치화하는 데 역점을 둘 계획입니다. 기술개발도 강화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재와 기계 등 전문성이 강한 기업들과 ‘코캄 커뮤니티’라는 협력 관계도 맺었습니다. 수년 내에 아직까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배터리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 황인범 사장은…
1953년생. 78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77년 SKC 입사, 2007년 SKC 필름사업본부장. 코캄 엔지니어링 사업본부장, 2009년~현재 코캄 대표이사 사장